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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8. 통일신라와 발해



신라가 통일되고 나서 발해가 건국되었고, 통일신라와 발해를 통틀어 남북국이라고 한다.


통일신라


진덕여왕 이후로 성골의 대가 끊어지게 되어 성골 다음의 진골 출신인 김춘추(무열왕)가 왕위에 오르게 되고, 혜공왕 때까지 무열왕계 후손들이 왕위를 독점하게 된다. 무열왕은 직계 자손의 왕위 세습을 확립하고, 상대등과 귀족 세력들의 세력을 억제했다. 그 다음 왕인 문무왕은 삼국통일을 완성하고 고구려와 백제의 옛 지배층을 골품제 체제에 편입하고 인재를 등용했다. 그 다음 왕인 신문왕은 장인인 김흠돌의 난을 진압하고 대대적으로 귀족 세력을 숙청하여 왕권을 강화했다. 유교적 인재 양성을 위해 국학을 설립하고 국왕 직속 기구인 집사부의와 그 장관인 시중을 중심으로 중앙정치조직을 정비해 집사부의 권한이 강화되고 상대등의 권한이 약화되었다. 또한 관리들에게 관료전을 지급하고 녹읍(경덕왕 때 부활함)을 폐지해 귀족들의 경제적 기반을 약화시켰다. 13부를 두어 행정업무를 분담하고 관리 감찰 기구인 사정부를 운영했다. 전국을 9주로(신라 본토에 3주, 백제 영토에 3주, 고구려 영토에 3주) 나누고 군사와 행정상 요충지에 5소경을 두어 수도가 한쪽으로 치우친 단점을 보완했다. 또한 주 아래에 군과 현을 설치하고 특수 행정구역으로 향과 부곡을 설치했다.

 

지방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상수리 제도(지방 세력가를 일정 기간 수도에서 거주하게 함)를 실시하고 지방관 감찰을 위해 외사정을 파견했다. 군사 조직은 중앙군 9서당, 지방군 10정(9주에 각 1정씩, 한주에 2정씩 배치)으로 설치했다. 

8세기 후반에 진골 귀족 간의 권력 다툼이 심화되면서 혜공왕이 피살되었고, 150년간 20명의 왕이 교체되었으며 822년에는 김헌창의 난이 발생했다. 진골 귀족들의 권력다툼으로 기강이 해이해지고 과도한 수취로 인해 초적이 된 세력들과 농민들의 조직적인 반란이 일어났다(진성여왕 때 원종과 애노의 난이 일어났다). 

이러한 혼란을 틈타 호족들은 중앙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반독립적인 세력으로 성장했다. 6두품 세력은 호족과 결탁하여 골품제 사회를 비판하며 새로운 정치 이념을 제시했다(최치원의 시무책 10여조). 세상이 어지러워서 새로운 사상이 유행했고, 선종 불교와 풍수지리설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러한 혼란은 후삼국 시대를 도래하게 된다. 견훤은 전라도 지역의 군사력과 호족의 지원을 바탕으로 완산주(전주)를 도읍으로 하는 후백제를 건국한다. 건국 이후 충청도와 전라도를 차지하고 그 지역의 우수한 경제력을 토대로 군사적 우위를 차지하여 대야성을 함락하고 경애왕을 자살하게 하는 등 신라에 적대적이였다. 중국과 외교 관계를 맺었으나 지나친 조세 수취와 호족 포섭에 실패하는 한계를 보였다. 궁예는 신라 왕족의 후예로 북원(원주)의 도적이었던 양길의 부하로 있다가 독립해서 강원도와 경기도 일대의 중부 지방을 차지하고 송악(개성)을 도읍으로 하는 후고구려를 건국한다. 광평성(장관은 시중 또는 광치나)을 설치해서 국정을 총괄하고 9관등제를 실시했다. 도읍을 철원으로 옮기면서 국호를 마진으로 고쳤다가 태봉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지나친 조세 수치와 실정, 미륵 신앙을 이용한 전제 정치를 도모해서 신하와 백성들의 신망을 잃게 되고 왕건에 의해 살해된다.

 

발해


고구려가 멸망하고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루자 당나라는 요동과 만주의 고구려 유민들을 포함한 저항 세력들을 영주(조양)로 이주시킨다. 영주에서 거란의 이진충이 반란을 일으키자 그 틈을 타 고구려 장수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을 이끌고, 걸사비우의 말갈인들과 함께 영주를 탈출했다. 걸사비우의 말갈은 당나라 군대에 격파되었고 청문령 전투에서 당나라 군을 물리치고 동모산으로 이동해 진국을 열었고 이후에 국호를 발해로 고친다. 대조영의 뒤를 이은 무왕은 북만주 일대를 장악하고 나서 흑수부 말갈이 당나라에 투항하자 장문휴로 하여금 당나라의 산둥 지방을 공격해 발해관을 설치해서 돌궐과 일본을 연결하여 당나라와 신라를 견제했으며 '인안'이라는 독자적 연호를 사용했다. 다음 왕인 문왕 때에는 당나라와 화친하면서 문물을 수용하고 체제를 정비했다. 수도를 상경으로 천도하고 신라와도 '신라도'라는 교통로를 개설해 관계를 개선했다. 또한 '대흥'이라는 연호를 사용하면서 중국과 대등한 지위를 과시했다. 9세기 초 선왕 때는 대부분의 말갈족들을 복속해 요동 지역으로 진출해 전성기를 누렸고, 중국인들이 발해를 '해동성국'이라고 불렀으나 그 이후에 귀족들의 권력 투쟁과 거란의 침입으로 926년에 멸망한다. 


발해에서 지배층은 고구려인이었고, 피지배층은 말갈족이었는데 말갈족의 수가 고구려인보다 많았다. 고구려를 계승한 것을 보이기 위해 왜(일본)에 보내는 국서에 고구려왕과 고구려국을 자처했고, 문화가 고구려 문화와 비슷했다. 당나라의 3성 6부제를 수용했으나 독자적인 명칭와 방식으로 운영했다. 3성(정당성, 선조성, 중대성)에서 장관은 각각 대내상, 좌상, 우상이고, 정당성의 대내상이 최고 실권자로 국정을 총괄했다. 정당성 아래에는 좌사정과 우사정이 있고, 좌사정이 6부 중 3부인 충(이), 인(호), 의(예)부를, 우사정이 그 나머지인 지(병), 의(형), 신(공)부를 담당했다.

 

지방 행정조직은 전국을 5경 15부 62주로 조직하고, 촌락은 토착 세력이 자치하도록 했다. 


발해가 멸망하고 일부 유민들이 정안국(압록강 유역을 중심으로), 대발해국을 세워 부흥운동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발해왕자 대광현이 다수의 유민들을 이끌고 고려에 망명했다.

 

참고자료: 

http://contents.history.go.kr/front/ta/view.do?levelId=ta_h71_0040_0010_0050_0030

http://study.zum.com/book/11611

http://study.zum.com/book/13575

한국사개설, 국사교재연구회 저, 학문사

함께 읽는 바른 한국사, 주보돈 감수, 김임천, 김형수 공편저, 도서출판 아이옥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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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kywalker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