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사/수학사(상)2022. 7. 9.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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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사 12-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3)

 

 

10 메나에크무스

 

 그리스에서는 스승에게서 제자로 전통을 계승하는 강한 유대관계가 있었다. 그래서 플라톤은 아르키타스, 테오도로스, 테아에테투스에게서 배웠고 플라톤의 영향을 차례로 에우독소스를 통해서 형제인 메나에크무스와 디노스트라투스에게 전해졌다.

 앞에서 (키오스의) 히포크라테스는 연비 \(\frac{a}{x}=\frac{x}{y}=\frac{y}{2a}\)로 표현되는 특성이 있는 곡선을 발견하여 사용이 가능해지면 정육면체의 배적이 가능해짐을 보였다.

 또한 그리스인이 새로운 곡선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 밖에 없었다. 따라서 메나에크무스는 원하는 특성이 있는 곡선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고, 그 뒤에 타원, 포물선, 쌍곡선으로 알려진 곡선군을 발견했을 것으로 보인다. 

 타원은 가장 눈에 잘 띄는 곡선이다. 그러나 메나에크무스는 다른 연구의 부산물로서 타원을 발견했다. 아마 델로스 문제(배적문제)를 푸는데 필요한 성질이 있는 포물선이나 쌍곡선을 찾는 과정에서 타원을 발견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꼭지각이 직각(생성각이 45도)인 직원뿔에서 시작해서, 그것을 모선에 수직인 평면으로 자를 때 원뿔의 겉면이 평면과 만나 생기는 곡선은 다음과 같음을 발견했다. 곧 이 곡선의 식은 현대의 해석기하학에서 \(y^{2}=lx\)(\(l\): 꼭짓점에서 절단평면까지의 거리를 나타내는 상수)이다. 메나에크무스가 어떻게 이런 성질을 이끌어냈는지는 모르지만. 초등 기하학의 정리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원뿔을 \(ABCD\)로 하고 그것을 원뿔의 모선 \(ADC\)에 수직인 평면(\(EDG\))으로 잘라 곡선 \(EDG\)를 얻는다고 하자. 그러면 그 곡선 위의 임의의 점 \(P\)를 지나 원뿔을 수평으로 자르는 평면은 단면을 원 \(PVR\)이 되게 한다. 

 점 \(Q\)를 곡선(포물선)과 원 \(PVR\)이 만나는 또 하나의 점응로 한다. 도형의 좌우대칭성으로부터 점 \(O\)에서 \(PQ+RV\)가 된다. 그러므로 선분 \(OP\)는 두 선분 \(RO\)와 \(OV\)의 비례중항이다.

 게다가 삼각형 \(OVD\)와 \(BCA\)는 닮은 삼각형(\(\because\,OD\perp AC\))이므로 \(\frac{OV}{DO}=\frac{BC}{AB}\)가 되고 또 삼각형 \(AR'D\)와 \(ABC\)도 닮았기 때문에 \(\frac{R'D}{AR'}=\frac{BC}{AB}\)가 된다.

 \(OP=y\), \(OD=x\)를 \(P\)의 좌표라 하면 \(y^{2}=RO\cdot OV=R'D\cdot OV\)를 얻는다. 같은 것을 구하여 바꾸어 놓으면 다음의 식을 얻는다.$$y^{2}=R'D\cdot OV=AR'\cdot\frac{BC}{AB}\cdot DO\cdot\frac{BC}{AB}=\frac{AR'\cdot BC^{2}}{AB^{2}}x$$여기서 선분 \(AR',\,BC,\,AB\)는 곡선 \(EQDPG\) 위의 모든 점 \(P\)에 대해 일정하므로 이 '직각 직원뿔 절단곡선'의 방정식은 \(y^{2}=lx\)가 된다. 

