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사/수학사(상)2022. 7. 11.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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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사 16-시라쿠사의 아르키메데스(1)

 

 

1. 시라쿠사의 포위

 

 헬레니즘 시대를 통해 수학 활동의 중심은 알렉산드리아에 머물고 있었으나 당시 고대 전체를 통해서 지도적인 수학자는 알렉산드리아 태생은 아니었다. 

 시라쿠사의 아르키메데스(Archimedes of Syracuse)도 얼마 동안 유클리드의 후계자들에게 배웠을 것이고, 알렉산드리아의 수학자들과 교류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살고, 죽은 곳은 시라쿠사였다. 

 역사적으로 제 2차 포에니 전쟁 중 시라쿠사는 로마와 카르타고의 전쟁에 말려들었고, 시라쿠사는 카르타고와 동맹이어서, 기원전 214~212년까지 로마군에 포위되었다.

 전하는 바로는 아르키메데스는 적을 막기 위해 교묘한 무기를 차례로 고안했다고 한다. 예를 들면, 돌을 던지는 투석기, 로마의 배를 매달아올린 뒤 떨어뜨려 파괴할 수 있는 밧줄과 도르래, 고리를 조합해 만든 도구, 배에 불을 붙이기 위한 장치가 있었다.

 그러나 시라쿠사는 배반자에 의해 로마에 함락되고, 당시 로마군의 장군이 마르켈루스가 "아르키메데스는 살려두라"는 지시를 내렸으나 결국 아르키메데스는 살해되었고(그 당시 아르키메데스는 땅에 원을 그리고 있었고, 어떤 로마군이 그 그림을 짓밟자 "그 원을 밟지 말라!"고 말했고, 그 로마군은 그가 아르키메데스인지도 모르고 그를 죽였다), 그때 그의 나이가 75세였다. 

 마르켈루스는 아르키메데스가 천체의 운행을 구체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만든 정교한 별자리 투영기를 전리품으로 챙겼다고 한다. 

 아르키메데스의 삶의 기록에 따르면 어느 것이나 그가 사고에 의한 산물에 견줘서 기계적 장치에는 그다지 무게를 두지 않았다고 하는 점에 일치한다. 지레나 그 밖의 단순한 장치를 다룰 때 조차 아르키메데스는 실제에 응용하는 것보다 일반 법칙에 관심이 있었다.

 

2. 지레의 원리

 

 아르키메데스가 처음으로 지레를 사용한 것은 아니고 또 그 일반 법칙을 정식화한 것도 아니다. 실제로 아르키메데스의 저작 중, 지레 위에 놓인 두 추는 그것들의 무게(중력)가 받침점으로부터 거리에 반비례 관계에 있을 때 균형이 잡힌다는 명제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 학파 사람들은 수직인 직선 운동만이 지구 위의 자연스러운 운동이라는 학설을 그 법칙에 연결시켰던 것이다.

 그들(아리스토텔레스 학파)은 길이가 다른 지레의 양 끝은 받침점에 대하여 직선이라기보다 오히려 원 모양의 자취를 그리는 것을 지적한다. 그때 막대의 긴 쪽 끝은 더 큰 원을 그리는데 그것은 막대의 짧은 쪽 끝보다도 자연스러운 수직 직선 운동에 가까운 운동을 한다. 따라서 지레의 원리는 이 운동 법칙에서 나온 당연한 귀결이었다.

 한편 아르키메데스는 지레의 원리보다 그럴듯한 정역학의 공리(좌우대칭인 물체는 평형을 이룬다)로부터 그 연역을 연구했다. 곧 먼저 무게 3인 추를 양 끝과 가운데 올려놓은 길이가 4이고 무게가 없는 막대기가 중심에 받침점이 있는 상태에서 균형잡혀있다고 가정한다(아래 그림).

 그러면 아르키메데스의 대칭성 공리에 의해 그 계는 평형상태에 있다. 예를들어 길이가 2인 곳에 무게 1인 추는 받침점에 대해 반대쪽에 길이가 1인 무게 2인 추와 균형을 이룬다. 이와 같은 과정의 일반화를 통해 아르키메데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학적 논의에 의존하지 않고 정역학 원리만을 바탕으로 이 법칙을 세웠던 것이다.

