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사/수학사(상)2022. 9. 27.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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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사 40-근대수학의 서막(2)

 

 

9. 존 네이피어

 

 비에트처럼 네이피어 역시 수학만 하는 사람이 아닌 스코틀랜드의 대지주 머쉬스톤의 남작으로 자신의 영토를 관리하며 글을 썼다. 그는 수학의 일부분, 오로지 계산과 삼각법에 관련된 부분만 관심이 있었다. 보기를 들어 네이피어의 막대는 수를 기계적으로 곱하고, 나누고, 제곱을 구하는 데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표면에 곱셈표의 각 항목이 새겨진 막대기 들이고, 네이피어의 유동식과 네이피어의 원형 부분의 법칙은 구면삼각법과 관련해 기억을 돕는 장치다.

 네이피어가 로그를 완성시키는 데 20년이 걸렸다. 시작시기인 1954년 네이피어는 하나의 주어진 수를 거듭 곱해서 만들어진 수열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수열에서는 거듭제곱의 지수의 합과 차가 그런 거듭제곱합 끼리의 곱과 나눗셈에 분명히 대응했으나 그와 같은 수의 거듭제곱(2, 4, 8, 16, 32,...)으로 만들어진 수열에서는 이웃하는 항 사이의 간격이 커져서 보간이 부정확\(\displaystyle\left(2^{9}=512,\,2^{10}=1024,\,2^{9.5}\neq768=\frac{2^{9}+2^{6}}{2}\right)\)해서 계산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마침 네이피어는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6세의 진료를 맡은 크레이그 박사로부터 덴마크에서 합과 차의 법칙을 사용한다는 사실을 알았고, 제임스 6세가 덴마크로 갈 때 폭풍우로 티코 브라헤의 천문대에 가서 가까운 해안에 정박하게 되었고, 브라헤를 만났는데, 여기서 나온 합과 차의 법칙에 대한 이야기에 힘입어 1614년에 '놀라운 로그체계의 기술'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10. 로그의 발명

 

 네이피어의 로그에 대한 기본적 사고방법은 매우 간단했다. 먼저 주어진 수의 거듭제곱으로 된 등비수열의 이웃한 두 항을 서로 가까운 값으로 잡기 위해 처음 주어지는 수를 1에 가까운 수, \(1-10^{-7}(=0.9999999)\)로 택한다. 결과적으로 등비수열의 각 항들은 아주 가까운 수가 되었고, 모양을 좋게 하고 소수를 피하기 위해 각 항에 \(10^{7}\)을 곱했다. \(N=10^{7}(1-10^{-7})^{L}\)이라 하면 \(L\)은 수 \(N\)의 '네이피어 로그'이다.

 \(10^{7}\)의 네이피어 로그는 \(0\), \(10^{7}(1-10^{-7})=9999999\)의 네이피어 로그는 \(1\) 등등이고, 이때 \(N\)과 로그 \(L\)을 \(10^{7}\)로 나누면 사실상 밑이 \(\displaystyle\frac{1}{e}\)인 로그를 얻을 수 있는데 다음과 같기 때문이다.$$(1-10^{-7})^{10^{7}}\approx\lim_{n\,\rightarrow\,\infty}{\left(1-\frac{1}{n}\right)^{n}}=\frac{1}{e}$$ 단, 네이피어의 로그에는 밑이라는 개념이 없고, 그의 로그는 지금의 로그와 다르다. 네이피어의 로그의 원리는 기하학적이었다.

 위에 주어신 선분을 \(AB\), 반직선을 \(CDE\cdots\)라 하자. 동점 \(P\)는 \(A\)를 출발하여 \(PB\)의 길이에 비례하여 감소하는 속도로 \(AB\)위를 움직이고 그와 동시에 점 \(Q\)는 \(C\)를 출발하여 \(P\)가 처음 움직이기 시작할 때의 속도로 직선 \(CDE\)위를 움직인다고 하자. 여기서 네이피어는 \(CQ\)를 \(PB\)의 로그라고 불렀다. 이 기하학적 정의에 의한 로그는 앞에서 정의한 로그와 일치한다.

