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사 8-영웅의 시대(2)
6. 엘리스의 히피아스
기원전 5세기 말에 아테네에서는 피타고라스 학파와 다른 교사집단이 번성했다. 피타고라스의 문하생에게는 자신의 지식을 타인에게 알려주고 보수를 받는 것을 금했다. 그러나 소피스트들은 시민을 지도하는 일을 하면서 돈을 받았다. 이들은 진정한 지적인 노력 뿐만 아니라 나쁜것을 좋게 보이게 하는 기술도 가르쳤다.
소피스트 중 기원전 5세기 후반 아테네에서 활약한 엘리스 사람 히피아스가 있었다. 히피아스는 수학에서 웅변술에 이르기까지 많은 저작을 남겼고(현재 어느것도 전해지지 않는다), 곡선을 수학에 최초로 도입했다. 다음은 히피아스의 삼등분선(또는 원적선)이다.
정사각형 \(ABCD\)에서 변 \(AB\)를 변 \(DC\)와 평행하게 하여 일정한 속도로 변 \(DC\)쪽으로 움직인다. 그리고 변 \(DA\)는 점 \(D\)를 중심으로 시계방향으로 일정한 속도(등각속도)로 회전하여 \(DC\)쪽으로 움직인다. 두 선분 \(AB\)와 \(DA\)는 동시에 변 \(DC\)에 닿는다. 여기서 어떤 시간에 움직이던 두 선분의 위치를 각각 \(A'B'\), \(DA''\)으로 하고, \(P\)를 \(A'B'\)와 \(DA''\)이 만나는 점이라 하면 \(P\)의 자취가 히파아스의 삼등분선, 곧 위 그림에서 곡선 \(APQ\)가 된다. 이 곡선을 그리면 각의 3등분은 쉬워진다.
예를들어 각 \(PDC\)를 삼등분하려 할 때는 선분 \(B'C\)와 \(A'D\)를 각각 점 \(R\)과 \(S,\,T\)와 \(U\)로 삼등분하면 된다. 선분 \(TR\)과 \(US\)가 삼등분선 \(AQ\)와 만나는 점을 각각 \(V,\,W\)라 하면 삼등분선의 성질에 의해 직선 \(VD\)와 \(WD\)는 각 \(PDC\)를 서로 같은 3개의 각으로 나눈다.
히피아스의 곡선은 주어진 원과 넓이가 같은 정사각형을 작도하는데도 쓰여서 원적선이라고도 불린다. 실제로 히피아스는 이 곡선을 이용한 원적법을 알고 있었으나 증명하지는 못했다.
크세노폰의 언행록에서는 히피아스를 역사와 문학에서 손재주나 과학에 이르는 모든 것에 대해 달인이라고 자인하는(스스로 인정하는) 인물이라고 평가한다. 그러나 그런 평가를 판단할 때 플라톤이나 크세노폰은 소피스트들과 대립함을 알아야 한다. 또 소피스트의 시조인 프로타고라스나 소피스트들과 반대 입장이었던 소크라테스도 모두 수학, 과학에 적대적이었다.
7. 필로라우스와 아르키타스
시파리스에서 온 피타고라스의 정적들이 크로톤을 기습해 여러 지도자를 죽인 사건이 있었다. 이때 필로라우스가 이 사건에서 살아남아 피타고라스 학파의 교의에 대한 책을 처음으로 썼고, 또한 책을 출판하는 허가를 받아 잃어버린 재산을 되찾을 수 있었다고 전한다.
플라톤이 피타고라스 학파의 교의에 대한 지식을 이 책으로부터 얻은 것으로 보인다. 피타고라스 학파의 특징인 '수에 대한 광신'은 필로라우스에게 이어졌는데 우주론 또한 이어졌다.
필로라우스의 우주 체계는 후에 피타고라스 학파인 에크판투스와 히케타스가 "중심불과 대지구의 개념을 포기하고 우주의 중심에서 자전하는 지구를 두어 밤과 낮을 설명하는 식"으로 수정했다.
숫자 숭배 부분도 약간의 수정이 있었는데 여기에는 필로라우스의 제자 아르키타스의 수정이 있었다.
아르키타스는 기하학보다 산술을 중시한다는 피타고라스 학파의 전통을 이어받았으나 그의 수에 대한 열정에는 필로라우스의 초기에 보이듯이 종교와 신비주의가 뒤섞이지는 않았다.
아르키타스는 산술, 기하, 소반대 평균을 음악에 응용하는 것에 대해 썼는데, 셋째 평균의 이름을 '조화평균'으로 바꾼 것은 필로라우스 또는 아르키타스로 보인다. 이에 관련한 아르키타스의 언급에는 "비가 \(n:n+1\)이 되는 두 정수 사이에 이들의 기하평균이 되는 정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견해가 있다. 아르키타스는 음악에 대해 선배들보다 더욱 주목했고, 어린이 교육에서 음악은 문학보다 큰 역항르 한다고 생각했다.
