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사/수학사(상)2022. 9. 25.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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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사 37-르네상스(2)

 

 

7. 파촐리의 대전

 

 르네상스 최초의 대수, 곧 슈케의 대수는 한 프랑스인의 교안에 의한 것이고 르네상스 시대에 가장 잘 알려진 대수는 10년 뒤 이탈리아에서 출판되었다.

 실제 수도사 파촐리의 저작 '산술, 기하, 비, 그리고 비례대전'은 세 부분을 보잘것 없는 것으로 평가해 1202년 산반서 ~ 1494년의 대전까지 슈케나 다른 사람들의 저작은 모두 생략하는 것이 통례였으나 '대전'에 이르는 길은 이미 일련의 대수학자들이 준비했다. 이는 알콰리즈미의 대수학이 1464년까지 이탈리아어로 번역되었기 때문이다.

 과학의 르네상스는 고대 그리스 고전까지 되돌아감으로써 불이 붙었으나, 수학의 르네상스는 특히 대수의 부흥이 특징인데, 이런 의미에서 보면 중세의 전통계승에 지나지 않는다.

 1487년에 완성된 파촐리의 '대전'은 그 독창성 이상으로 큰 영향력이 있었다. 이 책을 산술, 대수, 극히 초보적인 유클리드 기하학과 복식부기 네 분야에 걸친 자료를 모은 책이다(대체로 정보를 분명히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세 부분처럼 대전은 저자가 이전부터 모아 둔 출판되지 않는 저서나 당시 일반적인 지식을 집대성한 것이었다. 산술 부분에서는 곱셈, 제곱근을 구하는 방법을 주로 다루고, 대수의 부분에서는 일차, 이차방정식의 표준해를 싣고, 삼차방정식은 오마르 카얌의 영향을 받아 파촐리도 대수적으로 풀 수 없다고 믿고 있었다. 기하학은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으나 상업에 관한 부분은 세간의 호평을 받았고, 파촐리는 복식부기의 아버지라 불리게 되었다.

 

8. 레오나르도 다 빈치

 

 파촐리의 기하학에 관한 저서 '신성한 비례에 대하여'에서는 정다각형, 정다면체, 황금분할이라고 불리는 비를 다루었다. 특히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그림의 우수함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그런데 다 빈치는 수학자로 생각되나 산술, 대수, 기하학에서 중요한 공헌을 하지 못했다. 그의 활동적인 정신은 그 분야에 오래 머물지 못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공책에는 활꼴의 구적법, 정다각형의 작도, 무게중심이나 이중곡률 곡선에 대한 고찰 같은 것들이 보이는데 그를 유명하게 한 것은 수학을 과학이나 투시화법에 응용한 것이었다. 다 빈치는 독창적 사고를 하는 천재였고 예술가였으나 수학의 주류, 대수학의 발전에 깊이 관여하지 못했다. 

 

9. 독일의 대수학

 

 르네상스라는 말은 이탈리아의 문학, 예술, 과학의 유산이 생각나는데 예술과 학문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일찍이 유럽의 다른 지역보다 이탈리아에서 먼저 일어났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탈리아는 알고리즘(계산법)과 알자브르(대수학)를 포함한 아라비아 학문이 유럽에 전해지는 두 개의 주요 경로 중 하나였다.

 파촐리의 '대전'이 출판되기에 앞서 라이프치히에서 강사로 있던 요한 비트만은 '상업용 산술서'를 출간했는데 이 책에는 \(+,-\)의 기호가 있다. 이 두 기호는 처음에는 창고에 있는 물건의 남고 모자람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한 것이었고, 지금은 익숙한 연산기호가 되었다.

 수 많은 독일어 대수학 책 중에는 1524년 독일의 아담 리레가 쓴 '미지수'가 있었다. 리레는 오랜 계산법에서 새로운 방법으로 옮겨가는데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독일의 저술가이다. '미지수'는 알콰리즈미의 대수학에 대해 언급하고, 독일의 여러 선인들의 저작을 참조하고 있다. 

 16세기 전반은 독일 대수학이 작은 파란을 일으킨 시기였다. 이때 저서 중 중요한 것은 루돌프의 '미지수'와 아피만의 '계산', 슈티펠의 '산술전서'이다.

 미지수(루돌프 저서)에는 지금의 근호 \(\sqrt{}\)뿐만 아니라 10진 소수를 사용한다는 사실에서 중요하다.