 \(PB=x), \(CQ=y\), \(AB=10^{7}\), \(P\)의 초속도를 \(10^{7}\)로 하여 위의 기하학적 정의를 지금의 미분기호로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frac{dx}{dt}=-x,\,\frac{dy}{dt}=10^{7},\,x_{0}=10^{7},\,y_{0}=0$$ 이것으로부터$$\frac{dy}{dx}=-\frac{10^{7}}{x},\,y=-10^{7}\ln Cx$$가 되는데 \(t=0\)일 때 \(x_{0}=10^{7}\), \(y_{0}=0\)이므로 \(C=10^{-7}\)이다. 따라서$$y=-10^{7}\ln\left(\frac{x}{10^{7}}\right),\,\frac{y}{10^{7}}=\log_{\frac{1}{e}}\left(\frac{x}{10^{7}}\right)$$가 된다. 따라서 \(PB\)와 \(CQ\)를 \(10^{7}\)로 나누었을 때위의 정의는 앞에 나온 \(\displaystyle\frac{1}{e}\)를 밑으로 하는 로그와 일치한다. 네이피어는 로그표의 수값을 수치계산으로 구했는데 이 점은 그가 새롭게 만들어낸 말 '로그'에서도 알 수 있다. 처음에는 거듭제곱의 지수를 '인공적인 수'라 했으나 뒤에 그리스어 Logos(비)와 arithmos(숫자)를 합친 logarithm을 만들어냈다.

 네이피어는 밑의 개념을 생각하지 않았으나 그의 로그표는 0.9999999의 거듭제곱에 해당하는 곱셈의 반복으로 작성되었고, 따라서 이 로그표에서 거듭제곱수(또는 수)는 지수(또는 로그)가 증가함에 따라 감소하고 있다. 또 곱(또는 몫)에 대한 네이피어의 로그가 정확하게 각각의 로그의 합(또는 차)과 같지 않다는 점이다.

 \(L_{1}=\text{Log} N_{1}\), \(L_{2}=\text{Log} N_{2}\)라 하면$$N_{1}=10^{7}(1-10^{-7})^{L_{1}},\,N_{2}=10^{7}(1-10^{-7})^{L_{2}}$$이므로$$\frac{N_{1}N_{2}}{10^{7}}=10^{7}(1-10^{-7})^{L_{1}+L_{2}}$$가 되고 따라서 네이피어 로그의 합은 \(N_{1}N_{2}\)의 로그가 아닌 \(\displaystyle\frac{N_{1}N_{2}}{10^{7}}\)의 로그가 된다. 이것은 몫, 거듭제곱, 제곱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left(L=\text{Log}N,\,nL=\text{Log}\frac{N^{n}}{10^{7(n-1)}}\right)$$ 그러나 이런 차이는 소수점만 옮기면 되므로 심각한 문제는 아니다. 소수점만 적당히 이동시킨다면 네이피어의 로그는 자연로그와 일치하게 된다. 네이피어가 로그 체계를 쌓아올린 것은 계산, 특히 곱셈과 나눗셈의 간소화에 있었다. 

 

11. 헨리  브리그스

 

 옥스포드 대학의 최초 기하학의 새빌교수(기하학, 천문학 교수 새빌 경이 최초로 개설한 강좌, 오늘날까지 훌륭한 교수가 잇고 있다)가 된 헨리 브리그스는 1614년 네이피어의 저작 '놀라운 로그 체계의 기술'에 감동했고, 네이피어를 방문해 로그법을 개선하는데 의견을 나누었다. 브리그스는 10의 거듭제곱을 사용하는 방법을 제안했고, 네이피어도 여기에 동의했다. 그러나 네이피어가 1617년에 세상을 떠났고, 최초의 상용로그, 곧 브리그스의 로그표의 완성은 브리그스 혼자의 몫으로 남았다. 브리그스는 네이피어처럼 1에 매우 가까운 수의 거듭제곱을 취하지 않는 대신 \(log10=1\)(상용로그)에서 시작해, 차례로 근을 취함으로써 다른 로그를 발견했다. 네이피어가 죽은 1617년에 '1에서 1000까지의 로그-14자리까지 계산한 로그표'를 출판했고, 1624년의 '로그산술'에서 이 표를 다시 확장해 1부터 20,000까지와 90,000에서 100,000까지에 대한 상용로그를 각각 14자리까지 계산해 싣고 있다. 이때 로그계산은 오늘날과 같이 수행되었는데 브리그스의 로그표에서는 오늘날의 로그법칙이 성립했기 때문이었다. 지표, 가수라는 말도 1624년 브리그스의 저서에서 나왔다. 한편 스파이델은 삼각함수의 자연로그를 계산해 1619년 저서 '새로운 로그'에 실었다. 또 로그에 대한 네이피어의 저술을 라이트가 번역한 1616년의 영역판 안에서 자연로그가 몇 개 보인다. 그 당시 새롱누 발견 중 로그만큼 급속히 퍼져나가는 것은 거의 없었으며 넘칠 정도로 완벽한 로그표들이 만들어졌다.

