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사/수학사(상)2022. 7. 16.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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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사 26-그리스 수학의 부활과 쇠퇴(2)

 

 

9. 파푸스의 정리

 

 파푸스의 집성은 흥미로운 정보와 중요하고 새로운 성과로 가득 차 있다. 4권에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피타고라스 정리의 초등적 일반화다.

 \(ABC\)를 임의의 삼각형으로 하고 \(ABDE\)와 \(CBFG\)를 세 변 가운데 두 변 위에 만든 임의의 평행사변형이라 할 때 파푸스는 그 두 평행사변형의 넓이의 합과 같은 넓이인 세 번째 평행사변형 \(ACKL\)을 변 \(AC\)위에 작도했다. 그것은 두 선분 \(FG\)와 \(ED\)를 연장해 만나는 점을 \(H\)라 하고 두 점 \(H,\,B\)를 잇는다. 선분 \(HB\)의 연장선과 변 \(AC\)를 만나는 점을 \(J\)라 하고, 마지막으로 선본 \(HBJ\)와 평행하게 선분 \(AL\)과 \(CK\)를 그으면 쉽게 마무리된다.

 이 정리를 일반화한게 파푸스인지 알 수 없다. 단 그 이전에 헤론이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4권에 있는 또 하나의 일반화는 구두장이 칼에 대한 아르키메데스의 정리를 확장한 것이다.

 이는 위 그림과 같이 내점원 \(C_{1},\,C_{2},\,C_{3},\,...,\,C_{n},\,...\)을 차례로 그려 어느 것이나 반원 \(AB\)와 \(AC\)에 접하면서 원 자신도 차례로 접하게 하면 \(n\)번째의 원의 중심에서 밑변 \(ACB\)까지의 거리는 \(n\)번째 원의 지름의 \(n\)배이다.

 

10 파푸스의 문제

 

 훗날 주석자들은 집성의 5권을 특히 좋아했는데 여기서 꿀벌의 영리함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파푸스는 둘레가 같은 두 정다각형에서 변의 수가 많은 쪽이 넓이가 크고, 꿀벌은 사각기둥, 삼각기둥이 아닌 육각기둥으로 벌집을 만든는 데 어느 정도 수학적 지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결론지었다.

 5권에서는 둘레가 같은 도형에 대한 또 다른 문제, 보기를 들어 같은 둘레가 주어질 때 원은 다른 어떤 정다각형보다 넓이가 크다는 것을 증명했는데 500년 전 제노드루스가 쓴 '둘레가 같은 도형에 관해서'를 흉내내서 쓴 것으로 보인다(제노드루스의 논문에는 겉넓이가 같은 모든 입체도형 가운데 구가 가장 큰 부피를 갖는다는 명제가 있지만 그 증명은 불완전하다).

 집성의 6권, 8권은 주로 천문학, 광학, 역학(빗면의 법칙을 발견하려고 시도했으나 성종하지 못한 일도 포함)에 대한 수학의 응용을 다룬다.

 7권은 수학사에서 그 두 권보다 훨씬 중요하다. 파푸스는 일반화를 좋아해서 7권에서는 해석기하학의 기본적 원리에 아주 가까이 다가갔다. 그런데 고대 사람들은 평면곡선을 다음의 두 방법으로만 정의한다.

 

(1) 한 점의 운동을 두 방향 운동의 합성으로 하는 운동학적 정의

(2) 원뿔, 구, 원기둥과 같은 기하학적 입체의 겉면을 평면으로 자르는 것

 

 그리스 기하학이 주로 다룬 것은 평면곡선, 그것도 매우 한정된 수의 평면곡선 뿐이었다. 따라서 집성 7권에서 파푸스가 수없이 많은 새로운 곡선을 암시하는 듯한 일반화된 문제를 하나 제기하던 점은 아주 주목할 만하다. 그 문제는 '셋 또는 네 선의 자취'라는 문제로 유클리드는 그 자취의 특별한 경우만을 풀었고, 아폴로니우스는 현재 전해지지 않는 저작에서 완전하게 풀었다. 그럼에도 일반해를 얻기 위한 기하학자들의 시도는 실패했고, 그래서 그런 자취들이 모두 원뿔곡선이 되는 것을 처음 인 것은 파푸스 자신이라고 말했다.

 더 중요한 것으로는 파푸스는 계속해서 네 개 이상의 선에 대해서 비슷한 문제를 고찰했다. 파푸스는 평면 위에 선이 6개가 있는 경우에는 그 가운데 세 직선으로부터 거리의 곱이 나머지 세 직선까지의 곱과 정비례를 이룬다는 조건에서 하나의 곡선이 결정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때 곡선은 하나의 입체와 또 하나의 다른 입체의 비가 일정하다는 사실에 의해 정의된다. 