아르키타스는 교육과정에서 수학의 역할에도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수학의 네 과목 이름도 그가 붙인 것으로 보인다. 곧 산술(정지하고 있는 수), 기하(정지하고 있는 양), 음악(운동하고 있는 수), 천문학(운동하고 있는 양)이 그것이다. 이 네 과목은 문법, 수사학, 변증법으로 이루어진 세 과목과 함께 7교양과목이 되었다.
그러므로 수학이 교육에서 이룩한 두드러진 역학은 주로 아르키타스의 공이다.
8. 정육면체의 배적
종종 아르키타스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제곱근을 구하는 반복과정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오래 전에 사용되고 있었고, 아르키타스 자신은 수학에서 독창적 성과를 이룩한 공헌자였다.
여기에서 두 배로 만들 정육면체의 한 변을 \(a\)라고 하고, 점 \((a,\,0,\,0)\)을 반지름이 \(a\)인 서로 직교하는 세 원의 중심이라 하고, 각 원은 좌표축에 수직인 평면위에 있다고 하자. 다음으로 \(x\)축에 수직인 원을 단면으로 하는 꼭지점이 \((0,\,0,\,0)\)인 직원뿔을 그리고 \(xy\)평면 위의 원을 단면으로 하는 직원기둥도 만든다. \(xz\)평면 위의 원을 \(z\)축 둘레로 회전시켜 원환체를 만든다.
이렇게 만든 직원뿔, 직원기둥, 원환체 세 곡면의 방정식은 각각 \(x^{2}=y^{2}+z^{2}\), \(2ax=x^{2}+y^{2}\), \((x^{2}+y^{2}+z^{2})^{2}=4a^{2}(x^{2}+y^{2})\)이다. 이 세 곡면은 한 점에서 만나고, 이 점에서 직원기둥의 옆면을 따라 \(xy\)평면 위에 수직으로 내린 점과 원점 사이의 거리가 구하려는 정육면체의 한 변의 길이인데 그 값은 \(\sqrt[3]{2}a\)이다.
이 것은 아르키타스의 풀이에 해석기하를 적용한 것이다.
플라톤은 한평생 피타고라스 학파의 특징인 수와 기하학의 숭배에 깊이 빠졌고, 아르키타스는 플라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전제군주 디오니소스와 중재했다. 기원전 4세기에 아테네가 수학에서 우위를 차지했던 것은 '수학자를 길러내는 사람'이라고 했던 플라톤의 열의 때문이었다.
*피타고라스 학파의 일원인 히파수스는 다음의 세 가지 이유로 추방되었다고 한다.
1. 보수적인 피타고라스 학파의 방식에 반항해 민주운동의 선두에 섰다.(정치적 불복종)
2. 정오각형이나 정십면체의 기하학에 관련된 것(작도)을 폭로했다.
3. 약분할 수 없는 양의 존재(\(\sqrt{2}\))를 폭로했다.
9. 약분불가능성
피타고라스 학파의 기본적인 교의는 인간을 둘러싼 현실적이고 이론적인 것만이 아니라 기하학에서도 모든 사물의 본질은 수(arithmos, 계산하는 수), 곧 자연수 또는 그 비(ratio)의 본질적인 특성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교의를 부정하는 수가 발견되었다. 이것은 기하학에서 정수나 그것의 비 만으로는 단순한 기본 성질조차 설명하지 못한다는 사실의 발견이었다.
이러한 수를 기원전 5세기 말 사반세기 초의 히파수스가 또는 약 반세기에 발견되었다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사각형의 빗변(맞모금)과 한 변이 약분될 수 없음을 보였고, 그 증명은 홀수와 짝수를 구별하는 것에 바탕을 두었다.
\(d,\,s\)를 각각 정사각형의 빗변, 한 변이라 하고 약분할 수 있다고 하자. 곧 비가 유리수 \(\frac{d}{s}\)와 같고, \(\frac{d}{s}=\frac{p}{q}\)(\(p,\,q\)는 서로소인 정수)라고 하자. 피타고라스 정리에 의해 \(d^{2}=s^{2}+s^{2}=2s^{2}\)이므로 \(\left(\frac{d}{s}\right)^{2}=\frac{p^{2}}{q^{2}}=2\), 곧 \(p^{2}=2q^{2}\)가 된다. 그러므로 \(p^{2}\)는 짝수이어야 하고 따라서 \(p\)도 짝수여야 한다. 결과로 \(q\)는 홀수이어야 한다. 그래서 \(p=2r\)이라 하여 \(p^{2}=2q^{2}\)에 대입하면 \(4r^{2}=2q^{2}\), 곧 \(q^{2}=2r^{2}\)이 된다. 그러므로 \(q^{2}\)도 짝수가 되고, 따라서 \(q\)도 짝수가 된다. 그러나 \(q\)는 위에서 말한대로 홀수이다. 그런데 정수는 홀수이면서 동시에 짝수일 수없다. 따라서 \(d\)와 \(s\)가 약분될 수 있다는 가정은 거짓이라는 사실이 간접증명법으로 증명된다.
