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사/수학사(상)2022. 7. 8. 20:00
반응형

수학사 10-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1)

 

 

1. 교양 7과목

 

 영웅의 시대는 기원전 5세기가 중심이었으나 당시 수학의 발전을 나타내는 직접적인 자료는 거의 남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기원전 4세기 수학에 대한 직접적인 자료도 없다. 그러나 당시에 수학에 정통한 철학자들의 설명을 통해 이러한 자료의 부족 문제는 보충된다. 그 가운데서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의 거의 반이 현재 남아있다. 따라서 이 두 지적 지도자의 저서를 바탕으로 하여 영웅의 시대보다 훨씬 믿을만한 설명을 할 수 있다.

 아르키타스는 '영웅의 시대'의 수학자이나 어떤 의미에서 플라톤 시대의 수학에서 과도기적 인물이다. 그는 피타고라스 학파의 마지막 한 사람으로 실생활이나 수학에서 수는 대단히 중요한 것으로 믿었으나, 다가오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는 주로 약분불가능 문제로 인해 기하학을 우위에 두려고 했다. 

 한편 아르키타스는 일반 교양교육의 핵심으로서 4과, 곧 산술, 기하학, 음악, 천문학을 확립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견해는 오늘날까지 교육 사상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거의 2000년 동안 관습처럼 되었던 교양 7과목은 이 아르키타스의 4과와 문법, 수사학, 제논의 변증법이라는 3과이다. 

 따라서 영웅의 시대의 수학자들은 서구 교육의 전통, 특히 그 뒤 기원전 4세기의 철학자들을 통해 이어져 온 교육 전통의 방향 설정에 크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해도 무리가 없다.

 

2. 소크라테스

 

 기원전 4세기는 제논의 변증법적 방법을 사용하여 (아르키타스의) 피타고라스 주의를 배척했던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소크라테스)가 젊었을 때 2+2가 왜 2×2와 같은 지 그 까닭에 대한 문제나 아낙사고라스의 자연철학에 마음이 끌렸다고 한다. 그러나 수학도 과학도 사물의 본질을 알고자 하는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켜 줄 수 없다고 깨닫자마자 선(善)에 대한 독특한 연구에 몰두했다.

 수학의 발달에서 소크라테스의 영향은 실제로 있었다고 해도 무시할 수 있는 정도의 것이었다. 그러나 제자이며 숭배자였던 플라톤의 기원전 4세기 수학을 고취시켰던 인물이었다는 점은 더욱 뜻밖이다. 여기서는 기원전 399년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기원저 322년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죽음 사이의 기간에 살았던 테오도루스, 테아에테투스, 에우독소스, 메나이코무스, 디노스트라투스, 아우톨리쿠스 이 6명의 수학적 업적에 초점을 맞추겠다.

 

3. 플라톤의 입체

 

 플라톤 자신은 전문적인 수학의 성과라는 면에서는 눈에 띄는 특별한 업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수학 활동의 중심 존재로서 수학의 발전을 지도하고 고무했다.

 그의 학교 입구에는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이곳에 들어오지 말라'고 새겨 놓았다. 플라톤 학파의 수학에 대한 열정은 그를 수학자로서가 아니라 '수학자를 키우는 아버지'로서 명성을 높였다.

 플라톤이 수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기원전 388년 시칠리를 방문했을 때 만난 친구 아르키타스의 영향이었다. 그 곳에서 플라톤은 5개의 정다면체에 대해 알았을 것이다.

 이 5개의 정다면체는 몇 세기에 걸쳐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던 우주도형 가운데 엠페도클레스의 4원소와 관련이 있었다.

 정십이면체에 대해 피타고라스 학파가 가졌던 관심의 영향을 받아 플라톤은 다섯 번째의 마지막 정다면체를 우주의 상징으로 보았다. 

