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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3. 고조선과 그 이후의 국가들



고조선


*원래 이름은 조선이지만 이성계의 조선과 구분하기 위해 고조선이라고 한다.

기원전 2333년에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했다. 실제 역사에서는 청동 무기를 사용하는 강력한 부족 세력의 군장(제정일치 지도자)이 최초의 군장 국가인 고조선을 설립했다. 다음은 단군의 고조선 건국 이야기이다.

위의 건국이야기로부터 고조선에 농경 사회가 형성되고, 계급이 발생하고, 제정일치의 지배자(단군왕검)가 존재했으며, 홍익인간의 통치이념으로 통치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의 지도는 고조선의 문화 범위와 고인돌(탁자식)과 비파형 동검의 분포를 나타낸 지도이다.

랴오허 강 주변의 요동과 요서 지방에서 주로 출토되는 비파형 동검과 만주지역, 한반도 북부에서 주로 발견되는 탁자식 고인돌을 통해 고조선의 문화 범위를 알 수 있다. 

기원전 5세기 경에 중국으로부터 철기 문화 등의 선진 문물을 수용했고, 기원전 4~3세기 경에는 중국 전국칠웅(戰國七雄: 중국 전국시대의 7개 국가)중 하나인 연()나라의 공격을 받아 세력이 수축되었다. 기원전 3세기 경에 부왕, 준왕 등이 등장해서 왕위를 세습했고, 왕 아래에는 박사(博士), 비왕(裨王), 상(相), 경(卿), 대부(大夫), 장군(將軍) 등의 관직을 설치했다.  


중국이 전국시대 이후(진시황의 중국통일)로 큰 혼란에 휩싸이자 연나라에 살던 유이민 무리들이 고조선으로 이주했다. 유이민 중의 한 사람인 위만은 유이민 중심으로 세력을 키운 다음 준왕을 몰아내고 고조선의 왕이 되었다. 위만이 왕이 된 이후 철기 문화를 본격적으로 수용해 농업과 무기 생산을 중심으로 한 수공업을 발전시켰으며, 지리적인 이점을 활용해 동쪽의 예와 남쪽의 진이 중국과 직접 교역하는 것을 차단하고 중개 무역을 독점했다. 이러한 고조선의 정책은 한나라를 자극했고, 당시 한나라 황제였던 한 무제는 고조선을 침공한다. 고조선은 초기에 한나라군을 물리쳤으나 기원전 108년에 장기간의 전쟁으로 지배층이 분열함에 따라 수도 왕검성이 함락되어 멸망한다. 고조선이 멸망한 후에 한나라는 4개의 군현을 설치한다.


고조선의 법은 8개로 된 8조법인데 이 중에서 다음의 3가지만이 전해진다.


1. 사람을 죽인 자는 즉시 사형에 처한다.

2. 남에게 상처를 입힌 자는 곡식으로 갚는다. 

3.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노비로 삼고, 속죄하려면 한 사람 당 돈 50만 전을 내야 한다. 


이 8조법을 통해서 고조선의 사회가 개인의 생명과 사유재산을 소중히 여기고, 노동력을 경제적 가치로 보았으며, 노비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통해 계급이 분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조선이 멸망하고나서 한나라의 군현이 세워졌을 때 법조항은 60여 조로 늘어났다.  


고조선이 멸망하고 나서 여러 소국이 등장했다. 철제 농기구의 사용으로 식량 생산력이 크게 증대되었고, 목축과 어로(고기잡이)가 발달했다. 잉여 생산물은 교역하는데 사용했고, 교역을 통해 문화적 접촉을 촉진시켰다. 철제 무기를 이용하여 활발한 전쟁을 벌였고, 이 과정에서 무력과 경제력을 가진 강력한 지배층이 형성되었다. 유력한 군장들이 왕을 선출하는 연맹 형태의 지배 구조였는데 이러한 나라에는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삼한(마한, 진한, 변한)이 있다. 그 위치는 다음 지도에 나와있다.


