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사/수학사(상)2022. 9. 24.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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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사 36-르네상스(1)

 

 

1. 인문주의

 

 1453년에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투르크에 함락됨에 따라 이 해는 정치사에서 연대를 가르는 좋은 길잡이가 되고 있다. 그러나 수학사에서 1453년이라는 해가 중요성이 있는지는 논의의 여지가 있다. 

 이 해에 망명자들은 고대 그리스 책의 사본을 가지고 이탈리아로 망명했고, 이로 인해 서유럽 세계가 고대의 유산을 물려받았다고 일반적으로 말한다. 그렇지만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은 정반대의 영향을 끼쳤다는 주장도 있다. 곧 서구 세계가 문학과 수학 양쪽 고전의 필사본에 대한 믿을만한 공급원이라는 것은 더 이상 믿을 수 없다. 

 당시 유럽은 흑사병으로 인한 충격에서 회복되었고, 또 인쇄술이 발명되어 학문적 저작을 전 보다 훨씬 널리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1447년 서구에서 처음으로 책이 인쇄되었고, 15세기 말 까지 30,000회 이상 재판되었다. 여기에 수학 서적은 거의 없었으나 그 중 몇 권은 이미 있던 사본과 함께 이후 수학의 발전에 기초가 되었다. 

 15, 16세기 인문주의자들은 새롭게 다시 발견된 그리스의 과학과 예술쪽의 유산에 호감을 가졌기 때문에 그때까지 친숙했던 라틴어나 아라비아어의 저작은 오히려 낮게 평가했다. 그 당시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인쇄된 것은 상당히 초보적인 분야 뿐이었다.

 

2. 쿠사의 니콜라스

 

 오렘은 측정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직선(씨줄)으로 표시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때문인지 르네상스 초기에 이론과 실제의 양쪽 면에서 구적법적 수학이 번성했다. 또한 쿠사의 니콜라스가 오렘과 비슷한 학설을 거론했다. 그는 중세와 근대의 경계에 있었던 인물이었고, 스콜라 철학이 과학적이지 못했던 이유는 측정을 게을리했다고 생각하고 지식은 측정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또한 인문주의자들에게 영향을 받아 신플라톤주의를 지지했고, 크레모나의 야곱이 번역한 아르키메데스의 저작 몇 가지도 공부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는 수학자보다는 성직자였다. 그는 추기경의 지위에 올랐으나 원의 정사각형화가 가능하다고 잘못 알고있던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서로 반대되는 것의 일치'라는 철학적 교리는 그에게 최대와 최소는 서로 관련 있다고 믿게 했고, 그는 원의 넓이는 삼각형과 일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원의 내접과 외접다각형의 평균을 정교하게 다룸으로써 원의 넓이와 같은 정사각형을 작도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것보다 중요한 것은 니콜라스가 고대 최고의 지식인들을 사로잡은 문제에 처음 도전을 시도한 현대 유럽인이었다는 사실과 그의 노력이 같은 시대 사람들을 자극해 그들이 니콜라스의 업적을 비판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3. 레기오몬타누스

 

 레기오몬타누스는 니콜라스의 이론상 잘못을 지적한 사람 중 하나이다. 그가 태어나면서 새로운 시대의 막이 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라이프치히, 비엔나 두 대학에서 배운 수학과 천문학에 열정을 쏟았다. 로마에서는 그리스어를 숙달했고 서로 상반된 경향인 과학과 철학에도 능통하게 되었다.

 니케아의 대주교 베사리온은 그리스 교회와 라틴 교회를 통합하려는 노력을 인정받아 추기경이 되었고, 콘스탄티노플의 고전적 학문과 서구의 새로운 르네상스 운동을 연결해 주는 일을 하게 되었다. 레기오본타누스와 베사리온과의 교우관계로 인해 고대의 과학적 유산을 번역, 출판하려는 뜻을 품게 되었다. 그(레기오몬타누스)는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공부한 뒤 독일로 돌아와 뉘른베르크에 인쇄소와 천문대를 세워 아르키메데스, 아폴로니우스, 헤론, 프톨레마이오스, 다른 과학자들의 저작의 번역물을 인쇄하려고 했으나 달력 개정에 협력해 달라는 교황의 요청으로 로마에 갔으나 도착하자마자 죽었다.

 레기오몬타누스의 관심은 폭넓고 다양했으며 전형적인 르네상스인이었다. 그가 이탈리아에 머무는 동안 당시 지도적인 인물 몇 사람과 사귀었고, 귀국한 뒤에는 그 사람들과 시사문제에 관해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관심은 폭넓었으나 쿠사의 니콜라스를 비난했다.

 레기오몬타누스의 공헌은 비엔나에서 스승 포이어바흐가 하던 톨레미의 '알마게스트'의 라틴어 번역을 완성한 것이다. 그의 인쇄소에서 포이어바흐의 '신천문론'을 인쇄했고, 이 책은 당시 널리 알려진 사크로보스코의 철학보다 더 뛰어난 책이었으나 인문주의자들은 아라비아어판의 중세 번역 판보다 더 나은 알마게스트가 필요하다고 통감했다. 따라서 포이어바흐는 레기오몬타누스와 함께 더 훌륭한 필사본을 구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여행하려 했으나 그(포이어바흐)가 일찍 죽었기 때문에 실행은 제자(레기오몬타누스)에게 맡겨졌고, 레기오몬타누스의 번역 사업은 자신이 손수 쓴 교과서로 마무리되었다.

