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사 7-영웅의 시대(1)
1. 활동의 중심지
그리스 수학의 기원에 대해서는 이오니아 학파와 피타고라스 학파 및 두 학파의 대표인 탈레스와 피타고라스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나 이들의 사상은 다음 시대에 만들어진 단편적 소문이나 구절을 토대로 재편성 한 것이다.
실제로 기원전 4세기의 플라톤 시대가 되기까지 수학 또는 과학에 관한 문서는 현재 전해지는 것이 없다. 그러나 기원전 5세기 후반에는 기하학에서 후세의 팔전에 기초가 된 문제에 강한 관심이 있던 소수의 수학자들에 의해 여러 연구 결과가 끊임없이 나왔다. 이 시기를 수학의 영웅시대(Hero Age of Mathematics)라고 한다.
수학 활동은 이제 더 이상 그리스 세계 양 끝 두 지역에만 한정되지 않고 지중해 전역에 퍼져 있었다.
지금의 남부 이탈리에에 타렌툼의 아르키타스, 메타폰툼의 히파수스, 트리키아의 아브데라에는 데모크리투스, 또 그리스 세계의 중심지에 가까운 아틱반도에 엘리스의 히피아스, 키오스의 히포크라테스, 클라조메네의 아낙사고라스, 엘레아의 제논 등 7명의 업적을 통해 수학에서 일어난 근본적 변화를 서술한다.
2. 클라조메네의 아낙사고라스
기원전 5세기는 서구 문명사에서 중요한 시기였는데 페르시아 침략자들이 패배함으로써 막을 열고, 아테네가 스파르타에 항복함으로써 막을 내렸다. 이 두 사건 사이에 문학과 예술에서 많은 성과를 올린 페리클레스의 황금시대가 있었다. 이 시기에 이오니아에서는 아낙사고라스처럼 실제적인 성향이 강한 사람들이 왔고, 남이탈리아에서는 제논처럼 형이상학적 성향이 강한 사람들이 왔다.
데모크리투스는 유물론적 세계관을 신봉한 반면 피타코라스는 과학, 철학에 대해 유심론적 태도를 취했다. 아테네에는 우주론에서 윤리학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학문의 여러 분야에 열중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자유롭고 대담한 탐구정신도 있었는데 이것은 기성의 사회관습과 충돌했다. 그 예로 아낙사고라스는 "태양은 신이 아닌 붉게 타는 돌이고, 달은 태양에서 빛을 얻는 사람이 사는 땅 덩어리"라고 주장해서 불경죄로 감옥에 갇혔다가 제자 페리클레스의 도움으로 나올 수 있었다.
아낙사고라스는 합리적 탐구정신의 대변자였는데 그가 우주의 본질에 관한 탐구를 삶의 목표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목표는 탈레스를 시조로 하는 이오니아 전통에서 아낙사고라스 자신이 끌어낸 중요한 것이었다.
아낙사고라스의 열정은 그의 저서 '자연에 관해서'라는 책에 반영되었고, 이 책은 과학서 최초의 베스트셀러였다.
그리스 과학은 고도의 지적 호기심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그리스 이전의 과학이 실리에 바탕을 두었다는 사실과 대조된다. 이러한 점에서 아낙사고라스는 전형적인 그리스적 동기인 '알고 싶다는 욕망'을 분명히 대변했다. 아낙사고라스는 원래 수학자라기보다 자연철학자였으나 그의 탐구정신은 다시 수학문제를 연구하도록 했다. 플루타르크에 따르면 아낙사고라스는 감옥에서 원을 정사각형으로 바꾸는 문제(원적문제)에 빠져 있었다고 한다. 이 문제의 기원이나 풀이법에 대해 이보다 자세한 것은 잘 알려지지 않았고, 그 뒤의 시대에 원의 넓이와 같은 정사각형을 자와 컴파스 만으로 작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알려졌다.
여기서 이집트인이나 바빌로니아인의 수학과 전혀 다른 수학을 보게 된다. 그것은 수의 과학을 생활체험의 한 면에 실제로 응용하는 수학이 아니라 근삿값의 정확도와 사고의 엄밀함 사이의 분명한 차이를 구분하는 이론적 문제를 규명하는 수학이다. 아낙사고라스가 생각한 수학문제는 기술자의 관심이 아니었다. 그리스 세계에서의 수학은 철학과 밀접했고,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3. 3대문제
아낙사고라스는 기원전 428년애 죽었다. 이 해는 아르키타스가 태어난 해이고, 플라톤이 태어나기 꼭 한해 전이고, 페리클레스가 죽은 지 한 해가 되는 해였다.
