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사/수학사(상)2022. 9. 23.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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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사 34-중세 유럽(2)

 

 

6. 인도-아라비아 숫자의 보급

 

 중세 후기에는 교회, 대학 소속 수학자와 무역, 상업종사 수학자가 있어 서로 경쟁하기 보다 인도-아라비아 숫자를 보급하기 위해 노력했다. 13세기에는 각계 각층의 저술가가 알고리즘을 대중화하는데 도움을 주었고, 여기서는 세 사람에 대해 서술하고자 한다.

 프랑스의 프란체스코회 수도사 알렉산드르드 비르듀, 영국의 교사 (사크로보스코로도 알려진) 앨리펙스의 존, 이탈리아의 상인(보나치오의 아들 피보나치로 알려진) 피사의 레오나르드가 있었다.

 알렉산드르의 '알고리스모의 노래'는 시집이고 정수에 관한 기본연산이 완전하게 기술되어 있다. 여기서는 숫자로 인도-아라비아 숫자를 쓰고 0을 하나의 수로 다루고 있다. 사크로보스코의 '알기 쉬운 알고리즘'은 계산을 실제에 입각해 설명한 것으로 중세 후기를 통해 학교에서 사용된 천문학에 대한 그의 초동적인 작은 논문 전체와 인기를 다투었다.

 피보나치는 새로운 산법을 기술한 저작 '신반서'를 집필했고, 이 책은 인도-아라비아 숫자의 사용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대수적 방법과 문제에 관한 완벽한 논문(보고서)이다. 또한 이슬람과 기독교 중세의 사상, 곧 산술과 기하학이 연결되어 서로 뒷받침해주는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지만 기하학보다 수에 관한 것을 더 많이 다루었다.

 

7. 신반서

 

 신반서는 현대 독자각 읽을 가치가 있는 책은 아니다. 그 이유는 근을 구하는 방법을 포함한 보통의 필산, 곧 산술적인 전차를 설명하고 나서 통화교환에 복잡한 보수 체계를 이용하는 상거래 문제에 중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상분수, 60진 분수, 단위분수를 이용했으나 10진분수를 이용하지 않았다. 이 점에 관해서 피보나치는 비난을 받는다.

 

8. 피보나치 수열

 

 신반서의 대부분은 따분한 내용이나 몇 문제는 후세의 저술가가 인용할 정도로 재미있다.

 

(i) 다년생 식물 문제

 일곱 할머니가 로마로 여행을 갔다. 할머니마다 7마리의 노새를 몰고, 그 노새 한 마리마다 7개의 짐꾸러미를 옮기고, 그 짐꾸러미에는 각각 7개의 빵이 들어있었다. 또 그 빵에는 각각 7자루의 칼이 준비되어 있고, 그 칼에는 각각 7개의 칼집이 있었다.

 

(ii) 토끼문제

 토끼 한 쌍이 달마다 토끼 한 쌍을 낳고, 태어난 한 쌍의 토끼는 두 번째 달 부터 한 쌍의 토끼를 낳기 시작한다면 토끼 한 쌍에서 시작하는 경우, 한 해 동안 몇 쌍의 토끼가 태어날까?

 위 문제는 피보나치 수열 \(u_{n}=u_{n-1}+u_{n-2}\)이고 또한 다음이 성립한다.$$\lim_{n\,\rightarrow\,\infty}{\frac{u_{n-1}}{u_{n}}}=\frac{\sqrt{5}-1}{2}$$(위의 극한값은 황금분할비이다) 

 

9. 삼차방정식의 풀이법

 

 신반서는 피보나치의 가장 잘 알려진 저서이고 1228년에 개정판이 나왔으나 학교에서는 평판이 나빠 19세기가 되어서야 인쇄되었다. 피보나치의 저서 대부분은 수준이 너무 높아 동시대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었고, 신반서 이외에도 그의 저서 '수론'에는 디오판투스를 연상시키는 부정문제, 아라비아인과 중국인을 연상시키게 하는 확정 문제가 수록되어 있다.