부여


부여는 송화강 유역의 평야지대를 중심으로 성장해서 총 8만 호에 이르는 큰 부족연맹체를 이루고 있었고, 일찍부터 북방의 유목민족이나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해 중국과 통교했다. 5부족연맹체의 왕은 족장들인 제가(마가, 우가, 저가, 구가)에 의해 선출되어 중앙을 다스렸고, 제가들은 지방의 4지역(사출도)을 각각 맡아 다스려서 왕권이 미약했다. 왕이나 가(加)들도 각기 대사자, 사자 등의 관리를 두고 있었다. 1세기 초에 왕호를 사용했고, 3세기에 선비족의 침략으로 세력이 위축되었고 결국 5세기 말에 고구려에 병합되었다. 

부여는 농경과 목축을 중심으로 하는 반농반목의 형태였고, 말, 주옥, 모피가 특산품이다. 풍습으로 순장(지배층이 죽었을 때, 그 신하나 노비 등을 함께 매장함)이 있고, 12월에 영고라는 제천 행사가 열렸으며, 소를 죽여서 그 굽으로 점을 쳤다. 부여의 법은 다음과 같이 전해지는 4조목이 있다. 


살인자는 사형에 처하고, 가족은 노비로 삼고, 절도한 자는 12배의 배상을 하게 한다. 간음한 자는 사형에 처하고, 질투한 자도 사형에 처한다. 시체를 가져가려면 소와 말을 바쳐야 한다. 


고구려


고구려는 부여 계통으로 부여계 유이민이 압록강 중류의 토착민과 함께 졸본 땅에 세운 나라이다. 건국 초기(기원전 37년)부터 주변의 소국들을 정복했고, 집안(국내성, 현재의 퉁구)으로 수도를 이전하면서 소노부, 계루부(왕족), 절노부(왕비족), 순노부, 관노부의 5부족 연맹을 이루는 고대 국가로 발전했고 그 이후에는 옥저와 동예를 정복했다. 국. 왕 아래에는 상가, 대로, 패자라고 하여 부여의 가(加)에 해당하는 독립적인 족장의 대가들이 있었다. 대가들이 있는데 각기 사자, 조의, 선인 등의 관리를 거느리면서 독립적인 세력을 유지했다. 귀족들의 모임인 제가 회의에서 왕을 선출하거나 국가 중대사를 논의하거나 중한 범죄자를 처벌했다.

풍습으로 10월에 동맹이라는 제천행사가 있고, 결혼 풍습으로 서옥제와 형사취수제(형이 사망하면 그 동생이 형수를 취함)가 있다. 다음은 광개토대왕비에 기록된 고구려 건국신화의 일부이다.   


아! 옛날 시조 추모왕이 나라를 세우셨다. 왕은 북부여에서 나셨으며, 천제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이시다. 알을 가르고 세상에 내려오시니, 날 때부터 성스러우셨다. □□□□□□ 명(命)에 길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부여의 엄리대수를 지나게 되어 왕께서 나루에서 말씀하셨다. "나는 천제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인 추모왕이다. 나를 위하여 갈대를 연결하고 거북이들이 떠올라라." 이 말씀에 따라 즉시 갈대가 연결되고 거북이들이 떠올랐다. 그리하여 강을 건너 비류곡 홀본 서쪽 산 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우셨다. (왕은) 왕위에 낙이 없자 (하늘로) 사신을 보내시니, 황룡이 내려와 왕을 맞이하였다. 왕은 홀본 동쪽 언덕에서 용의 머리에 서서 승천하셨다. 세자로서 고명(顧命)을 이어받은 유류왕은 도(道)로써 나라를 다스렸고, 대주류왕(대무신왕)은 왕업을 계승하여 단단히 하셨다.(□: 훼손되어 알 수 없는 부분)