 '톨레미의 알마게스트 요약'은 그때까지의 초등적이고 설명적인 천문학을 다루는 주석에는 자주 생략된 수학을 중점적으로 다룬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수학에서 가장 중요한 책은 '삼각법의 모든 것'이었다. 이것은 삼각형의 풀이법을 체계적으로 설명한 그의 저작인데 이것으로 삼각법이 부활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때까지 천문학에 관한 새 저작에는 반드시 삼각함수표가 실려있었고, 포이어바흐의 저작도 마찬가지로 새 사인함수표를 실었으나 이 경우에도 삼각법은 천문학의 하위 개념에 불과했다. 

 인도에서는 천문체계나 싯단타의 사인함수와 별개로 사인함수에 관심이 없었고, 삼각법에 관심많은 아라비아인 조차 나시드 아딘의 사각형론을 제외하면 삼각법이 독립적으로 다루어지는 일은 없었다. 사각형론은 그리스의 영향을 많이 받은 저작이었다. 그런데 번역의 시기인 12세기에 유럽은 아라비아 삼각법의 일부를 다루었으나 몇 세기에 걸쳐 라틴세계가 한 일이란 아라비아인의 업적을 베끼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레기오몬타누스는 나시르 아딘의 저서 내용을 잘 알고 있었고 따라서 이것이 계기가 되어 삼각법을 천문학과 독립된 학문으로서 체계를 세우는 것을 생각했다고 보인다.

 1464년 무렵에 쓰여진 레기오몬타누스의 '삼각법의 모든 것'에서 1권은 양과 비에 대한 기본개념의 기술로 시작하는데 대부분은 유클리드에서 인용했고, 그 뒤에 직각삼각형의 성질을 사용한 삼각형의 풀이법에 관한 50개 이상의 명제가 나온다. 2권은 사인 법칙에 대한 명확한 설명과 증명으로 시작하여 확장조건이 주어질 때 평면삼각형의 각, 넓이를 결정하는 문제를 실었다. 3권은 삼각법 사용 이전의 고대 그리스의 구면기하학의 교과서에 보이는 정리를 싣고, 4권은 굼녀 위의 사인법칙을 포함한 구면삼각법에 대해 쓰고 있다.

 이 책은 넓이의 공식을 말로 써서 사용했고 탄젠트함수를 제외했다는 점에서 나시르 아딘의 저작에 뒤떨어진다. 그렇지만 레기오몬타누스는 삼각법에 대한 또 하나의 논문 '방향표'에서 탄젠트함수를 다루었다.

 레기오몬타누스는 이 두 저작이 출판되기전 죽었기 때문에 그 저작이 세상에 나오는 것은 매우 늦어졌다. 그러나 그 책의 내용은 필사본으로 레기오몬타누스가 일하던 뉘른베르크 수학자들 사이에 알려져 있었다.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된 이후 100년 동안 유럽 중부의 도시 빈, 크라크우, 프라하, 뉘른베르크가 수학, 천문학에서 지도적 자리를 차지했다. 그리고 뉘른베르크는 인쇄술, 학문, 예술, 발명의 중심이 되고, 16세기 중엽에는 과학에서 가장 중요한 고전을 출판하게 되었다.

 

4. 대수학을 기하학에 응용하기

 

 레기오몬타누스는 삼각형의 일반적 연구에서 기하학적 작도문제를 연구했는데 그런 작도 문제는 유클리드의 도형분할론을 연상시키는 것이었고, 유클리드는 일반량을 다룬 반면 그는 선분에 특정한 수치를 주었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방법이 일반적인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선분에 이런 특정한 수치를 주어서 아라비아의 대수학자들이 고안하고 12세기의 번역시대에 유럽에 전해진 연산법을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작도문제는 유클리드의 원론이나 알콰리즈미의 대수학의 방법을 이용하여 작도할 수 있다.

 레기오몬타누스의 대수는 아라비아인의 대수와 마찬가지로 수사적이다. 몇 개의 생략기호가 쓰인 디오판투스의 '산술'은 그리스어로 그에게 알려졌고, 이것을 번역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유럽은 알콰리즈미의 틀에 박힌 대수학을 배웠고, 디오판투스의 산술은 수론의 더욱 어려운 부부노가 관련되었고, 레기오몬타누스는 산술을 펴낼 여유가 없었다. 게다가 그가 일찍 죽고 그의 원고는 뉘른베르크의 후원자에게 전달되었으나 후세 사람들이 효과적으로 이용하게 만들지 못했다. 그때문에 유럽은 대학, 교회서기, 상업활동, 다른 분야의 학자들을 통해 조금씩 전해지는 내용이 빈약한 그리스, 아라비아, 라틴의 전통 밑에서 힘들고 더딘 대수학을 배워야만 했다. 