 피보나치는 분명히 여러 원전에서 인용했고, 특히 삼차방정식 \(x^{3}+2x^{2}+10x=20\)을 다루는 방법은 계산법과 논리의 상호관계를 볼 수 있어 흥미롭다. 그는 이 방정식에 유클리드적 의미의 근(\(a,\,b\)가 유리수일 때 근의 형태가 \(a+\sqrt{b}\))이 존재하지 않음을 처음으로 증명했고, 양의 근을 60진 소수 1;22,7,42,33,4,40으로 근사적으로 나타내려고 했다. 이것은 놀라운 성과였으나 어떻게 얻었는지는 알 수 없고, 다만 중국에서 알려진 호너법을 아라비아인에게 배웠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10. 수론과 기하학

 

 1225년에 피보나치는 수론과 동시에 부정해석에 관한 훌륭한 저작 '제곱의 책'을 출판했다. 그 책에는 다음 문제가 수록되어 있었고(디오판투스가 좋아했던)

 

 어떤 유리수의 제곱에 5를 더하거나 그것에서 5를 빼도 결과가 어떤 유리수의 제곱이 되는 구하라. 답: \(\displaystyle3\frac{5}{12}=\frac{41}{12}\)

 

 도 그 책에는 디오판투스의 저작이 있고 아라비아인이 널리 이용하던 항등식이 자주 쓰이고 있다.$$(a^{2}+b^{2})(c^{2}+d^{2})=(ac+bd)^{2}+(bc-ad)^{2}=(ad+bc)^{2}+(ac-bd)^{2}$$몇 문제와 풀이법에서 피보나치는 아라비아인의 방법을 따르고 있다. 

 피보나치는 원래 대수학자였으나 1220년에 '기하학의 응용'이라는 책도 썼다. 그는 바빌로니아와 아라비아의 경향을 계승하고 기하학의 문제를 풀기 위해 대수를 이용했다.

 

11. 요르다누스 네모라리우스

 

 피보나치만큼 뛰어나지는 않으나 동시대에 요르다누스 네모라리우스라는 유능한 청년이 있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적 과학관을 대변하는 인물이고, 뒤에 중세의 기계술학파로 알려진 학파의 창시자이다. 그 이전 사람들이 증명하려 했으나 실패한 빗면의 법칙을 처음으로 바르게 공식으로 만든 것은 바로 그였다. 이것을 삼각법 용어로 \(\displaystyle F:\,W=\frac{1}{\csc\theta}\)를 뜻하는데 오늘날 공식 \(F=W\sin\theta\)에 해당한다. 여기서 \(W\)는 무게, \(\theta\)는 경사각, \(F\)는 힘이다. 

 요르다누스는 기계 뿐만 아니라 산술, 기하학, 천문학에 대해서도 책을 썼다. 특히 그의 '산술'은 16세기 후반까지 파리의 대학에서 인기있던 주석서들의 바탕이 되었던 것이다. 산술은 수를 나타낼 때 숫자 대신 문자를 이용했고, 이 결과로 일반적인 대수 정리를 기술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이러한 문자의 사용은 '매개변수'의 개념을 시사했으나, 요르다누스의 후계자들은 그의 의도를 지나쳤다. 

 그들은 요르다누스의 다른 저작 '주어진 수에 대하여'에 보이는 대수의 아라비아적 측면에 더 많은 흥미를 보였다. 요르다누스의 문자사용 방법에 하나의 숫자에 문자를 두 개 사용하는 경우(예: 선분길이 \(ac\))가 있다.

 

12. 노바라의 캄파누스

 

 3세기에 걸쳐 인기 있던 산술법칙의 해설서 '산법의 증명'도 요르다누스의 업적이었다. 이 산법의 증명에는 보에티우스, 유클리드의 영향이 보이나 아라비아의 대수적 특징도 보인다. 그렇지만 유클리드의 영향이 더 강했던 것은 교황 우르바누스의 직속 사제인 노바라의 캄파누스의 저작이었다. 

