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사 38-르네상스(3)
15. 니콜라스 코페르니쿠스
레코드는 1558년(메리 1세가 죽은 해)에 죽었다. 그 뒤에 엘리자베스 1세가 즉위했고, 레코드에 견줄 인물은 없었다. 엘리자베스 시대에 뛰어난 수학자는 프랑스에서 배출되었다. 이 프랑스 수학자에 대해 언급하기 전에 여기서 명확히 해 두어야 할 것은 16세기 초의 몇 가지 특징이다.
16세기에 가장 발전을 이룬 수학은 대수학이었고, 삼각법도 대단하지 않으나 꾸준히 진보했다. 삼각함수표의 작성은 지루한 일이나 천문학자, 수학자들에게는 유용했다. 이 분야에 있어 16세기 초의 폴란드와 독일은 매우 큰 공헌을 했다. 이 시기의 천문학자는 거의 필연적으로 삼각법학자이기도 했고 따라서 이 시기 인물인 코페르니쿠스는 천문학은 물론 수학에도 많은 이바지를 했다. 폴란드는 레기오몬타누스가 살아있는 동안 이미 학문의 황금시대를 맞이했고 1491년에 코페르니쿠스가 입학한 크라카우 대학은 수학, 천문학에서 명성이 높았다. 코페르니쿠스는 다시 볼로냐, 파두아, 페라리 각 대학에서 법학, 의학, 천문학을 배우고 로마에서 교사 생활을 하다가 1510년 폴란드로 귀국했고, 죽은 해인 1543년에는 '천구의 회전에 대하여'를 저술했다. 이 논문의 상당 부분은 삼각법에 대해 다루고 있고, 삼각법에 관한 내용은 이미 그 이전 해에 '삼각형의 변과 각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한 권의 책으로 출간되었다. 코페르니쿠스의 삼각법은 부분적으로 레기오몬타누스의 영향을 받았고, 자신의 학생인 프러시아 출신 레티쿠스의 영향도 있다.
'회전에 대하여' 초기 필사본에 있었으나 인쇄된 책에는 실리지 않았던 명제가 있다. 그 명제는 두 개의 원운동의 합성으로 생기는 직선운동에 대한 나시르의 정리에 관한 일반화로 보통 코페르니쿠스 정리라고 한다. 그 정리는 다음과 같다.
작은 원이 지름이 두 배인 큰 원의 안쪽을 미끄러지지 않게 돌 때 작은 원의 원 둘레 위에 있지 않은 점의 자취는 타원이 된다.
덧붙이면 카르다노는 나시르의 정리는 알고 있었으나 코페르니쿠스의 정리는 몰랐고, 이 정리는 17세기에 다시 발견되었다.
16. 게오르그 요아힘 레티쿠스
코페르니쿠스의 학생인 레티쿠스는 레기오몬타누스와 코페르니쿠스의 생각에 자신의 견해를 묶어 당시까지 쓰인 것 중 가장 상세한 두 권짜리 논문 '삼각법의 궁전'을 서술했다.
삼각법은 여기서 성숙했다. 레티쿠스는 이 책에서 원호에 대해 함숫값을 결정하는 전통적 방법을 버리고 대신 직각삼각형의 변의 길이에 초점을 맞췄다. 게다가 레티쿠스는 6개의 삼각함수(사인, 코사인, 탄젠트, 코탄젠트, 시컨트, 코시컨트)의 모든 값을 계산하여 상세한 삼각표를 만들어 삼각함수의 6가지 모두를 충분히 자유자재로 쓸 수 있게 했으나 당시 10진법 소수가 일반적으로 사용될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레티쿠스는 사인과 코사인에 대해서 빗변(반지름)을 10,000,000으로 하고, 다른 데 함수에 대해서는 밑변(이웃하는 변/반지름)을 10,000,000으로 잡고 각도는 \(10''\)마다 끊었다. 레티쿠스는 밑면을 \(10^{15}\)로 하여 탄젠트, 시컨트 표를 만들기 시작했으나 그 완성은 제자인 오토가 내용을 덧붙여 1596년에 완성했다.
17. 피에로 드 라라에
코페르니쿠스, 슈케, 카르다노, 레코드와 마찬가지로 의학을 공부한 레티쿠스의 저작은 교육학에 이바지한 라메의 칭찬을 받았다.
