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5. 신라의 삼국통일, 삼국의 통치체제
고구려-수나라, 고구려-당나라 전쟁
고구려 영양왕 때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자 영양왕이 직접 1만의 말갈군으로 요서지방을 공격했고, 수 문제는 수륙 3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했으나 풍랑, 홍수, 질병으로 군사들이 거의 죽어 침공에 실패했다. 수 문제의 뒤를 이은 수 양제는 113만 대군을 이끌고 3차례 원정을 했지만 첫 번째는 왕제 고건무(훗날 영류왕)와 을지문덕의 활약(살수대첩)으로 실패했고, 두 번째는 내분으로 실패했으며, 세 번째는 고구려와 친조의 조건으로 철수했다. 고구려 원정은 수나라 멸망의 계기가 되었고, 고구려 또한 큰 피해를 입었다. 수나라가 멸망한 후 당나라가 중국을 통일했다. 영양왕의 뒤를 이은 영류왕은 평화를 추구하고 천리장성을 구축했으나 귀족간의 내분이 일어났고, 천리장성의 공사를 감독하던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 영류왕을 제거하고 보장왕을 와위에 앉힌 후 대막리지가 되었다.
권력을 잡은 연개소문은 강력한 대외정책을 펴서 신라와 당에 강경히 대응했고, 백제의 의자왕이 신라의 대야성을 포함한 40여개의 성을 점령해서 김춘추(훗날 무열왕)를 보내 고구려에 구원을 청했지만 백제 성충의 개입으로 무산된다. 고구려는 백제(여제동맹), 돌궐, 왜와 손을 잡았고, 신라는 당나라(나당동맹)와 손을 잡는다. 당나라는 연개소문의 정변을 문제삼아 고구려를 침공한다. 당 태종 이세민은 직접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정벌을 단행했고, 요동성을 함락시키고 안시성에 도달했으나 안시성주 양만춘의 철저한 수비와 추위와 굶주림으로 인해 철수하게 된다. 그 이후로 당나라는 산발적으로 고구려를 공격했지만 실패했다.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
신라에서 무열왕이 즉위하자 당나라와 함께 백제와 고구려를 정벌하기로 한다. 이때 신라는 대동강 이남의 땅을 갖기로 하고, 당나라는 그 북쪽의 땅을 차지하기로 한다. 먼저 백제부터 정벌하는데 당 태종의 뒤를 이은 당 고종은 소정방을 13만 대군과 함께 백제 정벌을 하게 했고, 무열왕은 김유신을 5만 대군을 이끌고 백제를 침공한다. 당시 백제는 신라와의 전쟁에서 여러번 승리해서 교만과 호사에 빠졌고, 사치와 방탕에 빠져 자멸의 길을 걷고 있었다. 백제의 계백은 5천명의 결사대로 김유신의 신라군을 막아내지만 화랑 관창의 활약으로 인해 전멸하게 되고, 결국 나당연합군에 의해 사비성이 함락되어 백제는 멸망하게 된다.
백제의 멸망 이후 무열왕의 뒤를 이은 문무왕은 소정방, 계필하력의 당나라군과 고구려를 공격하지만 연개소문의 저항으로 인해 번번히 실패한다. 그러나 고구려는 수, 당과의 전쟁으로 국력이 소모되었고, 연개소문이 죽은 후 그 아들들 간의 권력다툼으로 인해 내부 분열이 일어난다. 결국 나당연합군이 이 틈을 타 고구려를 공격하고 당나라에서 이세적, 설인귀를 보내 고구려를 공격하게 하고, 문무왕도 왕제 김인문을 보내 고구려를 공격하게 한다. 그 결과 평양성이 나당연합군에 의해 포위되고 1년간 항쟁하지만 보장왕의 항복으로 고구려도 멸망하게 된다.
