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사/수학사(상)2022. 9. 24.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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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사 35-중세 유럽(3)

 

 

15. 토마스 브래드와딘

 

 중세 후기 물리학자는 대학 교수와 성직자의 큰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고, 여기서는 탁월한 수학자이기도 한 두 사람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첫째는 철학자, 신학자, 수학자이며 캔터베리의 대주교 자리에 오른 토마스 브래드와딘, 둘째는 파리의 학자이고 리슈의 주교인 니콜 오렘이다. 이 두 살마은 비례의 개념을 확장했다.

 유클리드의 원론에는 이론적으로 엄밀한 비례론, 곧 비의 상등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고대와 중세의 학자들은 그것을 과학의 여러 문제에 응용했다(예: 주어진 시간동안 등속운동하는 물체가 통과하는 거리는 속도에 비례하고, 주어진 거리에 대해서 보낸 소요시간은 속도에 반비례한다).

 한편 아리스토텔레스는 저항매체에 대항하여 움직이는 힘이 있을 때 그 상황에서 운동하는 물체의 속도는 그 힘에 비례하고 저항에 반비례한다고 생각했으나 옳은 것이 아니었다. 

 힘 \(F\)가 저항 \(R\)보다 큰 경우 속도 \(v\)는 법칙 \(\displaystyle v=\frac{kF}{R}\)에 따라 주어질 것이다(\(k\)는 0이 아닌 비례상수). 그러나 저항이 힘과 균형을 이루거나 넘을 때는 속도를 얻을 수 없다. 이렇나 불합리를 피하기 위해 브래드와딘은 일반화된 비례이론을 이용했다. 그는 1328년에 쓴 '속도 비례론'에서 보에티우스의 2배와 3배이론을 일반화한 \(n\)배의 비례론을 발전시켰다. 오늘날 표기법으로는 이 경우에 양, 곧 힘과 저항은 제곱, 세제곱, \(n\)제곱이라는 식의 거듭제곱으로 변화한다는 것이다. 같은 방법으로 그 비례론에 \(\displaystyle\frac{1}{2},\,\frac{1}{3},\,\cdots,\,\frac{1}{n}\)의 비를 도입했고, 이 양들은 제곱근, 세제곱근, \(n\)제곱근이라는 식으로 변한다. 이렇게 해서 브래드와딘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론에 대한 대안을 제안할 준비가 되었다. 그는 비례식 \(\displaystyle\frac{F}{R}\)로 주어진 속도를 \(n\)배 하려면 비 \(\displaystyle\frac{F}{R}\)를 \(n\)제곱해야 한다. 오늘날 표기법으로는 \(\displaystyle v=k\log\frac{F}{R}\)과 같은데 \(\displaystyle\log\left(\frac{F}{R}\right)^{n}=n\log\frac{F}{R}\)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브래드와딘 자신은 이 법칙을 실험으로 확인하지 않았고, 이 법칙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브래드와딘은 그 밖에도 여러 권의 수학책을 썼고, 당시 시대 정신을 잘 나타냈다. 산술, 기하학에는 보에티우스, 아리스토텔레스, 유클리드, 캄파누스의 영향을 받았음이 보인다.

 브래드와딘의 모든 저서에 보이는 철학적 경향은 사변적 기하학과 연속체론에서 명확하게 보인다. 

 이 저작에서 브래드와딘은 연속량이 무한개의 불가분량을 가져도 그런 수학적 원자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고 그것과 똑같은 종류의 수많은 연속체로 구성된다고 했다. 이것은 뒤에 19세기의 칸토어의 무한 개념에 영향을 끼쳤다.

 

16. 니콜 오렘

 

 니콜 오렘은 브래드와딘보다 뒤에 태어났는데 그의 저작에는 브래드와딘의 개념을 확장한 것이 보인다. 1360년 무렵에 쓴 '비례의 비례에 관해서'에서 오렘은 브래드와딘의 비례론을 일반화하여 임의의 분수 지수를 포함하는 비례의 결합법칙을 보여준다(\(x^{m}\cdot x^{n}=x^{m+n},\,(x^{m})^{n}=x^{mn}\)).

