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사/수학사(상)2022. 9. 22.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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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사 32-아라비아의 패권(3)

 

 

13. 아불 웨파와 알 카르히

 

 아불 웨파는 삼각법학자이며 유능한 대수학자였다. 그는 알콰리즈미의 대수학에 주석을 남겼고, 디오판투스의 '산술'을 아라비아어로 번역했다.

 아불 웨파의 후계자인 알 카르히는 그 번역본을 이용했고, 디오판투스의 아라비아 제자가 되었으나 디오판투스 해석에는 손대지 않았다. 이것은 알 카르히가 인도의 부정해석보다 알콰리즈미의 대수에 관심이 있음을 뜻한다. 이차방정식의 기하학적 증명을 하는 아라비아의 전통을 따랐음에도 불구하고 디오판투스처럼 이차방정식에만 머물지 않았다.

 특히 \(ax^{2n}+bx^{n}=c\)형태의 방정식에 대한 최초의 수치적 풀이법을 제시했고, 유리수에 대한 디오판투스의 제한을 없앴다. 2차보다 높은 차수의 방정식을 (거듭제곱의 관점에서) 대수적으로 푸는 것이 르네상스 시대의 수학이 취했던 초기의 발전방향이었다. 

 

14. 알 비루니와 알 하젠

 

 11세기 초기 알 카르히의 시대는 아라비아 학문의 역사에서 빛나는 시대였고 간략히 언급할 만한 많은 동시대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원래 수학자가 아니었다. 서양에서 아비센나로 알려진 이븐 시나는 이슬람권에서 일류의 학자이자 과학자였다. 그러나 그는 의학이나 철학에 비하면 수학에서 한 일은 적었다.

 그는 유클리드의 원론을 번역하고 구거법을 해설했다(확증은 없으나 구거법의 발명자로 본다). 그러나 그것보다 수학을 물리학과 천문학에 응용한 사람으로 더 기억되고 있다.

 이븐 시나는 그리스 학문과 이슬람 사상을 융화시켰듯이 같은 시대 사람인 알 비루니는 아라비아인에게 '인도지'라는 저명한 저작을 통해 인도의 수학과 문화를 알렸다. 알 비루니는 싯단타와 자리 기수법에 관한 완전한 기술을 포함해서 심정적이나 공정한 설명을 했다. 또 헤론의 공식과 브라마굽타의 공식을 증명한 것도 또한 그였다.

 그리고 브라마굽타의 공식이 원에 내접하는 사각형에만 적용될 수 있다고 올바르게 기술했다. 원에 9각형을 내접하는 문제에서 알 비루니는 이 문제를 \(\cos3\theta\)에 대한 삼각법 공식을 써서 방정식 \(x^{3}=1+3x\)를 푸는 문제로 바꾸고 그 근이 다음과 같음을 보였다.$$1;52,15,17,13\left(=1+\frac{52}{60}+\frac{15}{60^{2}}+\frac{17}{60^{3}}+\frac{13}{60^{4}}=1.8793852468\right)$$또한 알 비루니는 그노몬의 길이에 관한 장에서 인도인의 그림자 계산법에 대해 설명했다. 지구가 지축을 중심으로 돌고 있는지 어떤지에 대한 논고를 작성했으나 이에 대한 해답을 주지 않았다. 또한 알 비루니는 비중과 분수 우물의 원리에 관한 연구를 통해 물리학에 이바지했다. 그러나 물리학자이자 수학자로서 그는 서양에서 알 하젠이라고 알려진 이븐 알하이잠에 견줄 수 없었다. 알 하젠의 저서 중 가장 중요한 논문은 '빛에 관하여'였다. 톨레미의 반사와 굴절에 관한 연구에 자극을 받아 쓴 이 논문은 중세와 근세 초기의 서양 과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광원으로부터 빛이 볼록거울 위에서 관측자의 눈에 정확히 반사되는 점을 찾는 문제는 오늘날 알 하젠의 문제로 알려져 있고, 원뿔곡선으로 풀 수 있는 문제이다. 그는 또한 포물선과 축과 임의의 세로축으로 둘러싸인 부분을 포물선의 꼭짓점에서 그은 접선을 중심으로 회전한 입체의 부피를 구함으로써 아르키메데스의 의(擬)원뿔체에 관한 성과를 더욱 진전시켰다.