나당전쟁과 신라의 삼국통일
고구려가 멸망하고 나서 당나라는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려는 야욕을 보였고, 그러자면 신라도 정복해야 했다. 그리하여 신라는 당나라와 전쟁을 하게 되었고, 백제, 고구려 유민과 함께 당나라를 상대한다. 신라는 매소성과 기벌포에서 당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어 삼국통일을 완성한다.
고구려, 백제 유민과 함께 당나라를 몰아내고 통일을 달성해 민족 문화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지만 대동강 이남 지역만 차지하고 외세(당나라)를 끌어들인 불완전한 통일이라는 한계점이 있다.
백제와 고구려의 부흥운동
백제가 멸망한 후 왕족 복신과 도침이 주류성에서, 흑치상지가 임존성에서 군사를 모았고, 고구려와 왜(일본)에 원군을 청하고 왜에 있던 왕자 부여풍을 왕으로 하여 부흥운동을 일으켜 신라와 당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 부흥운동은 내부 분열로 인해 복신이 도침을 살해하고, 부여풍이 복신을 살해하게 된다. 이 때를 틈탄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부흥운동은 실패하게 되고 구원온 왜군도 나당연합군에 격파되었다.
고구려의 경우, 검모잠이 한성을 중심으로 보장왕의 서자 안승을 왕으로 하여 고구려 부흥운동을 일으켰으나 이것 역시 내부 분열로 인해 검모잠은 살해되고 안승은 신라로 투항해 금마저(현재의 익산) 지역의 보덕왕으로 임명된다.
백제 부흥은 완전히 실패로 끝났지만 고구려 부흥은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함으로써 결실을 맺었다.
삼국의 통치체제
고구려는 왕 아래로 수상급인 대대로와 10여 관등이 왕을 보좌하는 관등체계가 삼국 최초로 정립되었다. 제가 회의라는 귀족 회의가 있고, 전국은 동, 서, 남, 북, 내부의 5부로 나누고, 각 부는 욕살이라고 불리는 지방장관, 휘하의 성은 처려근지(또는 도사)라고 불리는 성주가 다스렸다.
백제는 왕 아래로 수상급인 상좌평과 16관등이 왕을 보좌하는 관등체계가 정립되었다. 중앙관제에 있어서 왕 밑으로 6좌평(내신좌평(왕명출납), 내두좌평(재무), 내법좌평(제사, 교육), 위사좌평(숙위), 조정좌평(법무), 병관좌평(국방))이 있었고, 사비성으로 천도한 후에는 기존의 6좌평 외에 중앙에 22부가 새로 설치되었다. 정사암 회의라는 귀족 회의가 있고, 수도는 상, 전, 중, 하, 후의 5부로 나누고, 지방은 전국을 5방으로 나누고, 각 방마다 방성을 두어 다스렸다. 방성에는 방령이라고 불리는 지방장관이 다스렸다. 방 아래에는 군을 두었는데 큰 방에는 10군, 작은 방에는 6~7군이 있었으며, 각 군은 군장 3인이 다스렸다.
신라는 왕 아래로 수상급인 상대등과 17관등(골품제와 결합)이 왕을 보좌하는 관등체계가 정립되었다. 중앙관제에 있어서 왕 밑으로 병부, 위화부, 집사부 등이 있었다. 화백 회의라는 귀족 회의가 있고, 수도는 급양, 사양, 본피, 모양, 한지, 습비의 6개 부로 편성하고 지방은 전국을 5개 주로 나누고, 각 주마다 군주라고 불리는 지방장관이 다스렸다. 주 밑에는 군이 있어 당주가 파견되었고, 군 아래에는 촌(성)이 있어 도사가 파견되었다.
고구려, 백제, 신라 공통으로 말단 행정단위는 촌이고 촌주가 지배했으며 지방 행정 조직이 그대로 군사조직이다. 이것은 지방관이 군대 지휘관임을 보여준다.
참고자료:
http://study.zum.com/book/12251
http://study.zum.com/book/13464
한국사개설, 국사교재연구회 저, 학문사
함께 읽는 바른 한국사, 주보돈 감수, 김임천, 김형수 공편저, 도서출판 아이옥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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