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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9. 통일신라와 발해의 사회와 경제



신라는 삼국통일을 완수한 후, 고구려와 백제 귀족들을 골품제에 편입하고 유민들을 9서당(통일 신라의 중앙군)에 편성했다. 이것은 신라인과 고구려, 백제 유민들이 하나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진덕여왕을 끝으로 성골이 소멸했고, 3~1두품은 평민으로 간주되었다. 진골 귀족을 견제하기 위해 능력 있는 6두품을 등용했으나 신분의 제약을 극복하지 못했고 진골 귀족은 왕권의 강화로 세력이 약해졌으나 그 비중이 커서 신라 말기에는 다시 세력을 떨쳐서 왕권 경쟁이 치열해졌다. 

진골 귀족은 금입택(금을 입힌 집)이라고 불리는 저택에서 많은 노비와 사병들을 거느리며 생활했으며 식읍과 녹읍, 물려받은 토지와 노비, 고리대금업 등으로 돈을 모으고 수입 사치품들을 선호했다. 반면 평민은 자기 소유의 토지를 경작했고, 소작농의 경우, 귀족의 토지를 빌려 경작하고 수확량의 반 이상을 주인에게 납부했다. 귀족에게 진 빚을 갚지 못하면 노비가 되거나 도적이 되었다. 

지방의 토착 세력들과 사원(절)은 대토지를 소유함으로써 유력한 신흥 세력으로 부상했다. 중앙정부의 통치력이 약해서 납세를 거부했고, 그 부담은 농민에게 돌아갔다. 세수가 모자라고 통치력이 약한 중앙정부는 농민들에게 강압적으로 조세를 징수했고, 이에 반발이 일어나자 수리 시설을 정비하거나 구휼 정책을 실시했지만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상주에서 일어난 '원종, 애노의 난'을 시작으로 농민 봉기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삼국의 통일로 이전보다 더 넓은 토지와 농민을 확보했다. 수취 제도에 있어서 당나라의 조, 용, 조 체제를 도입했다. 토지에 부과한 조세는 통일 이전보다 완화된 생산량의 10분의 1을 징수했고, 촌락 단위로 직물과 특산물을 징수했다. 요역(토목공사)과 군역(병역의무)은 16~60세의 남자(정남)를 대상으로 했다. 조세와 요역 부과의 기준을 마련하기 위해 민정 문서를 만들어 3년마다 촌락의 토지면적, 인구 수, 소와 말의 수, 토산물의 변동 등을 조사했다. 민정문서에 호구(집 수)를 기록한 것은 국가가 노동력 수취를 중시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통일되기 이전에는 귀족들에게 녹읍이 지급되었는데 신문왕 때 왕권 강화로 관료전을 지급하고 녹읍을 폐지했으며, 성덕왕 때는 백성에게 정전을 지급했으나 경덕왕 때 녹읍이 부활하게 되는데 이것은 농민이 몰락하면서 신라가 붕괴데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통일 이전에는 경주에 동시만 있었으나 통일 이후에는 경주 인구가 늘어나고 생산이 늘어 효소왕 때 서시와 남시를 설치하고 시전을 두고 감독했다. 당나라와는 공무역과 사무역이 발달했고 산둥 반도와 양쯔강 하류에 신라방(신라인의 집단 거주지, 대부분이 상인과 선원들이었다), 신라소(당나라 거주 신라인들을 다스리는 자치 행정 관서), 신라관(숙소), 신라원(신라방 내부의 절)이 설치되었다. 8세기 이후에는 일본과도 무역이 성행했고, 쓰시마와 규슈에 신라 무역소를 설치했으며, 울산항이 주요 창구였다. 일본도 신라와의 교역을 위해 쓰시마 섬에 신라 역어소를 설치해 통역관을 양성했다. 중국 일본 뿐만 아니라 이슬람 상인과 왕래가 있었으며(괘릉 무인상) 울산항이 국제 무역항으로 발달했고 장보고가 청해진을 근거지로 남해와 황해의 해상권을 자악해 중개 무역을 하고 대당 무역을 주도했다.

 

장보고는 청해진을 거점으로 세력을 키워 신라의 지방 세력으로 성장했다. 신무왕을 즉위시키고 자신의 딸을 문성왕(신무왕의 아들)과 혼인시키려 했으나 중앙 귀족들의 반발로 무산되었고, 이를 계기로 반란을 일으키지만 살해되었다.

  

발해에서는 왕족인 대씨와 귀족인 고씨 등 고구려계 사람들이 지배층을 이루고 있다. 이들 밑에는 '백성'이라고 불리는 양민층이 있고 이들은 대부분 말갈족이다. 말갈인 중 일부는 지배층에 흡수되거나 지방의 우두머리가 되어 국가 행정을 보조했다. 발해는 지배층이 소수이고 피지배층이 다수라는 특징이 있고, 이 특징이 발해의 취약점이며, 멸망의 원인으로 작용했다. 

당나라의 제도와 문물을 수용했고, 유학생을 파견했다. 하층민들은 고구려나 말갈의 전통을 유지했고, 발해의 법률과 풍습은 고구려와 유사하다. 


발해는 지형의 특성 상 밭농사가 대부분이며, 일부 지역에서만 철제 농기구 보급과 수리 시설 확충으로 벼농사가 이루어졌다. 농사 외에는 수렵과 목축이 발달해서 돼지, 말, 소, 양 등을 길렀다. 금속 가공업, 직물업, 도자기업 등이 발달했고, 특히 철 생산이 풍부했으며, 구리 제련 기술이 발달했다. 주로 당, 신라, 거란, 일본과 무역을 했는데 모피, 인삼, 불상, 자기, 철, 말 등을 수출하고, 귀족의 수요품인 비단과 서적 등을 수입했다. 무역은 왕실 간의 공무역이 중심이었으나 민간 무역도 존재했고, 당나라는 산둥 반도와 덩저우에 발해관을 설치하고 발해인들이 이용하게 했다.

   

참고자료: 

http://contents.history.go.kr/front/ti/sub.do?treeId=03009

http://contents.history.go.kr/front/ta/view.do?levelId=ta_h71_0050_0010_0020_0020

함께 읽는 바른 한국사, 주보돈 감수, 김임천, 김형수 공편저, 도서출판 아이옥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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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kywalker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