 이 원리에 관한 아르키메데스의 연구는 두 권으로 된 논문 '평면의 평형에 관하여'에 정리되어 있다. 이 논문은 가장 오래된 책이 아닌데 이미 1세기 남짓 전에 아리스토텔레스가 8권으로 된 '물리학'을 썼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방법은 사변적(경험의 뒷받침이 없음)이고 수학적이지 않았지만 아르키메데스의 이론 전개는 유클리드 기하학과 비슷했다. 일련의 간단한 공준으로부터 아르키메데스는 매우 깊이 있는 몇 가지 결론을 도출했는데 그것들은 물리학과 수학 양쪽에 매우 중요하게 될 수학과 역학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확립했다.

 '평면의 평형에 관하여'의 1권은 직선도형과 삼각형, 사다리꼴의 중심에 관한 내용을, 2권은 포물선의 호의 무게중심을 다루는데, 그 중심이 호의 지름 위에 놓이면서 비가 3:2인 선분으로 지름을 나누는 증명을 포함하는데 착출법이 사용된다.

 

3. 유체정역학의 원리

 

 아르키메데스를 수리물리학의 아버지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평면의 평형에 관하여'뿐만이 아니라 두 권으로 된 '부체에 관하여'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아르키메데스는 유체 압력의 본질에 관한 간단한 공준에서 시작해 매우 깊이 있는 몇 가지 결과를 얻는다. 그리고 앞쪽의 두 명제에서 그 유명한 아르키메데스의 유체정역학 원리를 명확하게 나타내고 있다.

 

I.5 유체보다 가벼운 고체를 유체 속에 넣으면 일부분이 잠기는데 그때 배제된 유체의 무게는 고체의 무게와 같다.

I.7 유체보다 무거운 고체를 유체 속에 넣으면 고체는 유체의 바닥까지 가라앉고, 또한 유체 속에서 그 고체의 무게를 재면 진짜 무게보다 배제된 유체의 무게만큼 가벼워진다.

 

 이 부력 원리의 수학적 전개가 아르키메데스가 '유레카(알았다)'를 외치게 한 발견이다. 이것을 토대로 왕관에 금이 아닌 다른 금속이 사용되었음을 보일 수 있다.

 같은 무게의 금과 은 왕관을 물에 가득 채운 그릇에 차례로 담가 흘러 넘친 물의 양을 재어 금과 은의 밀도를 비교하여 쉽게 알아낼 수 있었다.

 아르키메데스의 논문 '부체에 관하여'에는 이제까지 기술한 유체의 단순한 성질보다 더 많은 사항이 정리되어 있다. 실제로 제 2권은 모두 유체속에 놓인 포물면체 토막의 평형에 맞추어져 있고, 그 정지 위치는 포물면체다. 그것이 떠 있는 유체의 상대 비중에 의존함을 보이고 있다. 이 중 전형적인 것은 명제 4이다.

 축에 직각으로 잘린 회전 포물면에 토막이 있어 그 축 \(a\)는 \(\frac{3}{4}p\)(\(p\)는 매개변수)보다 크고, 그 비중은 유체의 비중보다 작은데 유체와 비중의 비는 \(\left(a-\frac{3}{4}p\right)^{2}:a^{2}\)보다 작지는 않다. 만일 그 포물면체 토막을 유체 속에서 축을 수직에 대해서 임의의 각도가 되게 하고, 밑면이 유체의 표면에 닿지 않도록 놓으면 토막은 처음 상태에 그대로 있지 않고 축이 수직이 되는 위치로 되돌아간다.

 아르키메데스는 책상 위의 학자로만 머물지 않고 기계적 원인으로 생긴 긴급사태를 해결하러 자주 나가기도 했다. 

 배가 무거워 물에 못 띄울 때 지레와 도르래를 이용하여 해결했고, 알렉산드리아에서 '아르키메데스의 나사'라 불리는 기울어진 축에 나선 형태의 관을 둘러감아 축에 달린 손잡이를 돌려 물을 퍼는 방법으로 나일강 유역의 경작 가능한 토지에 물을 댔다.

 