 계산에는 상업용 산술과 파스칼의 삼각형이 인쇄되었고, 파스칼이 태어나기 100년 전에 일어났다. 

 산술전서는 16세기에 출간된 모든 독일 대수학 책 중 가장 중요한 책이다. 여기에도 파스칼의 삼각형이 나오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음수, 거듭제곱근, 거듭제곱을 다루는 방법이다. 슈티펠은 다양한 경우의 이차방정식에 음의 계수를 사용했는데 언제 \(+,-\)를 사용하는가를 어떤 특별한 규칙에 따라 설명해야 했으나 그도 음수를 방정식의 근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음수를 불합리한 수라고 했으나 성질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었고, 무리수에 대해서는 "일종의 무한의 구름 속에 감춰져 있다"며 다루기를 망설였다. 게다가 등차수열-등비수열 사이의 관계에 주목해 거듭제곱표를 \(\displaystyle 2^{-1}=\frac{1}{2},\,2^{-2}=\frac{1}{4},\) \(\displaystyle2^{-3}=\frac{1}{8}\)까지 확장했다(단, 지수기호는 사용하지 않았다).  

 

10. 카르다노의 '위대한 술법'

 

 1545년 이전까지 삼차방정식의 대수적 풀이법은 존재하지 않았으나 그 이후에 카르다노의 '위대한 술법'이 출판된 이후로 사차방정식도 등장하게 되었다. 때문에 1545년은 현대수학이 시작된 해로 간주되나 분명한 것은 카르나도가 삼차/사차방정식의 대수적 풀이법을 발견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고, 이 점은 스스로 '위대한 술법'에서 인정했다. 삼차방정식의 풀이법을 타르탈리아에게서 얻었고, 사차방정식의 풀이법은 카르다노의 제자 페라리가 최초로 발견했다.

 카르다노는 사생아로 태어났고 점성술사이자 도박사, 이단자였으나 볼로냐와 밀라노 대학의 교수였고, 마지막에는 교황, 법왕으로부터 연금을 받았다. 또한 그는 많은 책을 썼고, 그가 다른 화제도 자신의 일생과 취미에서 과하고가 수학까지 여러 분야에 이른다. 

 카르다노의 주된 과학적 대작인 '정확성에 대하여'는 그가 시대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책에서는 스콜라 철학을 통해 전해진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동시에 당시의 새로운 발견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의 수학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카르다노의 수학도 역시 그 시대의 전형이었기 때문이다. 아르키메데스, 아폴로니우스의 업적에 대해서는 몰랐으나 대수학과 삼각법에 정통해 있었다. 카르다노는 이미 1539년에 '실용산술'을 출판했는데 이 책에서는 세제곱근을 포함한 분모의 유리화를 다루었다. 6년 뒤인 1645년에 '위대한 술법'이 출간되었을 때 유럽에서 가장 위대한 수학자가 되었으나 오늘날 '위대한 술법'은 진부한 책이 되었다. 여기서는 여러 형태의 삼차방정식을 차수가 다른 항이 등호의 같은 쪽에 있는 경우 또는 다른 쪽에 있는 경우에 따라(각 항의 계수는 양수이어야만 했기 때문) 상세하게 설명한다. 카르다노는 수에 대한 방정식을 다루었지만 생각은 기하학적인 알콰리즈미의 방법을 따랐다. 따라서 카르다노의 방법은 '정육면체의 완성'을 위한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

 

11. 삼차방정식의 풀이법

 