 이 발상의 대부분은 피타고라스 학파에 힘입은 것일 수 있다. 프로클레스는 피타고라스가 우주도형(정다면체)을 작도했다고 보지만 고전 주석자 수이다스는 플라톤의 친구 테아에테투스와 아티카의 부유한 귀족의 아들이 처음으로 그것에 대해 썼다고 한다. 유클리드의 원론 13권에 대한 주석(시대는 모름)에서는 5개 다면체 중 3개만이 피타고라스 학파에 의해 알려졌고, 정8면체와 정20면체는 테아에테투스에 의해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테아에테투스는 5개의 정다면체에 대하여 가장 철저하게 연구했고, '정다면체는 오직 5개만 존재한다'는 정리를 밝힌 것으로 보인다. 또한 원론의 정다면체의 각 모서리와 반지름의 비도 계산한 것으로 보인다.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그가 약분불가능성의 본질에 대해 소크라테스나 테오도로스와 논의하는 장면이 있고, 그 논의는 원론 10권의 앞머리에서 보이는 형태를 어느 정도 따른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는 약분 가능 또는 불가능한 양의 구별 뿐만 아니라 약분할 수 없는 길이를 제곱할 때 약분할 수 있게 되는 것(예: \(\sqrt{3},\,\sqrt{5}\))과 할 수 없게 되는 것(예: \(\sqrt{1+\sqrt{3}},\,\sqrt{1+\sqrt{5}}\))도 구별하고 있다. 

 

4. 키레네의 테오도로스

 

 플라톤의 대화편에는 또한 사람의 수학자가 있다. 그 수학자는 같은 약분 불가능론의 초기 발전에 공헌한 테오도로스이다.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sqrt{2}\)의 무리성에 대해서 당시로서는 가장 새로운 발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으나 그 가운데 3에서 17까지 완전제곱수가 아닌 정수의 제곱근의 무리성을 가장 처음 증명한 사람은 그(플라톤)와 테아에테투스의 스승이기도 한 테오도로스라고 한다. 

 그러나 무리성을 어떻게 증명했는지, 왜 \(\sqrt{17}\)에서 멈추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어쨌든 그 증명은 \(\sqrt{2}\)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증명방법을 따라서 했을 것이다. 그 증명은 원론 10권에 새로 써 넣었다. 고대 역사책을 참고하면 테오도로스는 초등 기하학에서 몇 가지 발견을 했고, 그 발견들은 원론에 수용되었으나 그의 저작은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5. 플라톤의 산술과 기하학

 

 플라톤은 수학의 역사에서 사람들은 고취하고 지도하는 일을 한 사람으로서 중요하다. 게다가 고대 그리스에서 (수의 이론이라는 의미에서) 산술과 계산술(계산의 기술) 사이에 명확한 구별도 그가 한 것으로 보인다. 플라톤은 상인과 군인에게 계산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한편 철학자는 "변화의 바다에서 불쑥 솟아 참(眞) 존재를 파악"해야 하기 때문에 산술가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플라톤은 대화편 '국가'에서 "산술은 의식을 높이는 매우 위대한 힘이 있다. 그 힘은 지성에게 추상 수에 대하여 추론하도록 한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와 같이 플라톤의 수에 대한 생각은 더 나아가 신비주의와 공상의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국가'의 마지막 권에서 어떤 수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그것을 '더 나쁜 태생과 더 나쁜 태생의 군주'라고 했다. 이른바 '플라톤 수'에 대한 여러 추측이 생겼는데 어떤 학설에서는 그 수를 \(60^{4}=12,960,000\)이라 하기도 한다. 이 수는 바빌로니아 수비학에서 중요한 수였는데(참고: 바빌로니아는 60진법을 사용한다), 아마 피타고라스 학파를 통해 플라톤에게 전해졌을 것이다. 또한 대화편 '법률'에서는 이상적인 국가의 시민의 수는 \(5040(=7!)\)이라고 했다. 이 수는 가끔 플라톤의 결혼수라고 했는데 플라톤이 어떤 까닭으로 그렇게 생각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이 있다.

 프랄톤은 산술에서 이론과 계산을 구분하는 간극을 본 것 처럼 기하학에서도 직공이나 기술자들의 유물적 견해와 대립하는 것으로 순수수학을 옹호했다.

 플루타르크는 저서 '마르켈루스'의 생애에서 기하학에 기계적 수단을 이동하는 것에 화를 내는 플라톤의 모습을 그렸다. 플라톤은 그러한 기계적 수단의 사용은 "기하학의 큰 장점을 없앨 뿐이다. 그 때문에 기하학은 순수 지성이라는 구체적이지 않은 대상에 대해서도 창피하게 등을 돌리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 기하학에서 작도를 자와 컴파스 만으로 한정하게 된 사실에 대해서 플라톤에게 큰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제한한 까닭은 직선과 원을 작도하는데 쓰이는 도구가 단순해서가 아니라, 도형이 대칭이기 때문일 것이다. 원에서 한 없이 많은 지름 중 어느 하나를 택해도 그 원의 대칭축이 된다.