라메는 당시 아리스토텔레스 학파가 군림하던 시절에 1536년 나바르 대학에서 쓴 논문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은 모두 잘못되었다는 대담한 이론을 전개했다. 또한 그와 동시대의 인문주의자들이 수학을 사용하지 않은 점에 비해 맹목적이라 할 정도로 수학에 믿음이 있었고, 논리학과 수학에 더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해 대학의 교육과정 변경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는 기하학에 약하고 실제적인 초등수학에 자신이 있었다. 게다가 그가 살던 시대의 수학은 실제적인 산술 문제에 이미 지나칠 정도로 관심이 있었던 반면 기하학에서는 눈에 띄게 약했다.
18. 봄벨리의 대수학
파푸스는 320년 무렵에 기하학의 부활을 시도했으나 순수기하학 분야에서 그의 후계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당시 그리스에는 없었고, 중국, 인도에서도 구적문제 이상으로 기하학에 대한 관심은 없었다. 그러나 아라비아인은 논증적 추론의 중요성을 이해했기 때문에 대수학을 논할 때 기하학적 논증을 사용했다.
중세 유럽에서는 대수학과 기하학을 서로 연관짓는 경향이 있었고, 이러한 중세의 전통에 따라 봄벨리의 대수학 4권, 6권에는 많은 기하학 문제를 대수학적으로 풀었다. 풀이법은 레기오몬타누스의 풀이법과 비슷했으나 기호체계는 새로운 것이었다. 보기를 들면
봄벨리는 세 변에 각각 \(ac=13\), \(cf=14\), \(fa=15\)인 삼각형에 내접하고, 한 변은 \(cf\)위에 있는 정사각형의 한 변ㅇ르 구하는 문제를 다음과 같이 구하고 있다.
\(bg=14x\), \(ag=15x\), \(ab=13x\), \(ah=12x\), \(hi=14x\), \(ai=12\)이므로 \(\displaystyle x=\frac{6}{13}\), \(\displaystyle hi=14\times\frac{6}{13}=6\frac{6}{13}\)
여기서는 대수학이 기하학의 문제풀이법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 봄벨리는 이와 반대되는 보기도 다루었다. 그의 대수학에는 삼차방정식의 대수적 풀이법 뒤에 정육면체를 쪼개는 방법에 의한 기하학적 증명이 실려있었다. 그러나 봄벨리의 대수학 마지막인 4, 5권은 1572년에 출판되지 못하고 1929년까지 필사본인 채로 있었다.
19. 요하네스 베르너
16세기에 순수기하학에서 대표적인 인물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독일에서는 베르너와 뒬러, 이탈리아에서는 마우롤리코와 파촐리가 대단하지는 않으나 공적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베르너는 레기오몬타누스의 삼각법을 보존하는데 애썼고, 그 보다 기하학적으로 중요했던 것은 '원뿔곡선의 원리'라는 22권 짜리 라틴어 저작이었다. 이 책은 아폴로니우스의 원뿔곡선보다 훌륭하다고 할 수 없으나 어쨌든 파푸스 이후에 곡선에 대한 관심을 다시 불러일으킨 최초의 책이었다. 베르나는 정육면체의 배적문제에 관심이 있어서 포물선과 쌍곡선을 집중적으로 다루었고, 그런 표준 평면방정식을 그리스인처럼 원뿔에서 구적법으로 유도했다. 그러나 컴파스와 자를 사용하여 포물선 위의 점을 표시한다는 평면적 방법에는 독창적 요소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먼저 한 점에서 서로 접하고 그 점에 생긴 공통법선과 각 점 \(c,\,d,\,e,\,f,\,g,\,...\)에서 만나는 원을 그린다. 그리고 나서 그 공통법선을 따라 파라미터(매개변수)와 같은 거리 \(ab\)를 구분짓는다.
