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사/수학사(상)2022. 9. 20. 08:00
반응형

수학사 27-중국과 인도(1)

 

 

1. 가장 오래된 문서

 

 중국과 인도의 문명은 나일강, 메소포타미아 문명보다 오래되지 않았지만 그리스와 로마 문명보다 훨씬 오래된 문명이다. 중국의 초기 문명은 기원전 100년 무렵에 시작되었고, 중국의 수학에 관한 문서의 연대를 결정하는 일은 쉽지 않은데, 일반적으로 수학 고전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간주되는 '주비산경'에 대해서도 연대추정은 약 1000년의 차이가 있다. 기원전 300년 쯤의 연대가 합당해 보이는데 이것은 기원전 250년 무렵, 한(漢) 왕조보다 조금 앞서 집대성된 또 하나의 논문 '구장산술'과 가까운 관계에 있다. 

 '극비'라는 말은 천체의 원궤도 연구에 그노몬을 사용한 사실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주비산경은 직각삼각형의 성질에 관한 소개와 분수의 이용방법에 관한 연구를 담고 있지만 천문학 계산을 다룬 책이다. 이 책은 군주(주공)와 역법을 담당하는 장관(상고)의 대화 형식으로 되어있고, 장관이 군주에게 정사각형은 지구에 속하고, 원은 하늘에 속하기 때문에 수의 기법은 원과 정사각형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헤로도투스가 이집트의 기하학이 측량에서 시작했듯이 '주비'도 중국의 기하학도 측량에서 시작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바빌로니아와 마찬가지로 중국의 피타고라스 정리를 대수적으로 다룬 것에 대해 몇 가지를 지적한다.

 

2. 구장산술

 

 구장산술은 중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수학책으로 측량, 농업, 공동경영, 공학, 세금징수, 계산, 방정식의 풀이법, 직각삼각형의 성질에 관한 246개의 문제를 다룬다.

 논리적으로 정리되고, 체계적으로 설명된 논문을 쓴 그리스인과 달리 중국인은 이집트, 바빌로니아처럼 특수한 문제를 모아서 사용했다.

 이집트의 문헌처럼 중국의 문헌에도 정확한 결과, 부정확한 결과, 미숙한 결과, 세련된 결과가 나란히 놓여있다.

 

3. 마방진

 

 중국인은 특히 도표를 좋아했다. 그래서 마방진(옛날부터 있었으나 기원은 명확하지 않다)의 최초의 기록이 중국에서 나타났다는 것은 놀라운 일은 아니다.

 다음의 마방진은 하(夏)나라 우(禹)왕의 통치시대 낙수(洛水)에서 나타난 거북을 보고 인간이 생각한 것으로 되어있다.

 이 그림에 관심을 가진 구장산술의 저자는 연립일차방정식을 다음과 같이 풀었다.

4. 산목수학

 

 중국 수학의 전통이 끊임없이 이어졌다면 현대의 방법을 뛰어넘어 수학의 발전 형태를 크게 바꿨을지도 모르지만, 중국의 문화는 갑작스런 중단으로 크게 방해를 받았다.

 보기를 들면 기원전 213년에 진시황의 분서갱유사건이 있었다. 문서의 일부는 필사나 구두 전달에 의해 후세에 남겨졌을 것이고, 학문은 실제로 지속되었으나 수학은 상업과 역법의 문제에 중점을 두게 되었다. 중국의 서구 또는 중국과 인도 사이에는 접촉이 있었던 것 같으나 가져온 지식의 범위와 경향에 따라 학자들은 서로 달랐다.

 보기를 들어 바빌로니아에서는 60진법을 사용했는데, 중국에서는 기본적으로 10진법을 사용했다. 중국에서는 일찍이 기수법으로서 두 가지 방법이 이용되었다. 한 쪽에서는 곱셈의 원리가 지배하고 다른 한 쪽에서는 자릿수를 매기는 기수법의 방법이 사용되었다.

 전자(곱셈의 원리)에서는 1에서 10까지의 숫자마다 다른 기호가 주어지고, 또 10의 거듭제곱에 대해 특별한 부호가 쓰였다. 그리고(왼쪽 → 오른쪽, 또는 아래 → 위) 홀수번째 자리의 숫자 바로 다음에 10의 거듭제곱의 부호를 곱하는 형태로 쓰였다(678: 六百七十八).