페리클레스는 전염병으로 죽었는데, 두 번째로 유명한 수학문제는 전염병에서 비롯되었다. 델로스 섬 아폴론 신전에 전염병을 막을 방법에 대해 물었는데 그 답으로 신전 제단의 부피를 두 배로 만들라는 신의 계시를 얻었다. 이 것은 '정육면체의 배적 문제'의 기원이고 이 문제를 '델로스 문제'라고 했다. 곧 정육면체의 한 변의 길이를 알 때, 컴파스와 자 만으로 두 배의 부피를 갖는 정육면체의 한 변을 작도하라는 문제이다.
거의 같은 시기에 '임의의 각을 컴파스와 자 만으로 3등분'하라는 문제가 널리 알려졌다. 이상의 세 문제 원적문제, 배적문제, 각의 3등분 문제는 3대 문제가 되었고, 2200년 후 모두 자와 컴파스 만으로 풀 수 없음이 증명되었다.
그렇지만 그리스 수학과 훨씬 뒤의 수학적 사고의 장점은 불가능을 극복하려는 노력이나 실패해도 풀이법을 수정하려는 노력에 있다. 영웅의 시대에는 기존의 풀이법으로는 당면한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으나 그 노력을 통해 다른 쪽에서 빛나는 성공을 거두었다.
4. 활꼴의 구적법
아낙사고라스와 비슷한 시대에 키오스의 히포크라테스(의사가 아니다)라는 사람이 있었고, 그는 기원전 430년 경 상인이 되어 고향을 떠나 아테네로 향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그가 탈레스만큼 빈틈없는 사람이 아니어서 비잔틴에서 사기로 전 재산을 잃었다고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해적들에게 당했다고 한다.
어쨌든 이 사건의 피해자인 히포크라테스는 이 일을 계기로 기하학 연구로 방향을 바꿨고, 훌륭하게 성공했다. 이 것은 영웅시대의 전형적인 이야기이다.
프로클로스는 히포크라테스가 '유클리드의 원론'보다 한 세기 앞서 '기하학 원리'를 썼다고 했으나 그 책은 오늘날 전해지지 않는다. 실제로 기원전 5세기의 수학 기록물 중 남아있는 것은 없다.
에우데무스가 쓴 수학의 역사(현재 전해지지 않음)에 따르면 히포크라테스의 업적 중 일부인 활꼴의 구적법을 다루었다. 활꼴(lune)은 반지름이 다른 두 원의 원호로 둘러싸인 도형이다. 활꼴의 구적문제는 원적문제에서 생겼고, 에우데무스는 다음 정리를 히포크라테스의 업적이라고 했다.
"서로 닮은 원의 조각의 비는 그 밑변 위에 만든 정사각형의 비와 같다."
히포크라테스는 먼저 두 원의 넓이의 비는 지름의 제곱의 비와 같다는 것을 밝히고 난 다음, 정리를 증명했다고 에우데무스는 전한다. 여기서 히포크라테스는 피타고라스 학파의 사상에서 큰 역할을 한 비례의 용어와 개념을 채택했다. 히포크라테스의 원의 넓이에 대한 정리는 곡선도형 구적법에 대해 그리스 세계에서 처음으로 이루어진 명확한 언명이다.
*원론의 1~2권은 피타고라스 학파, 3~4권은 히포크라테스의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다.
히포크라테스가 원의 넓이에 대한 정리를 증명했다면 간접증명법을 수학에 도입한 장본인일 것이다. 곧 두 원의 넓이의 비는 각각의 지름 위에 만든 정사각형의 넓이의 비와 같거나 또는 같지 않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간접증명법이란 그런 두 가지 가능성 중 두 번째에서 시작해 배리법(reductio ad absurdum)으로 첫 번째 가능성만이 옳음을 밝히는 증명방법이다.
히포크라테스는 먼저 직각이등변삼각형에 외접하는 반원에서 시작해 밑변(직각이등변삼각형의 빗변) 위에 직각삼각형의 다른 두 변 위의 원호와 닮은 원호를 작도했다.(아래그림)
각 활꼴의 넓이 비는 이것들의 밑변 위에 놓인 정사각형의 비이므로 직각삼각형에 피타고라스 정리를 적용하면 작은 두 활꼴의 넓이합은 큰 활꼴의 넓이와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AC\)위의 반원과 활꼴 \(ADCE\)의 차는 삼각형 \(ABC\)가 된다. 따라서 활꼴 \(ABCD\)는 정확히 삼각형 \(ABC\)와 같다. 그런데 삼각형 \(ABC\)는 \(AC\)의 반쪽 위에 만든 정사각형과 같다는 사실에서 활꼴의 구적법을 얻는다.