 

5. 과도적인 인물

 

 레기오몬타누스의 시대는 과학사에서 중대한 시기이며 그는 이러한 상황의 대부분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안목과 능력이 있었다. 그의 고전에 대한 정렬은 인문주의자에게 뒤지지 않을 정도였지만 인문주의자들과 달리 과학에 강한 관심을 가졌고, 스콜라 학파나 아라비아의 학문을 경멸하지 않았으며 학문 뿐만 아니라 실용적인 기술에 대한 관심도 르네상스적인 인물이었다.

 레기오몬타누스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톨레미의 천문학 체계의 차이점에 대해 고민했고, 이미 오렘과 니콜라스까지 지구가 움직인다는 가능성을 제기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그는 천문학을 개선했다고 전해진다. 그가 더 오래 살았다면 코페르니쿠스를 앞질렀을 것이나 너무 일찍 죽어서 그 계획들은 모두 중단되었고, 천문학과 수학을 다음 단계로 진보시키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맡겨야 했다.

 

6. 슈케의 '세 부분'

 

 르네상스 초기 수학자는 거의 독일, 이탈리아 출신이었으나 프랑스에서도 1484년에는 3세기 전 피보나치의 '산반서'이래 가장 뛰어난 논문이 씌었다. 그 논문은 산반서처럼 19세기까지 인쇄되지 못했고, 이것이 슈케가 쓴 '수의 과학에서 세 부분'이다. 슈케는 파리에서 태어났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세 부분의 1부는 수에 대한 산술연산을 서술하고, 그 중에는 인도-아라비아 숫자에 대한 설명도 있다. 인도-아라비아 숫자에 대해 '10번째 숫자는 값, 의미가 없으므로 0, 없음, 값을 갖지 않는 숫자라고 한다'고 썼고, 네 가지 기본연산도 '더 많게\((\overline{p})\)', '더 적게(\(\overline{m}\))', '~로 곱한다', '~로 나눈다'

 평균의 계산에 관하여 평균 수의 법칙을 제시했고, 이 법칙에 따라 양수 \(a,\,b,\,c,\,d\)에 대해 \(\displaystyle\frac{a+c}{b+d}\)는 \(\displaystyle\frac{a}{b}\)와 \(\displaystyle\frac{c}{d}\)사이에 있다고 했다. 2부에서는 수의 근이 약호로 실려있다. 예를들어 \(\sqrt{14-\sqrt{180}}\)은 \(\mathbf{R})^{2}.14.\overline{m}.\mathbf{R})180\)으로 되어있는데 이것은 지금의 형태와 차이는 거의 없다. 

 가장 중요한 3부는 '최초의 법칙', 곧 미지수의 법칙, 우리가 말하는 대수를 다룬다. 슈케는 제곱을 champs, 세제곱을 cubiez, 네제곱은 champs de champs, 곧 미지량의 거듭제곱을 다음과 같이 그 항의 계수에 거듭제곱지수를 붙여 나타낸다.$$(5x,\,6x^{2},\,10x^{3}\,\rightarrow\,5^{1},\,6^{2},\,7^{3})$$ 게다가 0과 음의 지수는 양의 정수 지수에 다른 표시를 붙여 나타냈다$$9x^{0},\,9x^{-2},\,\rightarrow\,9^{0},\,9^{2m}$$ 이러한 기호법은 지수법칙을 눈에 드러나게 해주었고, 슈케는 이것을 오렘의 비례에 관한 저작에서 알게 되었다.$$(72^{1}\div8^{3}=9^{2m},\,72x\div8^{3})=9x^{-2}$$ 게다가 이 법칙과 관련해 2의 거듭제곱 사이의 관계도 관찰하여 지수가 0에서 20까지인 2의 거듭제곱표를 만들어 두 거듭제곱의 지수의 합은 각 거듭제곱에 대응한다는 것을 보이고 있다.

 슈케의 표에 대한 비슷한 관찰이 다음 세기에 여러번 되풀이 되면서 로그의 발견에 확실한 공헌을 했다. 

 3부의 후반은 방정식의 풀이법을 다룬다. 과거에 이미 다루었던 문제가 많이 실렸으나 그것은$$4.^{1}\text{equal}\times a\,\overline{m}.2.^{0}\,(4x=-2)$$이고 슈케가 처음으로 대수방정식에 독립된 음수를 도입했다는 것이다. 

 그는 방정식의 근으로 0을 인정하지 않았으나 찾는 수가 0일 수 있음을 알았고, \(ax^{m}+bx^{m+n}=cx^{m+2n}\)형태의 고찰에서 슈케는 몇 개의 식에서 허근이 유도된다는 사실을 발견했으나, '그런 수는 있을리 없다'고 했을 뿐이다.

 슈케의 '세 부분'은 파푸스의 집성처럼 독창성을 확인할 수 없다. 로슈가 쓴 '최신 산술집성'은 세 부분에 의존했다.

 

참고자료:     
수학의 역사-상, (칼 B 보이어, 유타 C 메르츠바흐 지음), 양영오, 조윤동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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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kywalker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