 '산목(rod numerals)'의 기수법에서는 1에서 9까지의 숫자는

 의 형태로, 그것의 10배수는

의 형태로 표현된다. 

 중간에 0이 있다면 둥근 영의 기호(O)를 이용해 나타냈다. 예를들어 1,405,536은

 으로, 56,789는

으로 나타낸다.

 산목이 처음으로 나타난 연대를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기원전 수백년, 곧 자리 기수법이 인도에서 사용되기 훨씬 전에 존재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5. 주판과 10진 소수

 

 기원전 300년 무렵의 산목은 단순히 계산 결과를 표시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었다. 행정관들이 대나무/상아/철로 만들어진 산목을 가방에 넣고 다니면서 계산도구로 이용했다. 

 11세기의 저술가는 "산목이 나는 것 처럼 보일 정도로 그 움직임이 너무도 빨라 눈이 따라갈 수 없을 정도"라고 할 만큼 능숙하게 산목을 다루었다. 

 소거는 산판 위의 산목이 연필로 서서 계산하는 것보다 빨랐을 것이다. 사실 산판과 산목의 이용은 매우 효과적이었기 때문에 주판을 일찍부터 사용하지 않았고, 주판을 언제 이용했는지에 대한 정확한 연대를 결정하는 것은 어렵다. 

 또한 중국, 아라비아와 유럽에 나타난 주판이 각각 독자적인 발명이었는지도 확실히 알 수 없다. 아라비아의 주판은 각 철사에 10개의 구슬이 있고, 가운데에 칸막이인 가로줄이 없었던 반명, 중국의 주판에는 한 개의 철사에 꿰인 위쪽의 구슬 하나가 아래쪽의 구슬 5개에 해당했다. 그리고 수는 칸막이인 가로를 쪽으로 그 수에 맞는 구슬을 움직이면서 기록한다.

 중국의 기수법의 기술은 분수의 사용에 대해 서술하지 않았다면 불완전할 것이다.

 중국인들은 분모의 최소공배수를 찾는 것과 관련해 분수에 관한 연산에 정통했다. 그들은 분수에서 성별이 비슷하다고 보아 분자를 아들, 분모를 어머니라고 불렀다. 음(陰)과 양(陽)(반의어, 특히 성에 관해)을 강조하여 분수를 다루는 방법을 한 층 이해하기 쉽게 했는데 중국에서 분수를 10진법으로 나타내려는 경향이 있었다. 계산에서도 분수조작을 쉽게 하기 위해 10진법 방법을 사용했다. 

 보기를 들면 '구장'에 관해서 쓴 주석서에는 근호풀이를 10진법으로 쉽게 하는 \(\displaystyle \sqrt{a}=\frac{\sqrt{100a}}{10}, \sqrt[3]{a}=\frac{\sqrt[3]{1000a}}{10}\)에 해당하는 오늘날 잘 알려진 제곱근과 세제곱근에 대한 공식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음수의 개념은 중국인들에게 어렵지 않았는데 그들은 두 종류의 산목(적색을 양수, 흑색을 음수로 계산)에 익숙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음수가 방정식의 해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6. \(\pi\)의 값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수학은 독자적으로 진보를 이룬 것일지도 모른다는 가정이 성립될 만큼 세계에서 중국 수학은 같은 시대\(\cdot\)다른 지역의 수학과 분명히 다르다. 

 초기 중국 수학에서 \(\pi=3\)으로 썼다는 사실을 가지고 메소포타미아에 의존했다고 말할 수 없다. 그 주된 까닭은 1세기부터 중국에서는 더욱 정확한 \(\pi\)의 값을 구하려는 연구가 다른 어떤 지역보다도 한 층 끈기있게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보기를 들면 \(\displaystyle 3.1547, \sqrt{10}, \frac{99}{29}, \frac{142}{45}\)와 같은 값이 발견된다. 그리고 3세기에 '구장'의 중요한 주석자인 유휘는 정96각형을 이용하여 3.14라는 값을, 또 3092각형을 이용하여 3.14159라는 근사값을 얻었다.