 선이 6개보다 많은 경우에 대해 파푸스는 "3차원 이상이 되면 만족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했듯이 더 이상 나아가는 것을 망설였다. 그러나 파푸스는 또 "우리 시대보다 조금 앞선 살마들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나타내거나, 이러이러한 선분으로 둘러싸인 직사각형에 이러이러한 직선으로 둘러싸인 정사각형이나 직사각형을 곱하는 것을 용인하였다. 그러나 그런 사항은 일반적으로 복비로 서술되고 설명될지도 모른다"고 했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선인들이 3차원 이상의 곡선을 포함하는 해석기하학을 향해 대단히 중요한 첫 걸음을 내딛을 준비를 하고 있던 것은 분명하다.

 파푸스의 문제에서 직선이 몇 개가 있어도 언제나 하나의 특정한 곡선을 결정할지도 모른다는 파푸스의 인식은 고대 기하학 전체에서 보면 자취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관찰이라고 할 수 있다.

 

11. 분석론 보전

 

 집성의 7권에는 파푸스의 문제와 다른 중요한 내용이 기록되어있다. 그 내용으로 분석방법이라는 것과 '분석론 보전'으로 알려진 논문집에 대해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파푸스는 분석을 '역의 풀이법'으로 이해하고 풀이법 각 단계를 거꾸로 더듬으면 타당한 증명이 된다고 생각했다(잘못된 결론은 잘못된 전제를 뜻한다).

 파푸스는 이러한 분석과 종합의 방법이 '분석론 보전'에 실린 저작의 저자들이 사용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이것은 일반적인 기초를 공부한 뒤에 주어진 곡선을 포함한 여러 문제를 푸는 힘을 갖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쓰도록 만든 학설집"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파푸스는 '분석론 보전' 안에 아리스타에우스, 유클리드, 아폴로니우스가 연구한 원뿔곡선론을 실었다. 여기에 실린 논문 중 약 반이 없어졌는데 그 가운데는 아폴로니우스의 '비례 단절', 에라토스테네스의 '중항에 관하여', 그리고 유클리드의 '포리스 마타'가 있다.

 포리스마타는 오늘날의 곡선과 자취의 방정식에 해당하는 것아록 전해지고, 이것은 또한 유클리드와 파푸스가 오늘날 해석기하학과 동떨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12. 파푸스-굴딘의 정리

 

 집성의 7권에는 세 가지의 원뿔곡선이 초점과 준선으로 결정된다는 사실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술이 있다. 아폴로니우스는 중심이 있는 이차곡선의 초점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알았던 것 같으나 포물선이 초점과 준선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은 파푸스 이전에는 알려져 있지 않았던 것 같다. 이 7권에서는 처음 모습을 나타낸 정리가 또 하나 있는데, 이 정리에는 17세기 수학자 굴딘의 이름이 있다. 이 정리는 "평면 위의 폐곡선은 그 곡선을 가로지르지 않는 직선의 둘레로 회전시킬 때 생기는 입체의 부피는 그 곡선으로 둘러싸인 넓이에 그 도형의 무게중심이 회전한 거리를 곱하면 된다"는 내용이다. 파푸스는 이 일반적인 정리를 자랑스럽게 생각했는데 '곡선과 곡면과 입체에 대한 모든 종류의 정리를 많이 포함하고, 그 모두가 일반적인 정리의 증명 하나로 동시에 증명' 되기 때문이었다. 

 굴딘의 정리는 '집성'의 원고에 보간법을 제시했을 가능성이 있다. 어쨋든 그 정리는 쇠퇴기나 그 뒤의 누군가에 의한 괄목할 만한 발전을 보여주고 있다. 또 파푸스는 위와 비슷한 "곡선을 길이와 회전할 때 생기는 입체의 겉넓이는 그 곡선의 길이와 회전할 때 도형의 무게중심이 지나는 거리의 곱"과 같다는 정리를 제시했다.

 기하학을 부흥시키려 했던 파푸스의 시도가 실패로 끝났기 때문에 '집성'은 고대에서 중요한 마지막 수학책이 되었다. 그리스에서는 그 이후 다시 1000년동안 수학 관련 저작이 계속 씌여, 약 1000년 전부터 미쳤던 영향령이 그 뒤에도 이어졌다. 그러나 파푸스 이후 그의 수준에 이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3. 알렉산드리아의 프로클로스

 

 프로클로스는 알렉산드리아 출신 수학자이고, 아테네에서 신플라톤 학파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수학자라기보다 철학자였는데 그 논평은 종종 초기 그리스 기하학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그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이 '유클리드 원론 1권에 대한 주석'이고, 에우데무스의 '기하학사'와  파푸스의 '원론에 대한 주석'을 기준으로 지어졌다(이 두 저서는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따라서 유클리드 이전 기하학의 역사에 대해서는 프로클레스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프로클레스는 한편으로 "일정한 길이의 선분이 교차하는 두 직선 위에 선분의 끝점이 놓인 채, 두 직선을 따라 움직이면 선분 위의 한 점은 타원의 일부를 그린다"는 정리를 증명했다.

