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사/수학사(상)2022. 9. 23.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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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사 33-중세 유럽(1)

 

1.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좌표계가 기하학에서 유용한 것과 같이 사건을 시기나 시대로 구분하는 일은 역사에서 필요하다. 정치사의 관점에서 476년 서로마 제국의 붕괴를 중세의 시작으로, 1453년 오스만 투르크(튀르키예)가 동로마 제국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시기를 중세의 끝으로 본다(정치를 무시하면 고대의 끝을 524년이라 할 수 있다). 

 수학사의 관점에서 중세가 시작되는 해는 529년이고, 중세의 끝은 1436년이다.

 1436년은 알 카시가 죽은 해이고, 뛰어난 수학자 요한 뮐러가 태어난 해이기도 하다. 1436년은 중세에서 수학에 뛰어난 사람들은 아라비아어로 글을 쓰고,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이슬람권에서 살았는데 반면에 새로운 시대에서 지도적 역할을 한 수학자들은 라틴어로 글을 쓰고 유럽의 기독교권에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해이다.

 여기서 독자는 각기 다른 언어를 썼던 5대 문명이 중세 수학사의 대부분을 형성했다는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앞의 두 장에서 그런 다섯 군 데 주요한 중세 문화 중 중국, 인도, 아라비아에서 이룩한 공헌을 언급했다. 이 장에서는 (1) 콘스탄티노플(비잔틴)을 중심으로 하여 그리스어를 공용어로 한 동로마 제국, (2) 중심지도, 단일 언어도 없었으나 라틴어가 학자들의 혼합어였던 서로마 제국의 수학자들을 살펴본다.

 

2. 비잔틴의 수학

 

 529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아테네에 있던 이교도 철학 학교의 문을 닫았을 때 학자들은 흩어져 일부는 시리아와 페르시아를 비롯한 그 밖의 장소에 영구히 정착했다. 또 그 가운데는 그대로 머문 사람도 있었고, 다른 학자들은 몇 년 지나서 되돌아왔다. 그래서 비잔틴 세계에서 그리스 학문이 중단되는 일은 없었다.

 6세기 초에 활동한 요한 필로포누스는 탁월한 물리학자였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론과 진공의 불가능성을 반박했고, 또한 운동하는 물체가 계속 운동할 수 있다는 것은 일종의 관성법칙이 작용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시사했다. 뒤에 갈릴레오가 보인 바와 같이 필로포누스는 "자유낙하하는 물체의 속도는 무게(중력)에 비례한다"는 학설을 "무게의 비에 따르지 않고 떨어지는데 걸리는 시간차는 대단히 작다"고 부정했다.

 필로포누스는 기독교도 과학자였다. 그러나 이교도의 옛 자료를 이용했고, 이것은 뒤에 이슬람의 사상가에게 영향을 주었고, 종교와 정치가 서로 다르다 할지라도 과학적 전통은 계승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필로포누스는 수학자가 아니나 아스트롤라베(천문관측의)에 관한 논문과 같은 몇 가지 저술은 응용수학에 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비잔틴 세계가 수학에 한 공헌은 거의 초등수준이었으며 주로 수학고전의 주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비잔틴 수학은 서구가 받아들일 체제를 갖추기 전까지 아라비아의 수학에 비해 고전을 가능한 한 많이 보존해두는 역할을 훨씬 잘 수행했다. 필로포누스는 니코마쿠스의 산술입문에 주석을 달아서 그 역할에 이바지했다. 11세기에 프셀루스의 주석이 화제가 되었다. 프셀루스의 저서 중 4과에 속하는 매우 초등적인 요약집은 16세기 서구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또한 두 세기 뒤 파키메데스가 수학 4과에 관한 또 하나의 그리스어 요약집을 냈다. 이 요약집은 고대 그리스의 실밭같은 전통이 동로마 제국에서 중세의 말까지 전해져 왔다는 사실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파키메데스는 같은 시대의 플라누데스(그리스 수도사, 베니스 대사)처럼 디오판투스의 산술에 대한 주석도 썼다. 이것은 동서 사이에 학문적 교류가 있음을 보여준다. 플라누데스는 인도 기수법 체계에 관한 저서를 썼는데, 이 때에는 이미 인도의 기수법은 그리스 세계에 들어와 있었다. 플라누데스의 제자인 모스코풀로스는 마방진에 대한 저서를 썼고, 산술학자이자 기하학자인 라브다스는 플라누데스 기수법에 관한 설명에 주석을 더했다. 또한 라브다스는 손가락 셈에 대한 책도 썼다. 그러나 비잔틴 수학은 강력하지 않아 이때까지의 것은 무시해도 좋을 만한 것이었다. 14세기에 이르러서 서구에서는 라틴 세계가 완전히 그리스 세계를 뛰어넘었다. 그래서 다음에는 라틴 세계에 눈을 돌리고자 한다.