 

12. 유스트 뷔르기

 

 앞 내용만 보면 로그의 발명이 네이피어, 브리그스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처럼 생각되겠지만 그렇지 않다. 같은 시기에 스위스의 뷔르기도 비슷한 생각을 독자적으로 전개하고 있었다. 그가 로그의 연구로 이끌린 배경도 네이피어와 같았고, 등차수열, 등비수열의 성질에서 출발해 합과 차의 법칙에 고무되어 한층 더 연구를 진전시켰다. 뷔르기는 1보다 조금 큰 수 \(1+10^{-4}\)를 택하고 \(10^{8}\)을 곱했다. 표를 만들 때 거듭제곱지수에 모두 10을 곱했다. 곧 \(N=10^{8}(1+10^{-4})^{L}\)이라고 할 때 뷔르기는 \(10L\)을 검은 수 \(N\)에 대응하는 빨간 수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 체계에서 모든 검은 수를 10으로 나누고 또 모든 빨간 수를 \(10^{5}\)로 나누면 사실상 자연로그 체계가 된다. 

 

*\((1+10^{-4})^{10^{4}}\)와 \(\displaystyle\lim_{n\,\rightarrow\,\infty}{\left(1+\frac{1}{n}\right)^{n}}=e\)의 값은 유효숫자 네 자리 까지만 같다.

 

 뷔르기는 로그표를 출판할 때 빨간 수는 표의 가장자리에, 검은 수는 빨간 수에 줄맞추어 표의 안쪽에 써넣어 빨간 수(로그값)가 주어질 때 검은 수(진수)를 찾기 쉽게 했다. 따라서 그가 얻은 표는 로그표라기 보다 진수표지만 뷔르기는 로그의 독자적인 발견자이다. 그리고 뷔르기의 로그는 검은 수가 증가함에 따라 빨간 수도 증가한다는 점에서 네이피어보다 오늘날의 로그에 더 가깝다. 그러나 두 사람의 로그체계는 곱이나 몫의 로그가 각 로그의 합이나 차가 되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다.

 

13. 응용수학과 10진 소수

 

 케플러는 로그를 받아들였는데 천문학자들 계산능력을 크게 향상시켰다는것 때문이었다. 비에트와 동시대의 사람들 대부분은 수학의 실용적인 면에 관련되었다. 뷔르기는 시계기술자, 갈릴레이는 물리학자이며 천문학자, 스테빈은 기술자였다. 

 뷔르기와 스테빈은 각각 10진 소수 발전에 기여했고, 뷔르기와 갈릴레이는 비례 컴파스로 알려진 실용 계산기의 제조판매에서 서로 경쟁관계였다. 