 \(\pi\)값에 열중하는 중국인의 모습은 조충지의 연구에서 절정을 이룬다. 조충지가 계산한 값 중 하나는 아르키메데스의 결과와 같은 \(\displaystyle\frac{22}{7}\)이었으나 부정확한 값이라고 서술한다. 그가 구한 정확한 값은 \(\displaystyle\frac{355}{113}\)이고, 이 값은 15세기까지 어디를 찾아보아도 이에 맞먹는 값이 없을 정도로 뛰어난 근삿값이다. 오늘날 달의 경계표시(지명) 가운데 그의 이름이 붙어있다. \(\pi\)값에 보이는 정확성은 이론적 통일 때문이라기 보다 오히려 끈기있게 계산하여 얻은 것이라는 사실을 염두해 둬야 한다. 

 피타고라스의 정리만으로도 원하는 만큼의 정확한 근삿값을 충분히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정\(n\)각형의 변의 길이를 알면 원에 내접하는 정\(2n\)각형의 길이는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두 번 사용하여 계산할 수 있다.

 \(C\)를 중심이 \(O\)이고 반지름이 \(r\)인 원, \(PQ=s\)를 둘레의 길이를 이미 아는 내접하는 정\(n\)각형의 한 변의 길이로 한다. 그러면 변심거리(원의 중심과 현의 중심 사이의 거리) \(OM=u\)는 \(\displaystyle u=\sqrt{r^{2}-\left(\frac{s}{2}\right)^{2}}\)이다. 그러므로 \(MR=v=r-u\)임을 알 수 있다. 그때 원에 내접하는 정\(2n\)각형의 변 \(RQ=w\)는 \(\displaystyle w=\sqrt{v^{2}+\left(\frac{s}{2}\right)^{2}}\)이다. 여기서 정\(2n\)각형의 둘레 길이를 알 수 있다. 

 이상의 계산을 유휘가 밝혔듯이 \(w^{2}=2rv\)에 주목함으로써 줄일 수 있다. 그리고 이 순서를 되풀이하여 원둘레에 매우 가까운 근삿값을 얻고 이로부터 \(\pi\)를 정의할 수 있다. 

 

7. 대수와 호너법

 

 중국 문명은 놀랄 정도로 많은 기술혁명을 가져왔다. 인쇄와 화약의 사용(8세기)이나 종이와 나침반의 사용(11세기)은 다른 어떤 나라보다 빨랐고, 또 그것들은 송(宋)대 후기의 13세기 중국 수학의 전성기보다도 빨랐다. 당시에 (중국) 수학자들은 연구를 했으나 그들 사이의 교류는 없었다. 또 그리스 수학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수학책 중 우리가 볼 수 있는 저서가 거의 없다. 

 송나라의 마지막 위대한 수학자는 주세걸이었고, 그에 대해 알려진 것은 없다. 그의 저서로는 1299년에 쓴 산술계몽(수학 입문서), 1303년에 쓴 사원옥감(네 요소에 대한 귀중한 거울)이었다. 산술계몽은 한국과 일본에 큰 영향을 주었고, 사원옥감에서 네 요소는 천(天), 지(地), 인(人), 물(物, 사물)이고 미지수를 이용하여 중국 대수의 발전에서 절정을 이루는 책이다. 

 사원옥감은 연립방정식, 14차 방정식, 치환을 다루고 있다. 일반적으로는 500년 후의 호너(Horner)의 이름으로 불린다. 

 보기를 들면 방정식 \(x^{2}+252x-5292=0\)의 풀이법에서 처음으로 근의 근삿값으로서 \(x=19(19\leq x\leq 20)\)를 취하고, \(y=x-19\)라는 치환을 이용해 방정식 \(y^{2}+290y-143=0(0\leq y\leq 1)\)을 얻었다. 이렇게 해서 \(y^{2}+290y-143=0\)의 근을 근삿값으로 \(\displaystyle y=\frac{143}{1+290}\)으로, 이에 대응하는 \(x\)를 \(\displaystyle x=19\frac{143}{291}\)로 했다. 또 방정식 \(x^{3}-574=0\)에 대하여 \(y=x-8\)을 이용해 \(y^{3}+24y^{2}+192y-62=0\)을 얻고, 근을 \(x=8+\frac{62}{1+24+192}\), 곧 \(\displaystyle 8\frac{2}{7}\)로 했다. 게다가 몇 개의 보기에서 주세걸은 소수의 근삿값도 구했다.

 

참고자료:   

수학의 역사-상, (칼 B 보이어, 유타 C 메르츠바흐 지음), 양영오, 조윤동 옮김 

반응형
Posted by skywalker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