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사/수학사(상)2022. 9. 22.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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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사 31-아라비아의 패권(2)

 

 

7. 대수의 문제

 

 알콰리즈미의 '대수학'에서 가져온 그림(수학사 30-아라비아의 패권(1)의 6 참조)과 유클리드의 원론에 보이는 그리스의 기하학적 대수의 그림을 비교하면 아라비아의 대수학이 그리스의 기하학과 매우 공통점이 많다는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그러나 알콰리즈미의 대수학의 첫 부분인 산술적인 부분은 그리스적 사고와 분명히 성질이 다르다. 그의 기수법 체제는 인도에서 유래했고, 방정식의 체계적인 대수학적 풀이법은 메소포타미아에서 배운 것으로 보이고, 또 풀이에 대한 그의 논리적인 기하학적 구성은 분명히 그리스에서 온 것이다.

 알콰리즈미의 대수학은 처음의 반 쯤은 방정식의 풀이법으로 채워져 있으나 그 밖의 문제도 실려있다(6가지 형태의 방정식 중 또 다른 기하학적 증명도 하고 있다). 아라비아인은 음의 근과 음의 절대량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오늘날 쓰이고 있는 부호가 붙은 수를 지배하는 법칙을 잘 알고 있었고, 상속에 관한 확대된 논의도 있다. 

ex) 어떤 남자가 두 아들을 남기고 죽었는데 재산의 \(\displaystyle\frac{1}{3}\)을 제 3자에게 물려줄 것을 유언했다. 그리고 두 아들 중 하나에게 재산 10디르함과 10디르함의 상속권을 남겼다.

 아라비아 법률에 따르면 아들이 자기 상속분 이상의 유산을 아버지 유산에서 받을 때 그 아들은 자기가 받을 수 있는 전부를 받지만 일부는 유산 상속 분으로, 또 나머지는 아버지에게 받은 하사품으로 간주된다. 아라비아에서 대수학이 장려된 것은 이 유산 상속에 관한 법률이 복잡했기 때문이다.

 

8. 헤론에서 유래된 문제

 

 알콰리즈미의 문제 중 몇 개는 아라비아 수학이 바빌로니아 수학의 흐름을 따른다는 사실에 대한 분명한 증거가 된다. 그런 문제의 하나는 헤론에게서 직접 가져왔다고 보고 있다. 왜냐하면 도형과 치수가 헤론의 그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 문제는 변의 길이가 10m이고, 밑변의 길이가 12m인 이등변삼각형(아래 그림)안에 내접하는 정사각형의 한 변의 길이는 얼마인지 하는 문제이다.

 대수학의 저자는 먼저 피타고라스 정리를 이용해 삼각형의 넓이가 \(8m^{2}\)라는 것을 얻는다. 따라서 삼각형의 넓이는 \(48m^{2}\)가 된다고 밝혔다. 그는 정사각형의 한 변의 길이를 사물이라 하고 사물로 이루어진 정사각형은 큰 삼각형의 넓이에서 정사각형의 바깥쪽에 있고 주어진 삼각형의 안쪽에 있는 삼각형 세 개의 넓이를 빼면 얻을 수 있다는 사실에 착안했다. 또한 아래쪽에 있는 두 삼각형의 넓이의 합은 6에서 사물의 반을 뺀 것과 사물의 곱이고 한편 위쪽의 삼각형의 넓인느 9에서 사물을 뺀 것과 사물의 반의 곱임을 알고 있다. 그것으로부터 사물(정사각형의 한 변의 길이)이 \(\displaystyle4\frac{4}{5}m\)라는 결론을 끌어내고 있다. 헤론은 이 답을 \(\displaystyle4\frac{1}{2}\frac{1}{5}\frac{1}{10}\)과 같은 단위분수로 나타내었다. 이 예를 통해 수학사에서 연속성을 예외가 아니라 오히려 원칙이라는 일반적 공리의 확증으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불연속이 생긴 것으로 보이는 역사 부분에 대해서는 급격한 변동의 틈을 메우는 기록이 흩어져 없어졌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먼저 고려해야 한다.