 과학에서 일어난 르네상스는 새로운 생각과 낡은 생각이 만다고 장인의 견해와 학자의 견해가 만나면서 생기는 효소와 같다. 16세기 수학에는 다양하고 상반되는 경향들이 있었다. 그러나 과학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기존의 사고와 새로운 개념의 만남, 이론과 실제 닥친 절박한 요구의 만남에서 성과물이 나온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비에트의 연구는 두 가지 요인 (1) 고대 그리스의 고전의 재생, (2) 중세 및 근세 대수의 비교적 새로운 성과로부터 생겨났다. 그리고 16세기의 전문, 아마추어 이론 수학자들은 실제적인 계산 기술에 관심을 보였는데 보기를 들어 비에트는 60진 소수 대신 10진 소수의 도입을 제안했고, 스테빈은 정수, 소수에 10진법을 사용하자고 호소했다. 이는 2000년 전 플라톤이 수론과 계산술을 명확하게 구분했던 것과 아주 대조적이었다. 

 스테빈은 아르키메데스의 이론적인 저작을 찬양했으나 고대보다 르네상스의 특징인 실용적 경향이 흐르고 있다. 10진 소수의 발명자도, 이것의 체계적인 사용법을 처음으로 시도한 사람도 아니다. 그러나 그의 영향으로 10진 소수가 수학자만이 아닌 일반인들과 수학을 실제로 활용하는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스테빈은 특이하게도 \(\displaystyle\frac{1}{10},\,\frac{1}{100},\,\frac{1}{1000},\,\cdots\)과 같은 것을 정수처럼 다루려고 했다. 그래서 \(\pi\)를 다음과 같이 나타냈다.

 그리고 10분의 1, 100분의 1 대신 60진 소수의 자리를 부를 때 사용하던 분, 초와 같이 '첫 번째', '두 번째'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스테빈의 생각은 옳은 것이었으나 봄벨리의 영향을 받은 그의 기호는 산술보다 대수학에 어울리는 것이었다. 곧바로 근대적인 표기법이 출현했다. 네이피어의 '로그체계의 기술'에는 정수부분과 소수부분을 마침표로 나눈 10진 소수가 실려있고, '막대 계산'에는 스테빈의 10진 산술을 다루고 소수의 분할기호로서 점 또는 쉼표를 제안했다. '로그체계의 작성'이래 영국에서는 표준적으로 마침표를 쓰고 있으나 다른 유럽국가 대부분은 오늘날까지 쉼표를 사용하고 있다. 스테빈은 도량형에도 10진법을 추천했으나 영국, 미국에서는 아직까지 사용하지 않는다.

 

14. 대수적 표기법

 

 스테빈은 실용주의적 사고방식을 지녀 이론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거리가 멀었다. 허수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고 했으나 사고의 폭은 좁지 않았다. 10진 소수에 대한 자릿수 정하는 기수법을 로그에 응용해 Q(제곱) 대신 ②, C(세제곱) 대신 ③, QQ(네제곱) 대신 ④로 썼고, 이것은 봄벨리의 대수에서 제안된 것으로 보인다. \(x^{4}+3x^{2}-7x\)를 다음과 같이 나타낸다.

 스테빈은 이런 기호를 차수가 분수인 경우에도 확장시키자고 제안함으로써 봄벨리, 뷔르기보다 한 차원 앞서갔다. 스테빈은 분수지수를 사용할 기회가 없었음에도 원 안의 \(\displaystyle\frac{1}{2}\)은 제곱근, \(\displaystyle\frac{3}{2}\)는 세제곱의 제곱근을 뜻한다고 서술했다. 스테빈의 저작을 편집한 지라르도 스테빈의 원 기호를 사용하고 있고, 이것을 \(\sqrt{}\), \(\sqrt[3]{}\) 대신 쓸 수 있다고 했다. 이렇게 빠른 진보를 이룬 기호 대수학은 지라르의 '대수학의 새 지식'이 나온지 8년만에 데카르트의 '기하학'에서 완성되었다. 