 또 비례산법이라는 다른 저작에서 그는 이들 법칙을 기하학과 물리학 문제에 응용하고 있다. 또 오렘은 분수지수를 나타내기 위해 특별한 표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보기를 들면 \(\displaystyle1\frac{1}{2}\)의 비, 곧 제곱근의 세제곱근을 나타내기 위해

 와 같은 표현을 사용하고, \(\displaystyle\sqrt[4]{2\frac{1}{2}}\)에 대해서는 \(\displaystyle\frac{1\cdot p\cdot1}{4\cdot2\cdot2}\)와 같이 나타내고 있다. 표기법보다 더 독창적인 것은 무리수의 비의 가능성을 시사한 것이다(예: \(x^{\sqrt{2}}\)). 이것은 고등 초월함수에 대해 처음으로 시사한 바였으나 적절한 용어와 표현법이 없어서 오렘은 무리수의 거듭제곱의 개념을 효과적으로 발전시킬 수 없었다.

 

17. 형상의 위도

 

 오렘 시대 이전의 약 한 세기 동안 스콜라 철학자들은 변화하는 '형상'의 정량화에 대해 논했다. 이러한 변화하는 형상에는 운동하고 있ㄴ느 물체의 속도 그리고 온도가 일정하지 않은 물체에 상세히 나타나는 온도 변화 같은 것이 포함된다. 그런데 이런 논의는 장황했는데 그 까닭은 당시의 해석수단이 적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렘은 측정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연속량으로 생각할 수 있다고 쓰고 있다. 그래서 그는 등가속도로 운동하는 물체를 나타내기 위해 속도-시간 그래프를 그렸다. 수평선을 따라 시간의 각 순간을 나타내는 눈금(날줄)을 표시하고 각 순간에 대해 날줄(경선)에 수직인 선분을 그었다. 그 선분의 길이는 속도를 나타낸다. 오렘은 이런 선분의 끝점이 직선 위에 놓인다는 것을 관찰했다.

 그리고 등가속도 운동이 정지상태에서 시작한다면 속도를 나타내는 선(세로좌표) 전체는 직각삼각형이 될 것이다. 그 넓이가 지나간 거리를 나타내는 것에서 오렘은 머튼의 법칙을 기하학적으로 증명했다. 게다가 이 그림은 일반적으로 17세기의 갈릴레오의 업적으로 간주되는 운동의 법칙을 이끌어내고 있다. 이 기하학 도형에서 소요시간을 3등분, 4등분하면 통과거리의 비는 1:3:5, 1:3:5:7이 된다. 

 1부터 \(n\)개의 홀수의 합은 \(n\)의 제곱\(\displaystyle\left(\sum_{k=1}^{n}{(2k-1)}=n^{2}\right)\)이므로 통과한 전체 거리는 시간의 제곱에 비례하여 변한다. 이것은 낙하물체에 대한 갈릴레오의 유명한 법칙이다.

 오렘이 사용한 씨줄과 낱줄은 오늘날 세로좌표와 가로좌표에 해당하는 것이고, 그래프 표시법은 오늘날 해석기하학에 가까운 것이었다.

 이것으로 보아 오렘은 미적분학에 관심이 있었다고 보인다. 이것들은 (1) 함수의 변화방식(곡선의 미분)과 (2) 곡선 아래의 넓이가 변화하는 방식(그 함수의 적분)이다. 그리고 그는 등가속도 운동의 속도 그래프는 기울기가 일정함을 지적했다. 게다가 오렘은 거리함수, 곧 넓이를 구할 때 간단한 적분을 분명히 기하학적으로 해석했고, 그 결과 머튼의 법칙을 이끌었다.