 

9. 압드 알 하미드 이븐 투르크

 

 알콰리즈미의 대수학은 보통 그 주제에 관해 맨 처음 쓴 책이라고 하나 최근 터키(튀르키예)에서 출판된 간행물이 이에 대해 몇 가지 의문을 제기한다. '혼합 방정식에서 논리적 필연성'이라는 제목의 저작의 사본은 분명히 알콰리즈미가 쓴 것과 거의 같은 내용인 '복원과 축소의 과학'에 대한 저서의 일부였고, 알콰리즈미와 비슷하거나 더 이른 시기에 출판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논리적 필연성의 일부에는 알콰리즈미의 대수학과 똑같은 형태의 기하학적 증명이 있고, 어떤 경우에는 같은 예제 \(x^{2}+21=10x\)가 사용되었다. 어떤 점에서 판별식이 음이면 이차방정식은 해를 갖지 않음을 보이기 위해 기하학적 도형을 제시했고, 이 점에서 압드 알 하미드의 설명이 알콰리즈미보다 완전하다. 두 사람의 저서에 보이는 비슷함과 양자에 보이는 체계적 구성은 당시 대수학이 이제까지 보통 생각해왔던 만큼 그렇게 새로운 발전의 소산은 아니었음을 나타내는 것 같다.

 알콰리즈미의 후계자들은 "문제가 방정식의 형태로 변형되면 이항과 상쇄(소거)의 법칙에 따라 계산하라"고 말할 수 있었다. 알콰리즈미의 대수학이 지금 남아있게 된 까닭은 당시 아라비아를 대표하는 뛰어난 교과서이고, 그의 저서와 대수학의 관계는 유클리드의 원론과 기하학의 관계와 같다. 사실 대수학은 가장 초보적인 해설서였으나 중대한 결점이 있다. 수사학적 형식 대신 기호 표기법이 개발되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수를 나타내는 말은 수를 나타내는 기호로 바꿨다는 것을 빼고는 기호 표기는 아라비아에서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10. 사비트 이븐 쿠라

 

 9세기는 아라비아의 수학의 영광의 시기였다. 그 이유는 이 세기 전반에는 알콰리즈미가, 후반에는 사비트 이븐 쿠라가 있었기 때문이다. 알콰리즈미를 유클리드라고 하면 사비트는 파푸스라고 할 수 있다. 사비트는 번역자(그리스어, 시리아어)를 위한 학교를 세웠고, 유클리드, 아르키메데스, 아폴로니우스, 톨레미, 에우독소스의 저작을 아라비아어로 번역하여 우리에게 크게 도움을 주고 있다(디오판투스, 파푸스 제외). 게다가 수정과 일반화를 제시할 정도로 사비트는 그가 번역한 고전 수학책의 내용을 완전히 이해했다. 친화수에 대한 공식도 그의 업적이다. 

 \(p,\,q,\,r\)이 소수이고 \(p=3\cdot2^{n}-1\), \(q=3\cdot2^{n-1}-1\), \(r=9\cdot2^{2n-1}-1\)이면 \(2^{n}pq\), \(2^{n}pr\)은 친화수이다. 또 파푸스와 마찬가지로 사비트도 피타고라스 정리를 모든 삼각형에 적용할 수 있도록 일반화했다.

 임의의 삼각형 \(ABC\)의 꼭짓점 \(A\)에서 각 \(AB'B\)와 각 \(AC'C\)가 모두 각 \(A\)와 같게 되도록 변 \(BC\)를 점 \(B'\)과 \(C'\)으로 나누는 선을 그으면 \(AB^{2}+AC^{2}=BC(=BB'+CC')\)이다. 

 사비트는 이 정리를 증명하지 않았지만 닮은삼각형에 관한 정리로 증명할 수 있다. 이 정리를 유클리드가 피타고라스 정리의 증명에 이용한 바람개비 도형을 훌륭하게 일반화했다. 

 보기를 들면 각 \(A\)가 둔각이면 변 \(AB\)위의 정사각형은 직사각형 \(BB'B''B'''\)과 같고 변 \(AC\)위의 정사각형은 직사각형 \(CC'C''C'''\)와 같다. 여기서 \(BB''=CC''=BC=B''C''\)이다. 

 곧 변 \(AB\)와 \(AC\)위의 정사각형의 합은 변 \(BC\)위의 정사각형에서 직사각형 \(B'C'B'''C'''\)을 뺀 것이다. 각 \(A\)가 예각이면 점 \(B'\)과 \(C'\)의 위치는 선분 \(AP\)에 대해 뒤바뀐다. 이 경우 \(AB\)와 \(AC\)위의 정사각형의 합은 변 \(BC\)위의 정사각형에 직사각형 \(B'C'B'''C'''\)을 더한 값이 된다. 

 각 \(A\)가 직각이면 점 \(B'\)과 \(C'\)이 점 \(P\)와 일치하기 때문에 이 경우 사비트의 정리는 피타고라스의 정리가 된다.