 비슷한 방법으로 '예각 직원뿔의 절단곡선(타원)'에 대해서는 \(y^{2}=lx-\frac{b^{2}x^{2}}{a^{2}}\), '둔각 직원뿔의 절단곡선(쌍곡선)'에 대해서는 \(y^{2}=lx+\frac{b^{2}x^{2}}{a^{2}}\)라는 식의 방정식을 얻는다. 여기서 \(a,\,b\)는 상수이고 절단평면은 꼭지각이 각각 예각, 둔각인 직원뿔의 모선에 각각 수직이다.

 메나에크무스는 원뿔곡선의 이러한 특성 말고도 다른 특성도 이끌어냈다. 여기서 다룬 방법이 좌표를 이용한 경우와 매우 비슷하기 때문에 이미 해석기하학을 발견했다고 이야기되었다. 그러나 그런 판단은 전적으로 옳다고 할 수 없는데 미지량이 둘인 방정식은 어떤 것이라도 어떤 하나의 곡선을 결정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지량이 있는 방정식이라는 일반적 개념은 그리스 사상과 맞지 않는 것이었다. 특히 대수기호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그리스 좌표기하학은 충분히 발달할 수 없었다. 

 

11. 정육면체의 배적

 

 메나에크무스는 정육면체의 배적문제를 푸는 데 필요한 곡선을 찾던 중 원뿔곡선을 알게 되었다. 현대 기호를 사용하면 배적문제의 해는 쉽게 구할 수 있다. 또 절단면(위 원뿔그림)을 옮기면 어떤 통경(수직지름)의 포물선도 만들 수 있다.

 이제 한 변이 \(a\)인 정육면체의 부피를 두 배로 하고자 할 때에는 직각 직원뿔 위에 통경이 \(a\)와 \(2a\)인 두 포물선을 먼저 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꼭짓점을 원점에 놓은 뒤 두 축을 각각 \(y\)축, \(x\)축으로 하면 두 곡선이 만나는 점의 좌표 \((x,\,y)\)는 연비 \(\frac{a}{x}=\frac{x}{y}=\frac{y}{2a}\)를 만족한다. 

 곧 \(x=(2a)^{\frac{1}{3}}\), \(y=(4a)^{\frac{1}{3}}\)이다. 따라서 이 \(x\)좌표가 구하는 정육면체의 한 변의 길이가 된다. 

 메나에크무스는 직각쌍곡선과 포물선을 이용해도 배적문제를 풀 수 있다는 것을 알고있던 것으로 보인다. 포물선 \(y^{2}=\frac{a}{2}x\)와 쌍곡선 \(xy=a^{2}\)를 같은 좌표평면에 놓으면, 교점의 좌표는  \(x=(2a)^{\frac{1}{3}}\), \(y=a(2)^{\frac{1}{3}}\)이고, 이 \(x\)좌표가 구하는 정육면체의 한 변의 길이가 된다.

 메나에크무스는 지금 널리 알려진 원뿔곡선의 성질도 여러가지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 가운데는 쌍곡선의 점근선도 있었다. 이 성질들을 이용하여 위에 기술한 바와 같이 현대적인 식에 맞는 작업을 했을 것이다.

 메나에크무스의 실제 업적은 전해지는게 거의 없지만 알렉산더 대왕을 가르쳤다는 것은 알 수 있다. 학생인 왕이 기하학을 배우는 지름길을 물어보자 그에 대한 답으로 "왕의 길과 백성의 길이 따로 있지만, 기하학에는 오직 하나의 길만 있을 뿐이다(기하학에 왕도는 없다)"라고 했다.

 메나에크무스가 원뿔곡선을 발견했다는 근거 중 하나는 에라토스테네스가 프톨레마이오스 3세 에우에르게테스에게 보낸 편지 때문이다. 

 

12. 디노스트라투스와 원의 정사각형화

 

 메나에크무스의 형제 디노스트라투스도 수학자였다. 형제 중 한 사람은 정육면체의 배적문제를, 다른 한 사람은 원의 정사각형화 문제를 풀었다. 히파아스의 삼등분선의 중점 \(Q\)의 두드러진 성질을 디노스트라투스가 한 번 주목하자 원적문제는 단순한 것이 되었다. 