 

15. 오마르 카얌

 

 아라비아 수학은 다음의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 인도가 기원인 자리를 정하는 원리에 바탕을 둔 산술

(2) 그리스, 인도, 바빌로니아에 기원을 두지만 이슬람교도에 의해 체계적으로 만들어진 대수학

(3) 본질은 주로 그리스에서 유래하지만 아라비아인이 인도의 방식을 응용하고 새로운 함수와 공식을 덧붙여 만든 삼각법

(4) 그리스에서 유래하지만 아라비아인이 여기저기에 일반화 과정을 걸친 기하학

 

 (3)에 관해서는 알 하젠과 동향이며 동시대 사람인 이븐 유누스가 다음의 공식을 유도했다.$$2\cos x\cos y=\cos(x+y)+\cos(x-y)$$ (4)에 관해서 보면 알 하젠보다 약 한 세기 뒤에 오마르 카얌이 알콰리즈미의 대수학보다 더욱 발전한 삼차방정식을 포함하는 '대수학'을 썼다. 아라비아 선인들처럼 오마르 카얌도 이차방정식에 대해 산술적, 기하학적 풀이법을 모두 제시했다. 

 일반적인 삼차방정식의 산술적 풀이가 불가능하다고 믿었고, 원뿔곡선을 이용한 풀이법을 사용했다. 그러나 오마르 카얌은 모든 삼차방정식에 적합한 방법을 일반화했다. 초기 저작에서 삼차방정식을 다룰 때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삼차방정식은 평면기하학(자, 컴파스)으로는 풀 수 없다. 왜냐하면 삼차방정식은 정육면체를 갖기 때문이다. 이것을 풀려면 원뿔곡선이 필요하다.

 

 오마르 카얌은 3차보다 높은 고차방정식에 대해서는 앞에서 기술한 기하학적 방법을 생각하지 못했다(공간이 3차원을 넘지 않는다). 오마르 카얌은 다음과 같이 삼차방정식을 풀었다.

 \(x^{3}+ax^{2}+b^{2}x+c^{3}=0\)으로 하고 \(x^{2}\)를 \(2py\)라 하면 \(2pxy+2apy+b^{2}x+c^{3}=0\)을 얻는다. 

 이렇게 구한 방정식은 쌍곡선을 나타내고, 치환에 이용된 등식 \(x^{2}=2py\)는 포물선을 나타내기 때문에 이 두 곡선이 만나는 점의 가로(\(x\))좌표가 이 삼차방정식의 근이다.

 오마르 카얌은 음의 계수의 개념이 없어서 \(a,\,b,\,c\)가 양, 음, 0인 경우를 고려해야 했고, 각 경우에 쓰이는 원뿔곡선을 명확히 밝혀야 했다. 왜냐하면 오마르 카얌의 시대에는 일반 계수의 개념이 없었기 때문이고 주어진 삼차방정식의 근이 모두 구해질 리도 없었다. 왜냐하면 오마르 카얌은 음의 근을 옳은 근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원뿔곡선의 모든 교점에 대해서 주목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 이전 그리스의 삼차방정식의 기하학적 풀이법에서 계수는 선분이었으나 오마르 카얌의 저서에는 계수는 특정 수가 되었던 사실도 주목해야 한다. 

 아라비아적 절충주의에서 가장 많은 성과를 가져다 준 공헌은 수치적 대수와 기하학적 대수 사이의 간격을 메우려는 노력이 있었던 점이다. 이 방향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은 뒤의 데카르트였으나 오마르 카얌은 이 방향으로 접어들면서 "대수학이 미지수를 구할 때 사용하는 수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대수학과 기하학이 겉보기에 다르다는 사실에 관심을 쏟아서는 안된다. 대수학이란 증명된 기하학적 사실이다"고 서술했다. 또한 그는 유클리드의 비례론을 수치적 방법으로 바꾸면서 무리수를 정의하는 문제로 다가가서 실수의 개념에 진지하게 전반적으로 몰두했다.