 

14. 보에티우스

 

 서로마 말기의 귀족 보에티우스(480~524년 무렵)는 고대 로마의 철학자, 수학자, 정치가였다. 그는 로마에서는 지도적인 수학자였으나 저작의 수준은 그리스 저자들과 큰 격차가 있었다. 그는 교양 7학과 중 수학의 4과에 대해 각각 교과서를 썼으나 빈약하고 초기 고전의 매우 초보적인 축약판에 지나지 않았고, 논리적 구조로서 수학을 생각했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15. 알렉산드리아 시대의 종말

 

 여성 수학자 히파티아의 죽음은 알렉산드리아의 종말을, 보에티우스의 죽음은 서로마 제국에서 고대 수학의 종말로 여겨졌다. 그러나 아테네에서는 몇 해 더 이어갔다. 그 시기에 아테네에는 위대하고 독창적인 수학자는 없었으나 아리스토텔레스 학파의 주석자 심플리키우스가 있었고, 그는 가장 오래된 단편을 남길 만큼 그리스 기하학에 관심이 있었다. 

 

16. 고대 그리스 사화집

 

 심플리키우스는 원래 철학자였다. 그의 시대에는 '고대 그리스 사화집'이라는 책이 있었고, 이 책은 아메스 파피루스에 있던 문제를 떠올리게 만든다.

 사화집에는 약 6000개의 수수께끼가 있는데 그 중 40개 이상이 수학문제였다. 여기에는 대표적인 두 수학문제(방정식 문제)가 있었다. 이 수학문제는 메트로도루스가 모았다고 알려져 있다.

 

1. 사과를 6명에게 나누어 주는데 첫 번째 사람에게는 전체의 \(\frac{1}{3}\), 두 번째 사람에게는 \(\frac{1}{4}\), 세 번째 사람에게는 \(\frac{1}{5}\), 네 번째 사람에게는 \(\frac{1}{8}\), 다섯 번째 사람에게는 10개를 주면 마지막 한 사람에게는 사과를 한 개 밖에 줄 수 없을 때 사과는 처음에 몇 개인가?

(전체 사과개수를 \(x\)라 하면, \(\frac{x}{3}+\frac{x}{4}+\frac{x}{5}+\frac{x}{8}+10+1=x\))

 

2. 첫 번째 수도관이 물통 하나를 가득 채우는 데 하루가 걸리고, 두 번째 것으로는 이틀, 세 번째 것으로는 사흘, 네 번째 것으로는 나흘 걸린다면 이들 네 개의 수도원을 모두 사용하여 가득 채우려면 며칠 걸리는가?

(물통의 양을 \(W\)라고 하면 \(\frac{W}{v_{1}}=1,\,\frac{W}{v_{2}}=2,\,\frac{W}{v_{3}}=3,\,\frac{W}{v_{4}}=4,\,\) 이때 \(\frac{W}{v_{1}+v_{2}+v_{3}+v_{4}}=?\))

 

17. 6세기의 비잔틴 수학 

 

 심플리키우스와 메트로도루스는 당시 뛰어난 수학자는 아니었다. 그들과 같은 시기에 아르키메데스, 아폴로니우스의 연구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자는 에우토키우스로 아르키메데스의 논문 몇 편과 아폴로니우스의 원뿔곡선에 대한 주석을 섰다. 그의 주석이 없었다면 아르키메데스의 방법이 오늘날에 전해지지 못했을 것이다. 에우토키우스가 쓴 아폴로니우스의 원뿔곡선의 주석은 뛰어난 수학자 안테미우스에게 전송되었다. 안테미우스는 실을 잡아당기며 연필을 돌리면 타원이 그려짐을 보이고, 포물선의 초점의 성질에 대해 서술한 '화경(불타는 거울)에 대해서'라는 저작을 썼다.

 또한 안테미우스의 동료 이시도로스도 유능한 수학자였다. 에우토키우스의 주석을 널리 소개해 아르키메데스와 아폴로니우스에 대한 관심을 다시 끌게 한 것은 이시도로스이다. 

 잘알려진 T자와 실을 사용하는 포물선의 작도법은 그의 아이디어였을 수 있다. 

 이 세 사람 덕분에 아르키메데스 저작의 그리스어 판이나 아폴로니우스의 원뿔곡선의 처음 네 권이 오늘날까지 전해질 수 있었다.

 이시도로스는 아테네에 있던 플라톤 아카데미의 마지막 지도자의 한 사람이었다. 이 학교는 신플라톤 학파의 중심이었고, 529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 의해 폐교될 때 까지 존재했었다. 그 이후 심플리키우스와 다른 몇 명의 철학자들은 페르시아에 망명해 아테네 아카데미를 세웠다. 따라서 529년은 고대 유럽에서 수학 발전이 종말을 고한 해로 볼 수 있다.

 보에티우스의 지루한 라틴어판 교과서가 사용되기는 했으나 사람들이 기하학에서 신에게로 관심이 옮겨가 수학을 연구하려는 정신적 자세는 활기를 잃었다.

 

참고자료:  
수학의 역사-상, (칼 B 보이어, 유타 C 메르츠바흐 지음), 양영오, 조윤동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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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kywalker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