 \(a\)를 정사각형 \(ABCD\)의 한 변으로 하며, 3등분선의 식이 \(\pi r\sin\theta=2a\theta\)일 때 \(\theta\)가 0에 가까워짐에 따라 \(r\)의 극한식은 \(\frac{2a}{\pi}\)가 된다\(\displaystyle\left(\lim_{\theta\,\rightarrow\,0}{\frac{\sin\theta}{\theta}}=1\right)\).

 파푸스가 이 문제에 제시한 증명은 디노스트라투스에게서 인용한 것이었고, 초등기하학의 사고방식에만 바탕을 둔 것이다. 디노스트라투스의 정리는 변 \(a\)는 선분 \(DQ\)와 원호 \(AC\)의 비례중항, 곧 \(\frac{\widehat{AC}}{AB}=\frac{AB}{DQ}\)라고 기술하고 있다.

 여기서 그리스의 간접증명법을 사용하여 몇 개의 대안을 소거하여 이 정리를 증명해보자.

 먼저 \(DR>DQ\)일 때 \(\frac{\widehat{AC}}{AB}=\frac{AB}{DQ}\)이라 가정한다. 그리고 중심이 점 \(D\)이고 반지름이 \(DR\)인 원이 삼등분선과 점 \(S\)에서, 정사각형의 변 \(AD\)와 점 \(T\)에서 만난다고 한다. 점 \(S\)에서 변 \(CD\)에 수선 \(SU\)를 내린다. 

 대응하는 원호의 비는 각 반지름의 비임을 디노스트라투스는 알고 있었기 때문에 \(\frac{\widehat{AC}}{AB}=\frac{\widehat{TR}}{DR}\)을 얻었다. 또 가정에서 \(\frac{\widehat{AC}}{AB}=\frac{AB}{DQ}\)이므로 \(\widehat{TR}=AB\)가 된다. 그러나 삼등분선의 성질의 정의에서 \(\frac{\widehat{TR}}{\widehat{SR}}=\frac{AB}{SU}\)이다. 따라서 \(\widehat{TR}=AB\)에서 \(\widehat{SR}=SU\)가 되어야 하나 이것은 명백한 잘못이다. 왜냐하면 수선 \(SU\)는 점 \(S\)에서 선분 \(DC\)에 그은 어떤 직선이나 곡선보다 짧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 \(\frac{AC}{AB}=\frac{AB}{DR}\)에서 제 4항의 선분 \(DR\)은 선분 \(DQ\)보다 크지 않다. 마찬가지로 \(DR\)이 \(DQ\)보다 작지 않는다는 것도 밝혀진다. 따라서 디노스트라투스의 정리는 증명되었다. 곧 \(\frac{\widehat{AC}}{AB}=\frac{AB}{DQ}\)이다.

 삼등분선과 선분 \(DC\)가 만나는 점이 주어지면, 위에서처럼 세 선분과 \(\widehat{AC}\)에 관한 비례관계를 얻을 수 있다. 비례식의 제 4항의 단순한 기하학적 작도도 원호 \(\widehat{AC}\)와 같은 길이의 선분 \(b\)는 쉽게 그릴 수 있다. 따라서 한 변이 2b이고 또 한변이 \(a\)인 직사각형을 그리면, 그 넓이는 바로 반지름 \(a\)인 원의 넓이와 같게 된다. 또 그 직사각형과 넓이가 같은 정사각형은 그 직사각형의 두 변의 기하평균을 정사각형의 한 변으로 하면 간단히 그릴 수 있다.