 

16. 평행선 공준

 

 대수학에서 오마르 카얌은 더 높은 차수의 이항전개식에서 계수를 찾기 위해 발견한 법칙을 어딘가 다른 곳에서 설명했다고 하나 그런 저작은 남아있지 않다. 그가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중국에서 보인 파스칼 삼각형으로 보인다. 당시 아라비아와 중국 간 교류는 활발하지 않았으나 실크로드를 통해 정보가 전해졌을 수 있다.

 아라비아인은 기하학보다 대수학과 삼각법에 관심이 있었으나 기하학 중 유클리드의 5공준(평행선 공준)의 증명에 특별한 관심이 있었다. 그리스인 사이에서 이 공준을 증명하려는 시도는 사실상 기하학의 유명한 네 번째 문제(3대 작도문제 다음)가 되었고 이슬람 수학자들 몇 사람이 그 시도를 계속했다. 알 하젠은 세 각이 직각인 사각형(18세기 연구에 의해 람베르트 사각형으로 불린다)으로 출발해 네 번째 각도 또한 직각이어야 한다는 것을 증명했다. 사각형에 관한 그 정리에서 제5공준은 다음과 같이 쉽게 이해된다. 알 하젠은 이 증명에서 주어진 직선에서 같은 거리를 유지하면서 움직이는 점의 자취는 반드시 직선에 평행한 직선이 된다고 가정했다. 이에 대해 오마르 카얌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기하학에 운동의 개념을 도입하는 것을 반대했다는 것을 근거로 알 하젠의 증명을 비판했다. 그리고 두 변 길이가 깉고 두 변 모두 밑변에 수직인 사각형(18세기 연구에 의해 사케리의 사각형으로 불린다)에서 출발하여 사각형의(위쪽의) 다른 두 각을 조사했다. 그리고 그 각은 당연히 서로 같다는 것을 알았다. 물론 여기에는 세 가지 가능성이 있다(직각, 예각, 둔각). 여기서 오마르 카얌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원리, 곧 수렴하는 두 직선이 만나야 한다는 원리에 바탕을 두고 예각, 둔각을 제시했다. 이것 또한 오늘날 유클리드의 평행선의 공준에 해당하는 가정이다.

 

17. 나시르 아딘

 

 오마르 카얌이 1123년 죽을 무렵 아라비아의 과학은 쇠퇴기에 접어들었고, 지나친 정치적, 종교적 파벌 싸움이 원인이었다고 여겨진다. 13세기와 15세기에 저명한 아라비아 수학자가 나타났다. 

 훌라구 칸(칭기즈 칸의 손자, 쿠빌라이 칸의 동생) 밑에서 일한 천문학자 나시르 아딘은 사케리의 사각형에 관한 보통의 세 가설(둔각, 직각, 예각)에서 시작해 평행선의 공준을 증명하려는 노력을 계속했다. 그의 증명은 다음 가설에 바탕을 두었으나 이것 또한 유클리드의 공준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만약 직선 \(u\)가 \(A\)에서 직선 \(w\)에 수직이고, 직선 \(v\)가 \(B\)에서 직선 \(w\)에 대하여 기울어졌다고 하면 직선 \(u\)에서 직선 \(v\)에 그은 수선의 길이는 직선 \(v\)가 직선 \(w\)와 예각을 이루는 쪽에서는 선분 \(AB\)보다 짧고 직선 \(v\)가 직선 \(w\)와 둔각을 이루는 쪽에서는 선분 \(AB\)보다 길다"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아라비아 세 선구자 중 마지막 인물이었던 나시르 아딘의 이론은 17세기에 월리스가 번역하여 출판했다. 이 번역본은 18세기 첫 30년 동안 이루어진 사케리의 연구의 출발점이 된 것으로 보인다. 나시르 아딘은 아라비아인이 가졌던 독특한 관심에 역시 함께하여 그 결과로 삼각법 및 천문학에도 이바지했다. 아불 웨파의 연구를 이어받아 평면과 구면삼각형에 관해 처음으로 체계적 논문을 쓰는 일에 노력을 다했다. 또 삼각법을 독립된 학문으로 연구함으로써 그리스와 인도의 경우처럼 천문학의 보조 지식으로만 다루지 않았다. 나시르는 통상의 6개의 삼각함수(sin, cos, tan, 이 셋의 역수)를 이용하여 평면과 구면삼각형의 여러 문제를 풀기 위한 공식을 만들었다.