그리고 점 \(b\)에서 선분 \(bG\)를 \(ab\)에 수직되게 긋고 그것이 각 원과 만나는 점을 각각 \(C,\,D,\,E,\,F,\,G,\,...\)를 세우고 다음에 점 \(d\)에서 \(bD\)와 같은 길이의 수직인 선분 \(dD'\)와 \(dD''\)을 긋는다. 다음에는 \(e\)에서 \(bE\)와 같은 길이의 수직인 선분 \(eE'\)와 \(eE''\)를 세우고 나서 마찬가지의 과정을 계속한다. 이렇게 계속해 나아가면 위 그림의 점 \(C',\,C''\), \(D',\,D''\), \(E',\,E'',\,...\)는 모두 꼭짓점이 \(b\), 축이 \(ab\), 파라미터가 \(ab\)인 포물선 뒤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cC')^{2}=ab\cdot bc\), \((dD')^{2}=ab\cdot bd\)로 계속되는 관계식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20. 투시화법
베르너의 연구는 고대의 원뿔곡선에 대한 연구와 깊은 관련이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수학과 예술 사이에 새로운 관계가 생겨났다. 곧, 르네상스 예술이 중세의 예술과 다른 중요한 점은 3차원 공간의 물체를 평면에 나타내는데 투시화법을 사용한 점이었다. 투시화법에 대한 정식 기술은 알베르티의 논문 '회화에 대하여'에서 나타났다. 알베르티는 먼저 원근법의 원리에 관한 일반적 해설에서 시작해 수평인 기(본)평면 위의 정사각형의 집합을 수직인 입화면에 그리는 자신이 고안한 방법을 설명하고 있다.
기평면에서 길이 \(h\)만큼 위에 있고, 입화면에서 길이 \(k\)만큼 앞에 있는 정점 \(S\)를 본다. 이때 기평면과 입화면이 만나는 직선을 기선, \(S\)에서 입화면에 내린 수선의 발 \(V\)를 시심(또는 주소점) \(V\)를 지나서 기선에 평행한 직선을 소선(또는 수평선), 이 소선 위에 있고 \(V\)로부터 \(k\)만큼 떨어져 있는 점 \(P,\,Q\)를 거리점이라 한다. 기선 \(RT\)를 따라 같은 간격으로 구분짓는 점 \(A,\,B,\,C,\,D,\,E,\,F,\,G\)를 잡고, 그 점들과 \(V\)를 각각 직선으로 연결한다. 단, 이때 \(D\)는 \(S\)와 \(V\)를 지나는 수직 평면과 기선 \(RT\)의 교점으로 잡는다. 그러면 \(S\)를 중심으로 하여 그 직선군을 기평면에 투영하면 그것들은 같은 간격의 평행 선분의 집합이 될 것이다. 또 \(P\)(또는 \(Q\))를 \(B,\,C,\,D,\,E,\,F,\,G\)와 연결하여 \(AV\)와 점 \(H,\,I,\,J,\,K,\,L,\,M\)에서 만나는 직선군을 만들고, 이 점들로부터 \(AV\)위에 기선 \(RT\)에 평행하게 각 직선을 그으면 입화면 위의 사다리꼴의 집합은 기(본)평면 위의 정사각형의 집합에 대응할 것이다.
투시화법을 더 발전시킨 사람은 이탈리아의 프레스코 화가 프란체스카로 그 성과는 그의 '화면의 원근법'에 실려있다. 곧 알베르티가 기평면 위의 수평도형을 입화면 위로 옮기는 일에 열심이었던 반면, 프란체스카는 3차원의 물체를 정점에서 보았을 때의 형태를 화면 위에 그리는 더 복잡한 문제를 다루었다. 프란체스카는 또한 '올바른 형체'라는 책에서 정오각형의 대각선이 서로 다른 것을 나누는 신성한 비에 대해 서술하고 직교하는 서로 같은 두 원기둥이 만드는 입체의 부피를 구하고 있다. 예술과 수학의 이러한 강한 결합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저작에서도 볼 수 있다. 현재는 존재하지 않으나 다빈치는 투시화법에 대해 '회화론'이라는 저작을 쓰고, 글머리에 "수학자가 아닌 사람은 이 책을 읽지 마라"는 단서를 달았다. 더욱이 같은 수학적 관심과 예술적 관심의 결합에 관한 예는 다빈치와 동시대 사람인 베르너와 같은 뉘른베르크 출신의 뒤러에게서도 보인다. 뒤러읜 작품에는 파촐리의 영향이 보이고, 1514년 유명한 판화 '멜랑콜리아'에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이 작품에는 다음의 마방진이 있다.
르네상스의 수학은 부기, 역학, 측량, 예술, 지도제작, 광학에 널리 응용되었고, 그런 실용적인 기술에 대한 책도 많이 쓰여졌다.
순수기하학을 예술과 투시화법이 제시하던 방향으로 충분히 발전시킬 수 있었으나 그런 가능성도 대수적 기하학이 창안된 그 시대까지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참고자료:
수학의 역사-상, (칼 B 보이어, 유타 C 메르츠바흐 지음), 양영오, 조윤동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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