 그런데 디노스트라투스가 히피아스의 3등분선을 원적문제에도 이용할 수 있음을 보인 사실에서 이 곡선을 일반적으로 원적선이라 하게 되었고, 각각 삼등분이나 원적문제에 이 곡선을 이용하는 것은 '원과 직선만 허용된다'는 규칙에 위배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정해진 방법이든 변칙적인 방법을 이용하든 다른 풀이법을 구하려는 연구가 계속되었고, 그 결과 그리스 기하학자들은 몇 개의 새로운 곡선을 발견했다. 

 

13. 피타네의 아우톨리쿠스

 

 현재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그리스 수학 논문은 아우톨리쿠스의 작품이다. 아우톨리쿠스는 작은 논문 '움직이는 천국에 대해서'에서 천문학에 필요한 구면기하학의 초보적인 정리 정도의 내용을 담았는데 심원하지 않고 그다지 독창적인 것도 아니었다.

 주된 의의는 그리스 기하학이 고전시대의 전형으로 볼 수 있는 형태에 분명히 이르렀다는 것을 알려주는데 있다. 따라서 이 저자가 살던 시대(기원전 320년) 무렵의 그리스에는 이미 기하학 교과서의 전통이 완전히 확립되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14.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와 아우톨리쿠스는 같은 시대 사람이다. 에우독소스처럼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제자였고, 메니에크무스처럼 알렉산더 대왕의 스승이기도 했다. 그는 철학자이면서 생물학자였으나 수학자들의 활동도 완전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문 '나눌 수 없는 선에 대해서'는 신빙성에 의문이 있으나 아리스토텔레스 학파의 리케이움에서 있었던 논의에서 얻은 결과였을 것이다.

 이 논문의 주제는 플라톤의 뒤를 이은 아카데미의 수장 크세노크라테스가 신봉하는 불가분량의 학설은 지지할 수 없다는 것이다.

 불가분량 또는 최소의 길이와 넓이, 부피라는 무한소 개념은 여러 시대의 많은 사람들의 흥미를 끌어왓다. 크세노크라테스는 이 개념을 이용해서 제논의 역설과 같은 수학적, 철학적 사상에서 고민거리였던 많은 역설을 해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제논의 역설에 관심을 보였으나 상식을 토대로 반박하려고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당시 추상 개념이나 전문적 사항에 대하여 플라톤학파 수학자를 따르기로 망설였으므로, 그 주제에 대해 계속 이바지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전개한 논리의 근거와 방대한 저작에서 수학적 개념과 정리에 대한 잦은 언급을 보면 수학의 발전에 이바지했다고 할 수 있다. 

 산술이나 기하학에서 잠재적 무한과 실무한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수학의 기초에 대해 쓰려고 했던 뒤의 많은 저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수학자들은 "무한을 필요로 하지도 않고 사용하지도 않는다"는 그의 말은 무한은 수학자들의 낙원이라는 오늘날의 주장과 대비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업적으로 더욱 분명한 것은 수학에서 정의와 가정에 대한 분석이다.

 

15. 그리스 시대의 종말

 

 알렉산더 대왕이 기원전 323년에 죽음으로써 제국이 붕괴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를 떠난 다음해에 죽었다. 알렉산더 대왕의 통치 밑에서 그리스와 동양의 관습과 학문이 서서히 융합되어 '그리스풍(Hellenistic) 문명'이 생겨났다. 게다가 알렉산더가 세운 알렉산드리아는 수학의 중심지로 아테네를 대신했다. 그러므로 문명사에서는 그리스 세계를 두 시대로 나누는 것이 통례이고 아리스토텔레스와 알렉산더(데모스테네스 포함)가 거의 동시에 죽은 사건이 적당한 분기점이 된다. 그래서 앞의 시대를 그리스 시대, 다음 시대를 헬레니즘 시대 또는 알렉산드리아 시대라고 한다(그리스 수학의 황금시대).

 

참고자료:  
수학의 역사-상, (칼 B 보이어, 유타 C 메르츠바흐 지음), 양영오, 조윤동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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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kywalker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