 이데아를 신성시하던 플라톤의 철학은 기하학 도형 가운데에서도 특히 원과 직선에 대해 특별한 역할을 부여했다. 이것과 어느 정도 마찬가지로 플라톤은 삼각형을 찬미했다. 

 플라톤은 정십이면체에 대해 우주를 나타낸다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고, "신은 그것을 온 우주를 위해 사용했다"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남겼다(자서전 티마에수스).

 프랄톤은 티아에수스에서 첫 번째에서 네 번째까지의 정다면체를 전통적인 네 종류의 우주 원소와 결부하여 물질에 대해 뛰어난 통일 이론을 펼친다. 모든 물질은 이상적인 직각삼각형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그 이론이다. 타마에우스에서는 불활성 물질의 과학과 마찬가지로 생리학 전체도 직각삼각형에 바탕을 두었다.

 

6. 해석학의 기원

 

 피타고라스는 수학을 하나의 교양과목으로 확립했다고 여겨지나 플라톤은 그것을 정치가들의 교육과정에 필수과목으로 넣는 데 영향을 미쳤다. 플라톤은 전통적인 네 과목(4과)에 새로운 과목, 입체구적법을 꼭 추가하고 싶었다. 이는 입체기하학이 충분히 강조되지 않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또한 수학의 기초에 대해서도 논하고 몇 개의 정의를 명확히 하고, 가정을 다시 고치기도 했다. 그는 기하학에서 사용하는 추론은 그려 놓은 실제 도형이 아닌 이들 도형이 나타내는 절대적 개념에 적응된다고 강조했다.

 피타고라스 학파는 점을 '위치를 갖는 단위'로 정의했으나, 플라톤은 점을 오히려 직선의 시작으로 생각했다. 직선은 '그 위에 점이 고르게 놓여있다'는 개념과 마찬가지로 '폭이 없는 길이'라는 직선의 정의는 플라톤 학파에서 생긴 것으로 보인다.

 한편 산술에서 플라톤은 홀수와 짝수의 구별을 강조했을 뿐만 아니라 '짝수 곱하기 짝수', '홀수 곱하기 홀수', '홀수 곱하기 짝수'를 분류하는 것도 강조했다.

 이렇게 플라톤은 수학의 공리를 늘렸다고 하나 그의 생각의 전제에 대한 설명은 없다. 플라톤이 이룩한 수학적 업적은 거의 없다. 예를들어 피타고라스 수에 관한 공식$$(2n)^{2}+(n^{2}-1)^{2}=(n^{2}+1)^{2}\,(n\in\mathbb{N})$$에는 플라톤의 이름이 있으나 이 식은 바빌로니아인과 피타고라스 학파가 이미 알고 있던 결과를 조금 고쳤을 뿐이다.

 사실상 더 중요한 것은 해석학적 방법이 플라톤에게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논증 수학에서는 보통 공리나 공준에서, 특별한 경우에는 가까운 문제사항에서 논증을 시작한다. 여기서 한 걸음씩 나아가서 증명가능한 명제에 이른다.

 그에 대해서 플라톤은 전제에서 결론에 이르는 추론의 연결이 분명하지 않을 때 그 과정을 뒤집는 것이 교수법으로 적합하다고 지적한 것으로 보인다. 

 곧, 증명가능한 명제에서 출발하여 성립되는 결론을 그것으로부터 연역하는 것이다. 따라서 일련의 추론 과정에서 각 단계를 뒤집을 수 있다면, 명예를 올바르게 증명하는 결과를 갖는다. 

 그러나 사물을 분석적으로 보는 것이 유효하다는 것을 처음으로 인식한 사람이 플라톤은 아니라고 생각되는데 어떤 문제를 미리 검토해 보는 일 자체가 이미 분석적이기 때문이다. 

 플라톤이 정말로 한 일은 그 절차를 공식화한 것이다. 그것에 이름을 붙인 것이다. 

 수학사에서 플라톤의 역할에는 많은 논쟁거리가 있으나 수학 발전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음을 부인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플라톤의 아카데미는 세계 수학의 중심지었고, 기원전 4세기 중반에 지도적인 자리에 있었던 교사와 연구자들을 배출했다.

 

참고자료:  
수학의 역사-상, (칼 B 보이어, 유타 C 메르츠바흐 지음), 양영오, 조윤동 옮김

반응형
Posted by skywalker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