 그 밖에도 피타고라스 정리의 다른 증명, 포물선과 포물면에 생기는 조각의 연구, 마방진에 대한 논고, 각의 3등분과 새로운 천문학 이론이 사비트가 이룩한 학문에 대한 공헌이다.

 아라비아인이 그리스인을 모방했다고 이야기되는 경우가 있으나 그런 비난은 과장된 것이다. 사비트는 아리스토텔레스-톨레미의 천문학 요약 판에서 8개라고 생각했던 동심 천구에 대담하게 9번째 천구를 더했다. 그리고 한 방향에 한정된 히파르쿠스의 세차운동 대신 왕복운동에서 보이는 것 같은 분정의 움직임을 제안했다. 이런 그리스 천문학에 던져진 의문점은 이후 코페르니쿠스에 의해 시작된 천문학 혁명의 기반이 되었다. 

 

11. 아라비아 숫자

 

 아라비아 인들은 정복한 나라의 학문을 바르게 받아들였고, 아랍 제국의 경계 안에는 시리아인, 그리스인, 이집트인, 페르시아인, 터키(튀르키예)인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학문에서는 상당한 파벌 의식이 있었고 때로는 분쟁이 있었다. 보기를 들면 10세기와 11세기의 학자 아불 워파와 알 카르시의 저서에서 이런 점이 보인다. 그들은 저서의 어느 부분에서 천문학 책 Sindhind를 통해 아라비에에 들어온 인도 숫자를 이용하고 다른 부분에서 그리스의 알파벳 방식을 따르는 표기법(문자는 그리스 문자에 해당하는 아라비아 문자)을 채용했다. 결국 더 뛰어난 인도 숫자가 지배적이었지만 인도식 표기법을 이용했던 집단 안에서조차 숫자의 형태가 달랐다. 동쪽 사라센 숫자는 인도에서 직접 유래하고, 서쪽 무어인 숫자는 그리스 또는 로마 형식에서 유래했다. 이것은 시공간적으로 천천히 이루어진 변화의 결과였다고 말하는 편이 더 확실하다. 그 이유는 오늘날 쓰이는 아랍 숫자는 여전히 인도에서 쓰이는 현대적인 데바나가리 숫자와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결국 기수법에 내재하는 법칙이 중요하지 숫자의 형태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숫자는 이슬람 문화권과 매우 비슷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아라비아 숫자라고 한다(아래의 현대 숫자의 계보 참고).

이 두 개의 기수법에 내재하는 법칙이 똑같다는 사실과 우리가 사용하는 숫자의 형태가 아라비아에서 유래했을 것이라는 까닭에서 아라비아 숫자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아라비아 숫자의 배후에 있는 법칙은 인도에서 유래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 기수법을 인도 또는 인도아라비아 기수법이라고 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12. 아라비아 삼각법

 

 기수법에서 그리스 기원, 인도 기원 방식 사이에 논쟁이 있었듯이 천문학의 계산에서도 아라비아에는 초기에 두 종류의 삼각법이 있었다. 그리스 현의 기하학과 Sindhind에서 유래하는 인도의 사인표이다. 여기서도 분쟁은 인도의 승리로 끝나고 대부분의 아라비아 삼각법은 사인 함수를 바탕으로 확립되었다. 이 사인 삼각법은 인도에서 직접 전파되었기 보다 아라비아를 통해 이루어졌다.

 사비트가 조금 더 일찍 사인을 이용한 것 같지만 처음 전파한 것은 알바테니오스로 알려진 알바타니의 천문학이었다. '별들의 운행에 관하여'라는 저서에서 알바타니는$$b=\frac{a\sin(90^{\circ}-A)}{\sin A}$$와 같은 몇 개의 공식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 안에서 버스트사인과 사인함수가 나타난다.

 한 세기 뒤의 아불 웨파 시대에는 탄젠트함수가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앞에 기술한 관계는 간단히 \(a=b\tan A\)로 나타낼 수 있었다. 여기서 현대 삼각법에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서게 되었다. 그 이유는 아라비아의 탄젠트 함수는 인도의 사인함수와 달리 일반적으로 단위원에서 주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불 웨파에 의해 삼각법은 더 체계적인 형식을 갖추었고, 배각이나 반각 공식과 같은 정리가 증명되었다.

 탄젠트, 코탄젠트, 시컨트, 코시컨트를 어느 시기에 누가 발견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참고자료:   
수학의 역사-상, (칼 B 보이어, 유타 C 메르츠바흐 지음), 양영오, 조윤동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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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kywalker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