 카르다노는 알콰리즈미를 신봉해서 약호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고, 아라비아인 처럼 특정한 수 계수를 갖는 방정식을 일반적인 경우로 생각했다. 보기를 들면 \(x^{3}+6x=20\), \(x^{3}+px=q\)형태의 식을 모두 대표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x=u-v\)로 치환하여 \(w=2\)(\(x\)계수의 \(\displaystyle\frac{1}{3}\))가 되도록 \(u,\,v\)를 정한다. 그러면 \(u^{3}-v^{3}=20\)이고, 치환법으로 \(v\)를 소거하면 \(u^{6}=20u^{3}+8\)이고, 이것은 \(u^{3}\)에 대한 이차방정식이다. 따라서 \(u^{3}=\sqrt{108}+10\)임을 알 수 있고, \(v^{3}=\sqrt{108}-10\)이 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x=u-v\)에서 다음을 얻는다.$$x=\sqrt[3]{\sqrt{108}+10}-\sqrt[3]{\sqrt{108}-10}$$ 일반화하면 \(x^{3}+px=q\)의 해는 다음과 같다.$$x=\sqrt[3]{\sqrt{\left(\frac{p}{3}\right)^{3}+\left(\frac{q}{2}\right)^{2}}+\frac{q}{2}}-\sqrt[3]{\sqrt{\left(\frac{p}{3}\right)^{3}+\left(\frac{q}{2}\right)^{2}}-\frac{q}{2}}$$ 카르다노는 다른 경우(예: 변과 수가 같은 정육면체)도 다루었다. 그때는 \(x=u+v\)를 적용했고, 본질적으로 위의 경우와 같으나 이 경우에는 어려움이 있다. \(x^{3}=15x+4\)에 적용하면 \(x=\sqrt[3]{2+\sqrt{-121}}+\sqrt[3]{2-\sqrt{-121}}\)이 된다는 것이다. 카르다노는 음수의 제곱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x=4\)가 해가 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으며, 그의 규칙이 이 상황에서 어떻게 의미를 가져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카르다노는 음수의 제곱근을 "궤변론적이다"라고 하고 이 경우의 결과를 "쓸모없을 뿐 아니라 이해하기도 어렵다"고 결론지었다.    

 

12. 페라리의 사차방정식의 풀이법

 

 위대한 술법에서 카르다노는 사차방정식의 풀이법에 대하여 "페라리의 풀이법이고 내가 요청해서 고안해 낸것"이라고 했다. 풀이방법은 "정사각형 곱하기 정사각형과 정사각형 그리고 수를 변과 같게 한다"이다(3차항 계수의 \(\displaystyle\frac{1}{4}\)만큼 근에 더하든지 빼든지 해서 3차항을 소거했다).

 카르다노는 \(x^{4}+6x^{2}+36=60x\)를 다음의 순서에 따라 풀었다.

 

1. 먼저 양 변에 이차항과 수를 적당히 더해 좌변이 완전제곱식이 되게 한다. 이 경우 다음과 같다.$$x^{4}+12x^{2}+36=(x^{2}+6)^{2}$$2. 다음의 등식의 양 변에 새로운 미지수 \(y\)를 포함한 항을 더해 좌변이 \((x^{2}+6+y)^{2}\)와 같은 완전제곱식이 되게 한다. 따라서 \(x^{4}+6x^{2}+36=60x\)는 다음과 같이 된다.$$\begin{align*}(x^{2}+6+y)^{2}&=6x^{2}+60x+y^{2}+12y+2yx^{2}\\&=(2y+6)x^{2}+60x+(y^{2}+12y)\end{align*}$$3. 더 중요한 단계는 우변의 삼항식이 완전제곱이 되도록 \(y\)를 고른다. 그러기 위해서는 판별식을 0으로 하면 된다. 판별식을 구하면 다음과 같다.$$60^{2}-4(2y+6)(y^{2}+12y)=0$$4. 3단계 결과는 \(y\)에 대한 삼차방정식 \(y^{3}+15y^{2}+36y=450\)이 되고, 이것을 사차방정식의 분해방정식이라고 한다. 앞의 삼차방정식의 풀이법을 적용하면 다음과 같다.$$y=\sqrt[3]{287\frac{1}{2}+\sqrt{80449\frac{1}{4}}}+\sqrt[3]{287\frac{1}{2}-\sqrt{80449\frac{1}{4}}}-5$$5. 4단계에서 얻은 \(y\)값을 2단계의 \(x\)에 대한 방정식에 대입하여 양변의 제곱근을 얻는다. 

6. 5단계 결과는 이차방정식이므로 이것을 풀어 \(x\)값을 구한다.

 

13. 기약 삼차방정식과 복소수

 

 이전까지 알려진 삼차/사차방정식의 풀이법은 실용적인 사항을 고찰한 결과로 얻어진 것이 아니었고 기술자와 실무수학자에게 특별히 가치있는 것도 아니었다. 