 

3. 암흑시대

 

 카시오도루스가 쓴 교양과목에 관한 진부한 요약집에서 보듯이 수학은 초보적인 단계에서조차 그 정도가 훨씬 더 떨어진 가능성이 있었다. 카시오도루스의 저작은 이시도로스의 어원학과 같은 더욱 수준 낮은 저작의 원인이 되었다. 동 시대 사람들이 이시도로스를 당대 제일의 지식인으로 보았던 사실을 생각하면 "학문은 우리 안에서 죽었다"는 당시의 한탄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분명히 이 시대는 과학의 '암흑시대'였으나 중세가 일반적으로 그러했다고 생각하면 잘못이다. 이런 점에서 분명히 이 시대는 과학의 '암흑시대'였으나 중세가 일반적으로 그러했다고 생각하면 잘못이다. 다음의 두 세기 동안 암흑 상태가 계속되었는데 영국에서 교회력에 필요한 수학자가 손가락을 이용한 수 표시에 대해 책을 쓰던 베드(Bede) 말고는 유럽에서 이렇다할 학문적 업적이 없었다.

 

4. 알쿠인과 제르베르

 

 요크의 알쿠인은 베드가 죽은 해(735 무렵)에 태어났다. 그는 프랑스 교육을 부흥시키려는 사를마뉴 대제에게 초대되었고 그 개혁이 충분히 이루어졌으므로 일부 역사학자들은 이를 '카롤링거 왕조의 르네상스'라고 한다. 알쿠인은 6이 완전수에서 천지창조에 6일이 걸렸다고 하나 초보자를 위한 산술, 기하학, 천문학에 관한 일부 저작을 빼면 다음 두 세기 동안 프랑스와 영국에는 수학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독일에서는 마우루스가 베드의 수학과 천문학의 연구(특히 부활절 날짜 계산)를 이어받았다. 그러나 다음 150년 동안 서유럽에서는 수학에 주목할 만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고, 변화는 교황 실베스터 2세의 등장으로 일어났다.

 제르베르는 프랑스에서 태어나 스페인과 이탈리아에서 교육받았고, 독일에서 신성로마제국 황제 오토 3세의 가정교사로서, 뒤에서는 조언자로서 일했다. 제르메르는 처음 라임스에서 뒤에는 라벤나에서 대주교를 맡다가 999년 교황 실베스터 1세가 되었다. 그는 살술과 기하학에 관한 책을 썼고, 보에티우스의 전통에 바탕을 둔 것으로 보인다. 보에티우스의 전통은 교회에 속한 학교 교육을 지배해왔으나 개선된 것은 없었다.

 그러나 제르베르의 해설적 저작보다 의미가 있는 것은 그가 유럽에서 인도-아라비아숫자의 사용법을 가르쳤던 최초의 인물인 것 같다는 점이다. 제르베르가 이것들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인도-아라비아 숫자가 유럽으로 들어오게 된 경위는 약 500년 정도 옛날에 이 기수법이 발명되었을 때의 상황과 거의 마찬가지로 분명하지 않다. 더구나 제르베르 이후 두 세기 동안 유럽에서 이 새로운 기수법을 계속 쓰고 있었는지 어떤지도 분명하지 않다.

 13세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인도-아라비아 기수법은 유럽에 확실히 도입되었고, 이는 많은 사람들의 노력의 결과이다.

 

5. 번역의 세기

 

 제르베르 시대와 그 이전 유럽에서는 아직 수학을 발전시킬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과학적 연구는 예수의 복음이 받아들여진 이래 필요없게 되었다고 테르툴리아누스가 기록했다. 제르베르의 시대는 이슬람 학문의 절정기였으나 동시대 라틴 학자들은 아라비아 학문을 배웠다 해도 그것을 거의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12세기 초 까지 상황은 아라비아의 9세기를 떠올리게 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이슬람교도는 9세기에 그리스 문화에 대한 언어의 장벽을 극복했다. 12세기 초 유럽에서는 아라비아어에 관한 충분한 지식이 없으면 어느 누구도 진정한 수학자나 천문학자가 될 수 없었고, 무어인, 유태인, 그리스인이 아닌 수학자를 자랑스럽게 여길 수 없었다. 12세기 끝 무렵에 당시 세계에서 일류이고 독창적인 수학자가 기독교 국가 이탈리아에서 나왔다. 그 시대는 분명히 오랜 관점에서 새로운 관점으로 바뀌는 시기였다. 

