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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7. 삼국의 문화



고조선과 한 군현 시대(고조선 멸망한 직후)에 한나라의 문화가 전래되었고, 한자도 이때부터 사용되었다. 삼국 시대에는 한학이 일어나고 유학이 발달했는데 고구려는 소수림왕 때 고급 유학 교육 기관인 태학을 설립하고, 그 이후 지방 각처에 민간 교육 기관인 경당을 설립했다. 태학에서는 박사들이 유교 경전인 오경과 중국 역사서 등을 가르쳤고 경당에서는 경전과 학문을 가르쳤다. 또한 광개토대왕비와 중원 고구려비는 당시의 뛰어난 한문 수준을 보여준다. 뛰어난 한문 수준으로 고구려 초기에 유기 100권을 편찬하고, 영양왕 때는 태학박사 이문진이 신집 5권을 편찬했다. 백제도 일찍이 한학이 발달했다. 오경박사와 의박사, 역박사를 두고 이들이 유교 경전과 기술 교육을 담당했다. 근초고왕 때는 박사 고흥이 국사인 서기를 편찬했고, 왕인 박사가 일본에 한학을 전했으며, 사택지적비에는 노장 사상이 세련된 문장으로 적혀 있고, 이를 통해 백제의 높은 한문학 수준을 알 수 있다. 신라의 경우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늦긴 했지만 지증왕 때부터 한문이 확산되어 중국식 왕호와 국호를 칭했고, 진흥왕 때 세워진 단양 적성비를 비롯한 4개의 순수비는 신라의 한문 수준을 보여준다. 또한 경주 석장사 뒤에서 발견된 임신서기석을 통해 신라에서도 유교 경전이 전파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진흥왕 때의 거칠부가 국사를 편찬했다. 특히 한자의 음과 훈을 빌려 우리말을 이두로 표기한 것은 신라인들의 한자 사용 능력을 보여준다. 


불교는 전제 왕권이 강화되던 시기(4세기 무렵)에 왕실의 주도로 도입되었고 새로운 국가 정신 확립과 강화된 왕권을 이념적으로 뒷받침하는 역할을 했으며, 불교 전래와 함께 선진 문화가 유입되었다. 고구려는 소수림왕 때에, 백제는 침류왕 때에, 신라는 눌지왕 때 고구려 승려 묵호자가 전했으나 법흥왕 때 이차돈의 순교 이후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도교는 고구려 영류왕 때 연개소문의 상소로 수용되었고, 귀족 사회에 널리 보급되었다. 보장왕 때 연개소문은 왕실과 연결된 불교를 견제할 목적으로 도교를 장려했다. 고구려 고분 벽화의 사신도(현무도, 강서대묘)는 도교의 방위신이고, 백제의 산수무늬 벽돌은 자연과 더불어 살고자 하는 염원을 담고 있으며, 금동 대향로는 신선들의 세계가 묘사되었다. 또한 사택지적비에서 노장 사상이 잘 표현되어 있다. 신라의 경우 시조 박혁거세를 신선으로 간주하고, 화랑의 수장을 국선 또는 풍월주라고 명명했다.

 

우리나라는 석탑의 나라라고 할 만큼 석탑이 발달했는데 고구려에는 남아있는 석탑이 없다. 백제에는 미륵사지 석탑(익산)과 정림사지 석탑(부여)이 있다. 신라에는 황룡사 9층 목탑(고려 시대에 몽고군의 침입으로 소실됨)과 경주 분황사 모전 석탑이 있는데 현재는 경주 분황사 모전 석탑만 남아있다.

 

불교의 전래와 함께 불상이 도입됬는데 대표적인 불상은 고구려는 금동 연가7년명 여래 입상이고, 백제는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 삼존상, 신라는 경주 배동 석조여래 삼존 입상이고, 금동 미륵보살 반가 사유상은 고구려, 백제, 신라 전체에 존재하는 불상이다. 


농경 또는 왕의 통치에 천문학이 필요했고, 천문 현상의 관측과 기록이 이루어졌다. 고구려의 천문도와 신라의 첨성대를 통해 천문학 수준을 알 수 있다. 백제의 칠지도와 금동 대향로, 신라의 금관과 금귀고리를 통해 금속 기술을 알 수 있다. 


삼국시대의 고분을 살펴보면 고구려는 초기에 돌무지무덤 양식의 무덤을 만들었고 대표적인 것이 장군총이고 계단식으로 되어있으며, 후기에는 굴식 돌방무덤 양식의 무덤을 만들었고, 대표적인 것이 무용총, 강서고분이고 널방 벽에 벽화를 그린 것이 특징이다. 백제의 경우 도읍이 한성일 때 돌무지무덤의 양식의 무덤을 만들었고 대표적인 것이 석촌동 고분군이고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것이 특징이며, 웅진으로 천도했을 때는 초기에는 굴식 돌방무덤 양식의 무덤을 만들었고, 대표적인 것이 공주 송산리 고분군이고, 후기에는 벽돌무덤 양식의 무덤을 만들었고, 대표적인 것이 무령왕릉으로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은것이 특징이며, 사비로 천도했을 때는 굴식 돌방무덤 양식의 무덤을 만들었고, 대표적인 것이 부여 능산리 고분군이며 작은 규모지만 세련된 것이 특징이다. 신라의 경우, 돌무지덧널무덤 형식의 무덤을 만들었고, 대표적인 것이 천마총이고 도굴이 어려운게 특징이다.

 

이러한 삼국 문화는 왜(일본)로 전파되었는데 고구려는 승려 담징이 종이와 먹을 전파하고 호류사 금당 벽화를 그렸고, 백제는 아직기가 한자를, 왕인이 천자문 논어를 전파하고 노리사치계가 불교를 전파했으며, 신라는 조선수로가 축제술을 전파했다.

 

삼국의 주변에는 일본과 중국이 있지만 서역과의 교류도 있었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 서역 계통 인물이 등장하고 사마르칸트의 아프라시아브 궁전 벽화에 고구려 사진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그려져 있고, 신라에서는 고분에서 서역의 유리그릇과 금제 장식 보검이 출토되었다.

 

참고자료: 

http://contents.history.go.kr/front/common/imageView.do?itemId=ta&imageId=ta_mm_h71_img_265_01

http://contents.history.go.kr/front/ti/sub.do?treeId=02006

http://contents.history.go.kr/front/ti/sub.do?treeId=02007

http://study.zum.com/book/11957   

http://study.zum.com/book/11865

함께 읽는 바른 한국사, 주보돈 감수, 김임천, 김형수 공편저, 도서출판 아이옥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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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kywalker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