 위대한 술법이 가져온 중요한 성과는 거기에 실린 발견이 대수학의 여러 연구 분야에 엄청난 자극을 주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방정식의 연구가 임의 차수의 다항방정식을 포함하도록 일반화되어야 한다는 것과 오차방정식의 해를 구하는 것은 당연했다. 따라서 여기서 다음 두 세기의 수학자들은 고대의 고전 기하학 문제(3대 문제)에 맞먹는 해결불가능한 대수학 문제에 맞닥뜨렸고, 그 때문에 새로운 종류의 수학이 생겨났으나 오차방정식에 대해서는 모두 부정적인 결론으로 끝났다.

 삼차방정식의 풀이법은 새로 나타난 수에 관심을 갖게 했다. 무리수에 관한 기초가 이루어지지는 않았으나 무리수는 유리수로 근사시킬수 있어서 카르다노의 시대까지는 무리수가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삼차방정식의 근에서 음수의 제곱근이 나타나는 경우도 있어 허수에 대한 이해가 필요했다.

 마침 그 무렵 이타릴아의 대수학자 봄벨리가 방정식의 근의 거듭제곱근도 서로 관련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방정식 \(x^{3}=15x+4\)의 근은 \(x=\sqrt[3]{2+\sqrt{-121}}+\sqrt[3]{2-\sqrt{-121}}\), \(x=4\)이고 봄베리는 실수 \(4\)가 켤레복소수로 되어있다고 생각했고, 이러한 켤레복소수의 합이 4이면 각각의 실수부분은 2이다. 그리고 \(2+b\sqrt{-1}\)형태의 수가 \(2+11\sqrt{-1}\)의 세제곱근이면 \(b=1\)이어야 하고 따라서 \(x=2+1\sqrt{-1}+2-1\sqrt{-1}=4\), \(x=4\)이다. 

 봄벨리는 켤레복소수의 역할을 보여주었으나 그와 같은 관찰은 삼차방정식을 푸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봄벨리의 사용을 사용하려면 하나의 근(특히 실근)을 미리 알아야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카르다노의 공식으로 얻은 허수의 세제곱근을 대수적으로 풀어 찾아내려고 시도해도 허수의 세제곱근이 나타나는 삼차방정식을 푼 결과는 처음과 같은 삼차방정식이 된다. 곧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세 근이 모두 실수일 때는 항상 이러한 어려움이 나타나므로 이것을 '기약인 예'라고 한다. 봄벨리는 1560년 '대수학'을 저술했지만 1572년에 일부분만 출판되었다.

 

14. 로버트 레코드

 

 영국 수학은 브래드와딘이 죽은 뒤 약 두 세기 동안 정체되었고, 16세기 초에 나온 몇 안되는 저작도 파촐리 같은 이탈리아 저작에 상당히 의존한 것이다. 따라서 이런 점으로 보아 레코드는 16세기 전체를 통해 영국에서 대단히 뛰어난 유일한 수학자였다고 할 수 있다.

 레코드는 웨일즈 출신으로 옥스포드와 케임브리지에서 수학을 배우고 가르쳤다. 게다가 1545년에는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의학 학위를 받았고, 그 후에 에드워드 6세와 메리 1세의 진료를 맡는 의사가 되었다. 

 당시 상황에서 수학에 공헌한 의사들이 많았다. 슈케, 카르다노, 레코드 중 첫째가는 실력자는 레코드였다. 그는 영국 수학 학파의 실질적인 창시자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레코드는 일상어로 글을 썼고, 그 때문에 유럽 대륙에서 영향력이 제한되었다.

 레코드의 저서 중 '학예의 기초'는 산판이나 필산에 의한 계산술을 상업에서 응용하는 방법을 싣고 있는 대중적인 산술서였다고, 에드워드 6세에게도 바쳐졌다.

 다른 저서인 '지식의 성'은 천문학 책으로 코페르니코수의 천문 체계를 인정하여 인용한다. 또 하나의 저서 '지식을 얻는 작은 길'은 유클리드의 원론을 영어로 번역 및 요약한 첫 기하학 책이다. 그가 감옥에서 죽기 1년 전인 1557년에 쓴 '지혜의 숯돌'은 대수학 책이었고, 여기서 등호가 처음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그 등호가 다른 기호를 제치고 완전히 공식화되기까지 한 세기 이상이 필요했다.

 

참고자료:      
수학의 역사-상, (칼 B 보이어, 유타 C 메르츠바흐 지음), 양영오, 조윤동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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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kywalker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