 문예부흥(르네상스)은 당연히 밀물같은 번역에서 시작된 것이다. 아라비아어에서 스페인어, 헤브라이어로,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또는 아라비아어에서 헤브라이를 거쳐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유클리드의 원론은 아라비아어에서 라틴어로 번역된 가장 오래된 수학 고전이었고, 그 번역은 바스의 아델라드가 했다. 이 영국인이 어떻게 이슬람 학문을 배우게 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당시 이슬람 세계와 기독교 세계를 연결하는 주요한 매개체가 세 군데 있었고, 스페인, 시칠리아, 동로마 제국 이 세 군데 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곳은 스페인이다. 그러나 아델라드는 스페인에서 지식을 습득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십자군이 학문 전파에 기여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교류를 차단하는데 주력했다. 라틴 유럽에서 학문의 부흥은 십자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군 시대에 일어났다. 

 아델라드의 원론 번역은 다음 한 세기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으나 고립되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아델라드는 1126년에 알콰리즈미의 천문표를 아라비아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했고, 그 뒤 1155년에 톨레미의 알마게스트를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했다. 스페인의 톨레도는 번역학교가 개설되었고, 과거 서고트의 수도였고, 무어인의 지배를 거쳐 기독교의 지배를 받았다. 톨레도의 도서관에는 이슬람 서적의 사본이 많았고, 톨레도의 기독교도, 이슬람교도, 유태교도를 포함한 대다수의 서민들은 아라비아어를 쓰고 있었기 때문에 각 언어 사이에 정보의 흐름이 쉽게 이루어졌고, 이상적인 학문의 중계소였다. 다음은 스페인에서 활동한 번역가들의 업적이다.

 

-크레모나의 제라르는 톨레미를 이해하기 위해 아라비아어를 배울 목적으로 스페인에 갔으나 아라비아어를 번역하는 일에 여생을 바쳤다. 제라르는 사비트 이븐 쿠라가 아라비아어로 번역한 원론을 다시 라틴어로 번역했는데 아델라드의 번역보다 훌륭했다. 그는 1175년에 알마게스트를 번역했고, 이 번역본을 통해 톨레미가 서유럽에 알려졌다. 85권 이상을 번역했고, 이 중에는 알콰리즈미의 대수학의 라틴어 번역이 있었으며 톨레미의 번역판만 연대를 알 수 있다.

 

-체스터의 로버트는 1145년에 알콰리즈미의 논문을 처음으로 번역한 대수학을 출간했고, 이상의 인기를 얻었다. 1150년에 영국으로 돌아갔으나 스페인에서 진행되던 번역사업은 제라르와 다른 사람들에 의해 지속되었다. 알콰리즈미의 저작은 당시 매우 인기를 끌고 있어서 여러 사람들에 의해 번역되었다. 서유럽은 일찍이 기하학에 관심을 집중했을 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라비아 수학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이런 점은 로마 공화국, 로마 제국시대에 그리스 기하학이 이룬 수준과 견주어 아라비아 산술이 대수학과 좀 더 초보적인 수준에 있던 것이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 삼각법은 유용하고 초등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인들은 무관심했다. 이에 반해 12세기 라틴 학자들은 천문학 저작에 나타난 아라비아의 삼각법에 열중했다. 우리가 사용하는 'sine(사인)'이라는 말은 체스터의 로버트가 아라비아어로 번역한 말에 따른 것이다.

 

 알콰리즈미의 이름에서 알고리즘이라는 말이 생긴 것은 12세기 번역 시대와 다음 시대였다. 또 바스의 아델라드와 세비야의 존이 인도 숫자를 라틴에 전했고, 그 때에 점성술, 철학, 수학에 관한 저술가 아브라함 이븐 에조라가 인도 기수법과 비슷한 방법을 유태인에게 소개했다.

 이븐 에즈라는 정수를 나타내기 위한 10진 위치 기수법에 헤브라이어 알파벳의 처음 9문자와 0을 나타내는 동그라미를 사용했다. 이렇게 인도-아라비아 숫자에 관한 기술이 많이 있는데도 로마식 기수법의 변화는 천천히 이루어졌는데 주판을 이용한 계산법이 정착되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 경우에는 종이와 펜만으로 계산하는데에 따른 새로운 기수법의 장점이 확실히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몇 세기 동안 산판파(주판을 사용하는 파)와 필산파(종이와 펜만으로 계산하는 파)간 싸움이 있었고 최종적으로 필산파가 16세기에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다.

 

참고자료:    
수학의 역사-상, (칼 B 보이어, 유타 C 메르츠바흐 지음), 양영오, 조윤동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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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kywalker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