아르키메데스의 나사의 작동

4. 모래를 헤아리다

 고대 그리스에는 이론과 응용 뿐만 아니라 일상의 틀에 박힌 계산과 수의 성질에 관한 이론적 연구를 명확하게 구별하고 있었다. 그리스 학자들은 전자를 기호논리학(logistic)이라 하여 얕보았고, 고결한 철학적 탐구인 산술(arithmetic)은 후자(수의 성질에 관한 연구)하고만 관계한다고 생각했다. 이렇나 고대인의 태도는 계산을 노예의 일로 여기던 고대의 사회구조를 반영하는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이 의견이 맞다고 해도 조금 과장되어 있는데 그리스인은 옛 아티카식(헤로디안식) 기수법을 더 뛰어난 기수법인 이오니아식(알파벳식)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아르키메데스가 살았던 시대는 기수법이 아티카식에서 이오니아식으로 바뀌고 있어서 계산술까지 다루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르키메데스는 온 우주를 다 메우는 데 필요한 모래알의 개수보다 더욱 큰 수를 나타낼 수 있다고 장담하고, 게다가 더욱 대담한 고대 천문학상의 가설도 언급한다. 이것(고대 천문학상의 가설)은 기원전 3세기 중엽 사모스의 아리스타쿠스가 제창한 지구는 태양의 둘레를 돈다는 생각이다. 이 천문학 체계에 따르면 지구가 태양의 둘레를 돌아 몇백만 km나 되는 거시를 이동하는 동안, 항성의 상대위치는 변화한다고 한다. 그런데 시차가 관측되지 않아 태양 중심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고, 아리스타쿠스는 이에 대해 항성들이 지구에서 먼 거리에 위치해 있어서라고 답했다.

 아르키메데스는 자신이 한 말을 실행하기 위해 모든 가능한 우주를 고려하고, 그 다음에 아리스타쿠스의 광대한 우주를 채우는 데 필요한 모래알 수를 셀 수 있음을 보였다. 아르키메데스는 당시 쓰였던 지구, 달, 태양의 크기와 달, 태양, 별까지 거리를 어림잡은 값에서 계산을 시작했다. 당시 일반적으로 생각하던 태양까지의 우주를 채우는 데 필요한 모래알의 수는 (현대 표기로) \(10^{51}\)보다 적다고 결론짓고, 아리스타쿠스의 우주를 채우는 데 필요한 모래알이 \(10^{63}\)개를 넘지 않음을 보였다.

 

5. 원의 측정

 

 아르키메데스는 내접 정육각형에서 시작해 변의 수를 차례로 2배씩, 96개의 변이 될 때까지 늘려가며 각 다각형 둘레의 길이를 계산했다. 이 과정을 아르키메데스의 알고리즘이라고 한다. 

 \(P_{n},\,p_{n}\)을 각각 변이 \(n\)개인 외접, 내접 정다각형의 둘레의 길이라 하고 먼저 수열 \(P_{n},\,p_{n}\), \(P_{2n},\,p_{2n}\), \(P_{4n},\,p_{4n}\)을 생각한다. 이 수열의 셋째 항부터는 앞의 두 항의 조화, 기하평균을 번갈아 놓으면 된다. 곧 \(P_{2n}=\frac{2p_{n}P_{n}}{p_{n}+P_{n}}\), \(p_{2n}=\sqrt{p_{n}P_{2n}}\)이다. 

 또 이 수열 대신에 수열 \(a_{n},\,A_{n}\), \(a_{2n},\,A_{2n}\)을 쓸 수 있다. 여기서 \(a_{n},\,A_{n}\)은 각각 내접, 외접 정\(n\)각형의 넓이이고 셋째 항 부터는 앞의 두 항과 기하평균과 조화평균을 번갈아 놓으면 된다. 따라서 \(a_{2n}=\sqrt{a_{n}A_{n}}\), \(A_{2n}=\frac{2A_{n}a_{2n}}{A_{n}+a_{2n}}\)이다. 

 외접 정육각형의 둘레 길이를 산출하기 위해 제곱근을 구한다든지, 또 기하평균을 구한다든지 할 때 아르키메데스가 쓴 계산법은 바빌로니아인의 것과 비슷했다. 아르키메데스의 계산 결과는 부등식 \(3\frac{10}{71}<\pi<3\frac{10}{70}\)으로 나타나는 \(\pi\)의 근삿값이다. 이 값은 이집트, 바빌로니아에서 쓰던 값 보다 좀 더 실제 값에 가깝다.

 이 결과는 '원의 측정에 관하여'논문의 명제 3에 실려 있다. 이 논문은 불완전한 형태로 전해지고 있는데 그 소논문에 실린 명제는 세 편 뿐이다. 그 중 하나는 원의 넓이는 원둘레를 한 변으로 하고 원의 반지름을 한 변으로 하는 직각삼각형의 넓이와 같음을 착출법으로 증명하는 명제이다. 그러나 이미 디노스트라투스가 원의 구적법에서 전제조건으로 이 정리를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르키메데스가 최초로 발견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참고자료: 
수학의 역사-상, (칼 B 보이어, 유타 C 메르츠바흐 지음), 양영오, 조윤동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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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kywalker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