 

15. 갈릴레오 갈릴레이

 

 스테빈은 수학의 기초적 응용을 즐겼던 그 시대의 전형적인 수학자였다. 이런 점에서 갈릴레이와 비슷하다. 갈릴레이는 의사가 되려고 했으나 유클리드와 아르키메데스에게 끌려 수학 교수가 되었고, 피사 대학, 파두아 대학에서 수학을 가르쳤다. 당시 대학 교과에는 수학이 거의 포함되지 않았으므로 강의의 대부분은 물리학, 천문학, 공학에 해당하는 내용이었다. 갈릴레이는 비에트처럼 '수학을 위한 수학자'가 아닌 '수학 기술자'라고 할 수 있다. 그는 1579년에 '기하학 및 군사용 컴파스'를 조립하고 상품화했다. 1606년의 소책자 '기하학과 군사용 컴파스의 사용법'에서 갈릴레이는 펜, 종이, 주판 등을 쓰지 않고 '기하학 컴파스'를 사용해 여러가지 계산을 빠르게 하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다. 갈릴레이의 컴파스는 오늘날 컴파스처럼 받침점 둘레를 도는 두 개의 다리로 되어있으나 각각의 다리에는 같은 간격으로 눈금이 새겨져 있다. 갈릴레이는 이것을 이용하여 도면 축척의 변경과 복리 계산에 의한 금액 계산을 했다.

 

16. \(\pi\)의 값

 

 갈릴레이의 기하학 컴파스에 대한 소책자는 그에게 유일한 수학논문이었다. 그러나 갈릴레이의 천문학과 물리학에서 연구한 것이 수학적 추론에 많은 영향을 주었고, 이 연구는 미적분과 연결될 가능성을 생각하게 할 만큼 발전된 내용이었다. 이미 물리학과 천문학은 무한대와 무한소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게 된 시점까지 이르렀다. 비에트는 대수학에 대한 동의어로서 '해석'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했고, 초기 해석학자라 할 수 있다. 비에트 시대 이전에도 원의 둘레와 지름의 비에 대해 좋고, 나쁜 여러 근삿값이 계산되었다. 그 중 오토와 안토니스는 1573년 각각 독자적으로 근삿값 \(\displaystyle\pi\approx\frac{355}{113}\)을 얻었고, 이것은 톨레미의 값 \(\displaystyle\frac{377}{120}\)에서 아르키메데스의 값 \(\displaystyle\frac{22}{7}\)을 분자, 분모끼리 빼서 얻은 값이었다.

 루돌프는 정15각형에서 시작해 변의 수를 두 배로 늘려가는 절차를 37회 반복한 결과 20자리로 된 근삿값을 얻어 1596년에 발표했고, 변의 수를 더 많이 늘려 35자리 근삿값을 얻었다. 이 때문에 \(\pi\)를 루돌프 상수라고 한다. 그러나 루돌프는 \(\pi\)의 산출과정을 식을 써서 나타내지 못했다. 그에 비해 비에트는 다음의 식으로 표현했다.$$\frac{2}{\pi}=\sqrt{\frac{1}{2}}\sqrt{\frac{1}{2}+\frac{1}{2}\sqrt{\frac{1}{2}}}\sqrt{\frac{1}{2}+\frac{1}{2}\sqrt{\frac{1}{2}+\frac{1}{2}\sqrt{\frac{1}{2}}}\cdots}$$ 비에트의 무한곱 식은 \(a_{n}\)을 원에 내접하는 정\(n\)다각형의 넓이라 하고 정사각형(\(n=4\))에서 시작해 점화식 \(\displaystyle a_{2n}=a_{n}\sec\frac{\pi}{n}\)에서 \(n\)을 한없이 증가시키면 쉽게 얻어지기 때문이다. 또 이와 같은 무한곱은 히피아스의 공식 \(r\sin\theta=2\theta\)를 사용하여 각을 차례로 이등분하고 그때 지름을 계산해가면 쉽게 구할 수 있다. 

 \(\displaystyle\theta=\frac{\pi}{2}\)에서 시작해 \(\displaystyle\frac{r_{n}}{r_{n-1}}=\cos\frac{\pi}{2^{n}}\)와 \(\displaystyle\lim_{n\,\rightarrow\,\infty}{r_{n}}=\frac{2}{\pi}\)를 이용하면 된다. 그럼에도 \(\pi\)를 처음 해석적인 식으로 나타낸 사람은 비에트였다. 그의 해석술은 1630년에야 인정받았다.

 

참고자료:       
수학의 역사-상, (칼 B 보이어, 유타 C 메르츠바흐 지음), 양영오, 조윤동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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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kywalker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