 중세 말기에 아라비아어에서 라틴어로 유클리드 원론을 번역한 권위자는 캄파누스였는데 이것이 처음 인쇄된 것은 1482년이었다. 요르다누스와 캄파누스 모두 접촉각(뿔 모양각)에 대해 논했는데 그 주제는 수학이 더욱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양상을 띄었던 중세 후기에 활발한 논의를 불러일으켰다. 

 캄파누스는 접촉각, 곧 원의 호와 호의 끝점에서 그은 접선이 만드는 각과 서로 만나는 두 직선이 만드는 각을 비교하면 유클리드의 원론 10권의 명제 1, 곧 착출법의 기본 명제와 모순이 생긴다는 것을 알았다.

 두 직선이 이루는 각은 분명히 접촉각보다 크다. 그러므로 큰 쪽의 직선각에서 반 이상을 빼고 계속해서 그 나머지 각에서 반 이상을 줄이고 또 다시 그 각의 반 이상을 계속 줄여나가면 마지막으로 접촉각보다 작은 직선각을 얻는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옳지 않다.

 캄파누스의 착출법의 명제는 똑같은 종류의 양에 적용하는 것이고, 접촉각은 직선각과 성질이 다르다는 옳은 결론을 내렸다.

 요르다누스와 캄파누스는 각의 삼등분에도 관심을 보였고 언어는 달랐으나 내용은 같다.

 삼등분된 각 \(AOB\)를 반지름 \(OA=OB\)이고 꼭짓점이 중심인 원을 그린다. 그리고 중심 \(O\)에서 반지름 \(OB\)에 직각이 되도록 반지름 \(OC\)를 긋고 \(A\)를 지나 \(DE=OA\)가 되도록 선분 \(AED\)를 긋는다. 마지막으로 \(O\)를 지나 선분 \(AED\)에 평행한 직선 \(OF\)를 긋는다. 그러면 각 \(FOB\)는 구하려는 각 \(AOB\)의 \(\displaystyle\frac{1}{3}\)이 된다.

 

13. 13세기의 학문

 

 13세기는 그 이전 중세의 어느 시대보다 눈에 띄는 진보를 이루었기 때문에 이 세기를 때로 '가장 위대한 세기'로 본다. 많은 유명한 대학인 볼로냐, 파리, 옥스포드, 케임브리지 대학은 12세기 말~13세기 초에 설립되었는데 이 시기는 또한 웅대한 고딕 양식의 대성당인 샤르트르, 노트르담, 웨스트민스터, 라임스 성당이 세워진 시기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과학도 부흥되었고 대하과 교회 부속학교에서 가르쳤다. 

 

14. 중세 운동학

 

 수학의 역사는 평탄하고 끊임없는 발전의 기록은 아니었다. 따라서 상승하던 동력이 13세기 동안 추진력을 잃었다고 해도 놀랄 일은 아니다. 고전 기하학은 더 높은 수준으로 부활시킬 만큼 파푸스에 맞먹는 인물이 당시의 라틴 세계에는 없었다. 기계학은 아르키메데스의 정역학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학 두 분야를 손에 넣었기 때문에 13,14세기의 학자의 흥미를 끌었던 학문 분야이다. 14세기에는 일반적으로 변화의 연구, 그 가운데서도 운동의 연구가 각 대학, 특히 옥스포드 대학과 파리 대학에서 인기 있는 주제였다. 

 옥스포드와 머튼 대학에서는 스콜라 철학자들이 오늘날 일반적으로 머튼의 버칙으로 알려진 일정 변화율의 공식을 이끌어내었다. 거리와 시간으로 나타내면 그 법칙을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다.

 

 어떤 물체가 등가속도 운동을 한다면 물체가 도착하는 거리는, 다른 물체가 앞의 물체의 소요시간의 중간 시점에 갖고 있던 속도로 같은 소요시간을 등속도로 운행할 경우의 도착거리와 같다.

 

 이것은 "평균속도는 처음 속도와 마지막 속도의 산술평균이다"를 뜻한다. 한편 파리 대학에서는 운동량에 대해서 더 상세하고 명확한 이론을 연구했다.

 

참고자료:    
수학의 역사-상, (칼 B 보이어, 유타 C 메르츠바흐 지음), 양영오, 조윤동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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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kywalker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