 불행히도 나시르의 연구는 유럽에 잘 알려지지 못했으나 코페르니쿠스가 천문학에 관심을 갖게 하는데 이바지했다. 

 아라비아인은 천체에 관해 아리스토텔레스와 톨레미 양쪽의 학설을 받아들였다. 이와 관련해 나시르 아딘은 통상의 주전원의 작도에서 두 개의 등속 원운동을 조합하여 왕복 직선운동을 만들어 낼 수 있음을 관찰했다. 곧 어떤 점이 주전원 주위를 시계방향으로 등속 원운동을 하고, 한편 그 주전원의 중심은 같은 크기의 다른 원을 따라 그 점 속도의 반으로 반시계방향으로 움직인다면 그 점은 선분을 그리게 된다(한 원의 그 지름의 두 배인 원에 내접하면서 미끄러짐 없이 회전한다면 작은 원 위에 있는 점의 자취는 큰 원의 지름이 된다). 이 '나시르 아딘의 정리'는 16세기 코페르니쿠스와 카르다노에게 알려지고 재발견되었다.

 

18. 알 카시

 

 나시르 아딘 이후 아라비아 수학은 쇠퇴의 길을 걸었으나 이슬람의 공헌에 대한 설명은 15세기 초 알 카시의 저작을 언급하지 않는다면 불충분하다.

 알 카시는 티무르의 손자 우르그 벡 황태자의 후원을 받았다. 그는 상당 수의 저작을 페르시아어와 아라비아어로 써서 수학과 천문학에 공헌했다. 중국에서 유래한 것 같은 호너법을 사용한 방정식의 풀이법에 관한 계산의 정확성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특히 알 카시는 중국에서 10진법 소수의 사용법을 배운 것으로 보인다. 그는 10진법 소수의 역사에서 중요한 사람이다. 10진법 소수도 마찬가지로 편리함을 보이기 위해 60진법 소수를 처음으로 사용했다. 60진법 소수는 거듭제곱근을 구하는 데 이용되었다. 

 어떤 수의 \(n\)제곱근을 구하는 방법을 설명하면서 60진법 수 34,59,1,7,14,54,23,3,47,37,40의 6제곱근을 구했다. 이 결과는 호너법의 순서(근을 어림해 근을 점차 줄이고, 근을 늘리거나 곱한다)와 조립제법과 비슷한 방법을 이용하여 계산한 놀라운 성과였다. 알 카시는 장황한 계산을 즐겼고, 따라서 자신의 계산값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보기로 그는 \(\pi\)의 근삿값을 계산했고, 그 값은 3.14159265358979였다. 초기에 \(2\pi\)의 값을 60진법 수 6;15,59,28,34,51,46,15,50로 계산했고, 이것을 10진법 수 6.2831853071795865로 변환했다. 알 카시의 저작에는 파스칼의 삼각형의 형태로 이항정리가 다시 나타난다.

 1436년 무렵 알 카시의 죽음으로 아라비아 수학에 대한 기록은 끝난다. 그 이유는 이슬람 세계의 문화적 붕괴가 제국의 정치적 분열에 앞서 완료되었기 때문이다.

 아라비아 학문이 쇠퇴하기 시작했을 때 유럽에서는 학문이 발전할 때였고 과거로부터 전해진 지적 유산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던 때였다. 아라비아인은 유럽이 그리스의 과학을 받아들일 준비가 될 때까지 '냉장실'에 보관했을 뿐이라고 가끔 여겨진다. 그러나 적어도 수학에서는 12세기와 13세기에 아라비아에서 라틴 세계로 직접 전해진 내용은 문맹 상태의 아라비아 정복자가 7세기에 받아들였던 내용보다 더 풍부했다는 사실을 이 장을 통해 알 수 있다.

 

참고자료:    
수학의 역사-상, (칼 B 보이어, 유타 C 메르츠바흐 지음), 양영오, 조윤동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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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kywalker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