옥저, 동예


옥저와 동예의 경우 옥저는 함흥 평야 일대에 위치해있고, 토지가 비옥해서 농사가 잘 되었다. 어물, 소금 등이 풍부했으나 고구려에 공납으로 바쳤다. 옥저의 풍속에는 민며느리제가 있고 사람이 죽으면 시체를 가매장했다가 뼈만 추려서 가족 공동 무덤에 안치하는 세골장이 있다. 동예는 스스로 고구려와 같은 종족으로 여겼으며, 옥저처럼 농사가 잘 되었고, 해산물이 풍부했다. 누에를 쳐서 비단, 삼베를 짜는 기술이 있었고, 동예의 특산품으로 단궁, 반어피, 과하마가 있다. 동예의 풍속에는 10월에 무천이라는 제천행사가 열렸고, 족외혼 풍습을 가지고 있었으며, 다른 부족의 영역을 침범하면 노비나 소, 말로 배상(책화)했다. 옥저와 동예는 고구려의 압력으로 연맹 왕국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읍군, 삼로가 부족을 지배했다. 다음은 '삼국지 위서동이전'에 나오는 서옥제와 민며느리제에 관한 글이다.  


서옥제: 혼인을 할 때 말로써 먼저 정한다. 여자의 집 본채 뒤에 서옥이라는 작은 별채를 짓는다. 사위가 저녁에 여자 집 문 밖에 도착해서, 스스로 이름을 말하고 무릎을 꿇어 절을 하며 여자와 같이 살게 해 달라고 두 번 세 번 청한다. 여자의 부모가 이것을 듣고 서옥에서 머무르는 것을 허락하면, 남자가 가져온 돈과 비단을 서옥 곁에 쌓아 둔다. 아들을 낳아서 장성하면 남편은 부인을 데리고 자기 집으로 돌아간다.

민며느리제: 여자의 나이가 열 살이 되면 며느리로 삼을 집에서 데려다 키웠고, 성인이 되면 친정으로 되돌려 보낸 다음 친정집에 돈을 지불하고 다시 여자를 맞아들여 혼인하였다고 한다.


서옥제와 민며느리제는 모두 신부 집안에서 발생하는 노동력 손실을 신랑 측에서 보상해 주는 것으로, 노동력을 중시하는 혼인 풍습이다. 


삼한(마한, 진한, 변한)


삼한은 고조선 유이민과 한반도 남부 토착 세력이 함께 세운 나라로 마한, 진한, 변한이 세워졌다. 마한, 진한, 변한은 부족국가들로 구성되어있고, 한강 유역에서 목지국이 성장해 그 국가의 지배자가 삼한 전체에 영향력을 행사해 그 대소에 따라 신지, 견지(대군장), 부례, 읍차(소근장) 등이 부족을 지배했지만 그 지배력이 강력하지 못해서 부여, 고구려 같은 연맹체적 지배능력은 없다. 제정 분리의 국가로 천군(종교적 지배자)이 계절제(5월, 10월)라는 제천행사를 주관하며 소도(신성한 장소로 죄인이 이곳으로 도망쳐도 군장이 함부로 체포할 수 없다)가 존재했다. 후에 마한은 백제에, 변한은 가야에, 진한은 신라에 흡수된다. 

변한에서 철의 생산이 활발해서 철제 농기구를 이용한 수전 농업(특히 논농사)이 발달했고, 철을 낙랑과 왜(일본)에 수출했다. 김제의 벽골제, 의성 대제지, 상주 공검지, 밀양 수산제, 제천 의림지 등의 저수지가 수전 농업을 뒷받침했다.  


참고자료: 

http://study.zum.com/book/12183   

http://contents.history.go.kr/front/kh/view.do?category=korean&levelId=kh_001_0010_0020_0020

https://ko.wikipedia.org/wiki/%EA%B4%91%EA%B0%9C%ED%86%A0%EC%99%95%EB%A6%89%EB%B9%84

한국사개설, 국사교재연구회 저, 학문사

함께 읽는 바른 한국사, 주보돈 감수, 김임천, 김형수 공편저, 도서출판 아이옥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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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kywalker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