 당시 형상의 위도로 알려진 이 함수의 그래프는 오렘의 시대에서 갈릴레오 시대까지 인기있는 화제가 되었다. 오렘은 자신의 저서 '동력과 측정의 도형화(그래프화)에 대하여'를 썼고, 자신 또는 제자가 '형상의 위도에 대하여'를 저술했으나 오렘의 저서(위)의 간단한 요약에 지나지 않았고, 그 안에서 오렘은 형상의 위도가 3차원으로 확장됨을 시사하는 데에 도달했다. 여기에는 독립변수가 두 개인 함수가 부피로 표시되고, 그 부피는 기준 평면의 일부분의 점에 주어진 규칙에 따라 세운 세로좌표의 전체로 되는 것이었다. 여기에 필요한 것은 그림으로 나타내는 것보다는 대수적 기하학이었다. 그러나 기법상의 약점이 중세 전체를 걸쳐 이 연구를 방해했다.

 

18. 무한급수

 

 14세기 서구의 수학자들은 독창적이고 정교한 사고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대수학과 기하학적 재능은 부족했다. 따라서 그들의 공헌은 고전의 확장이 아니라 새로운 관점의 창조에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무한급수에 관한 연구였다. 그리스인은 무한에 대해 혐오했으나 중세 후기의 스콜라 철학자는 잠재적인 무한과 실제적인(완성된) 무한에 대해 자주 언급했다.

 14세기 영국의 논리학자이며 계산가인 리처드 스위세스는 다음의 무한급수를 증명하는데 길고 지루한 방식을 썼다.$$\frac{1}{2}+\frac{2}{4}+\frac{3}{8}+\cdots+\frac{n}{2^{n}}+\cdots=2$$ 왜냐하면 그래프로 나타내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이다. 반면 오렘은 그래프를 이용하여 정리를 더욱 간단하게 했다. 또한 다음의 무한급수의 합이 \(\displaystyle\frac{4}{3}\)임을 보였다.$$\frac{1\cdot3}{4}+\frac{2\cdot3}{16}+\frac{3\cdot3}{64}+\cdots+\frac{n\cdot3}{4^{n}}+\cdots=\frac{4}{3}$$ 오렘은 조화급수가 발산함을 보였다. 그는 아래의 조화급수에서 연속하는 항을 몇 개의 군으로 나누었다(군수열). 첫째 항을 1군, 다음 두 항을 2군, 다음 네 항을 3군으로 나누는 것이다.$$\frac{1}{2}+\left(\frac{1}{3}+\frac{1}{4}\right)+\left(\frac{1}{5}+\frac{1}{6}+\frac{1}{7}+\frac{1}{8}\right)+\cdots+\frac{1}{n}+\cdots$$따라서 \(m\)군은 \(2^{m-1}\)개의 항들을 포함하고 각 군에 속하는 항들의 합은 적어도 \(\frac{1}{2}\)(이상)이다. 이 방법으로 조화급수가 발산함을 보일 수 있다. 

 

19. 중세 학문의 쇠퇴

 

 7세기 침체의 밑바닥에서 13~14세기의 피보나치, 오렘의 업적에 이르기까지의 진보는 주목할 만하나 모든 중세문명의 노력을 합쳐도 고대 그리스의 수학적 업적에는 결코 미치지 못했다. 수학의 진보가 세계의 어떤 곳(바빌로니아, 그리스, 중국, 인도, 아라비아, 로마)에서나 꾸준히 계속되어 온 것이 아니다. 따라서 서유럽에서 브래드와딘과 오렘의 업적 뒤에 쇠퇴가 시작되었다는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1349년 브래드와딘은 흑사병으로 쓰러졌고, 흑사병으로 전체 유럽인구 중 \(\displaystyle\frac{1}{3}\sim\frac{1}{2}\)이 줄었다. 그리고 이런 참사는 심각한 혼란과 도덕의 상실을 가져왔다. 14세기에 수학에서 선두에 있던 영국과 프랑스는 15세기에 백년전쟁과 장미전쟁으로 황폐해졌고, 옥스포드대학과 파리대학의 스콜라 철학 대신 이탈리아, 독일, 폴란드의 대학이 수학의 선두에 서게 되었다.

 

참고자료:     
수학의 역사-상, (칼 B 보이어, 유타 C 메르츠바흐 지음), 양영오, 조윤동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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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kywalker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