에우데무스는 역시 원에 내접하는 등변사다리꼴 \(ABCD\)를 사용한 히포크라테스의 활골의 구적법에 대해서도 기술하고 있다. 이 등변사다리꼴은 가장 긴 변(밑변) \(AD\)위의 정사각형은 길이가 짧은 세 변 \(AB\), \(BC\), \(CD\)위의 정사각형의 합과 같게 되는 사다리꼴이다.
따라서 한 변 \(AD\)위에 다른 세 변 위에 있는 원호와 닮은 원호 \(AED\)를 작도하면 활꼴 \(ABCDE\)는 사다리꼴 \(ABCDF\)와 같게 된다.
아프로디시아스의 알렉산더는 다음의 두 가지 구적법에 대해 기록했다.
(1) 직각이등변의 밑변과 직각을 낀 두 변 위에 반원을 그릴 때 삼각형의 넓이는 작은 변 위의 활꼴들의 넓이를 합한 것이고 (2) 반원에 내접하고 세 변이 같은 등변사다리꼴을 작도하고 세 개의 등변 위에 각각 반원을 그리면 사다리꼴의 넓이는 네 개의 곡선도형의 넓이, 곧 사다리꼴에서 밑변이 아닌 한 변에 생긴 활꼴의 넓이의 네 배로 된다.
이 두 번째의 구적법에서 활꼴과 넓이가 같은 정사각형을 작도할 수 있다면 반원(따라서 원도)과 같은 넓이의 정사각형을 작도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히포크라테스나 동시대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후계자들에게 용기를 주어 원은 마침내 정사각형으로 작도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했던 듯하다.
5. 연비례
히포크라테스의 구적법은 원과 넓이가 같은 정사각형의 작도를 시도했다기보다 당시 수준을 나타내는 지표로서 중요하다. 그의 구적법은 아테네 수학자들이 넓이와 비례의 변환을 다루는 데 정통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두 변이 \(a,\,b\)인 직사각형을 정사각형으로 변환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정사각형의 변의 길이로 \(a\)와 \(b\)의 비례중항, 곧 \(a:x=x:b\)일 때의 \(x\)를 작도했다. 따라서 두 양 \(a,\,b\)사이에 두 개의 평균을 넣어 이 문제를 일반화하려 했다.
두 선분 \(a,\,b\)가 주어졌을 때, \(a:x=x:y=y:b\,\left(\frac{a}{x}=\frac{x}{y}=\frac{y}{b}\right)\)인 다른 두 선분 \(x,\,y\)를 작도하려고 했다. 히포크라테스는 이 작도문제가 정육면체·배적문제와 동치라는 것을 알았다.
\(b=2a\)라 하면 이 연비에서 \(y\)를 소거하여 \(x^{3}=2a^{3}\)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히포크라테스가 활꼴의 구적법에서 연역한 것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3가지 견해가 있다.
1. 히포크라테스가 모든 활꼴은 그것과 넓이가 같은 정사각형으로 될 수 있고, 따라서 원도 가능하다고 믿고 있었다고 비난했다.
2. 히포크라테스가 발견한 것은 어떤 종류의 활꼴에 대해서만 성립하는 것이므로 자신의 업적의 한계를 알고 있었다고 보고 있다.
3. 히포크라테스는 원과 넓이가 같은 정사각형의 작도는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 성급한 것처럼 말해 사람들을 속이려 했다고 생각했다.
그 밖의 히포크라테스의 공헌에는 여러 의문이 있다. 예를 들자면 기하학 도형에 처음으로 문자를 사용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확인된 바가 없다.
3대 문제 중 각의 3등분을 제외한 두 문제에 상당한 진전을 보였다.
참고자료:
수학의 역사-상, (칼 B 보이어, 유타 C 메르츠바흐 지음), 양영오, 조윤동 옮김
'수학사 > 수학사(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학사 9-영웅의 시대(3) (0) | 2022.07.08 |
---|---|
수학사 8-영웅의 시대(2) (0) | 2022.07.07 |
수학사 6-이오니아와 피타고라스 학파(2) (0) | 2022.07.06 |
수학사 5-이오니아와 피타고라스 학파(1) (0) | 2022.07.06 |
수학사 4-메소포타미아(2) (0) | 2022.07.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