10. 황금분할
위의 증명은 너무 추상적이어서 약분불가능성이 처음 발견되었을 때의 근거가 될 가능성은 의문스럽다. 그러나 다른 방법으로 발견했을수도 있다. 다음의 정오각형에서
다섯 개의 빗변을 그어 더 작은 정오각형을 만든다. 이 과정을 반복해서 작은 옥가형을 만들 수 있고, 정오각형의 빗변의 비가 유리수가 아니라는 결론을 얻는다.
위 직선 그림은 황금분할이 몇 번이라도 계속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이 비는 무리수이다. 이때 여기서 약분되지 않는 값을 \(\sqrt{5}\)인데, 등식 \(a:x=x:a-x\)로부터 정오각형의 변과 빗변의 비로서 \(\frac{\sqrt{5}-1}{2}\)가 유도되기 때문이다. 정육면체의 빗변과 변의 비는 \(\sqrt{3}\)이다.
오각형의 빗변과 변의 비에 대한 증명과 비슷한 기하학적 증명이 정사각형의 빗변과 변의 비에 대해서도 적용될 수 있다.
곧 정사각형 \(ABCD\)((위 그림)에서 빗변 \(AC\)위에 \(AP=AB\)가 되도록 점 \(P\)를 잡은 뒤, 그 점에서 수선 \(PQ\)를 그으면 \(CQ:PC=AC:AB\)가 된다. 다시 선분 \(CQ\)위에 \(QR=QP\)가 되는 점 \(R\)을 나타내고 선분 \(CR\)에 수직인 \(RS\)를 그으면 빗변과 변의 비는 앞에서 얻은 값과 같다.
이 과정도 무한히 계속되기 때문에 길이의 단위가 아무리 작아도 각각 이등변삼각형의 빗변과 한 변의 비를 약분할 수 없음이 증명된다.
11. 제논의 역설
'수는 온 우주의 근원'이라는 피타고라스의 교의는 심각한 문제에 직면했고, 그것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피타고라스 학파는 철학상의 경쟁상대인 엘레아 학파가 내놓은 논의에도 맞서야 했기 때문이다.
소아시아의 이오니아 학파 철학자들은 만물의 근원을 확인하려고 계속 연구했다. 탈레스는 이 것을 물에서 구하려 했으나 다른 사람들은 공기나 불을 기본 원소로 생각했다. 피타고라스 학파는 더욱 추상적인 방향으로 나아가 수가 대단히 많다는 사실에서 수는 현상 뒤에 숨은 기본 물질이라는 가설을 세웠다. 이 수를 바탕으로 한 원자론은 도형수의 기하학에서 훌륭히 묘사되었으나 엘레아의 파르메니데스 추종자들의 공격을 받았다. 이 엘레아 학파의 기본 교의는 존재의 단일성과 영속성이었는데 이것은 피타고라스 학파의 다수성과 변화의 사상과 대조적인 견해였다.
파르메니데스의 제자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다수성과 분할 가능성의 개념의 모순을 입증하기 위한 논의를 시작한 제논이다.
제논의 방법은 변증법인데, 그런 간접증명법에서 소크라테스에 앞섰다. 그것은 상대방이 주장하는 전제에서 시작해 그 전제가 불합리함을 이끌어내는 방법이다.
피타고라스 학파는 공간과 시간이 각각 점과 순간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가정했다. 그러나 동시에 공간과 시작은 정의보다도 직관으로 쉽게 알 수 있는 '연속성'이라는 또 하나의 성질이 있다고 가정했다.
다수를 만드는 근본 요소는 한편으로는 기하학의 단위, 곧 점의 특징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수 단위, 곧 수의 특징이 있다고 가정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런 피타고라스 학파의 사고에 따른 점을 '위치를 갖는 단위' 또는 '공간에서 생각되는 단위'라고 표현했다. 제논이 역설을 내놓게 된 것은 이상의 학설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전해진다. 이 가운데 운동에 관한 역설을 자주 인용한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역설은 아리스토텔레스나 다른 학자들을 통해 전해진 것이고, 이 중 (1) 이분법, (2) 아킬레스, (3) 화살, (4) 스타디움 이 가장 활발한 논의를 불러일으켰다.
(1)은 다음과 같다. 곧 움직이는 물체가 일정 거리에 도달하기 전에 그 거리의 반을 가야만 한다. 그러나 그 물체는 반에 도달하기 전에 처음 거리의 \(\frac{1}{4}\)을 가야 하고, 역시 그 전의 처음의 \(\frac{1}{8}\)지점에 도달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그 물체는 무한개로 나뉜 작은 부분에 도달해야 한다. 그러므로 출발하려는 사람은 유한 시간안에 무한지점에 도달해야 한다. 그러나 무한집한의 원소를 모두 거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운동은 시작될 수 없다.
(2)는 무한대로 나뉜 작은 부분이 후퇴하지 않고 전진한다는 점을 제외하면 (1)과 닮았고,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킬레스가 먼저 출발한 거북이와 경주하는 것인데, 아킬레스가 아무리 빨리 달리고 또한 거북이가 아무리 늦게 달린다 해도 아킬레스는 결코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다. 왜냐하면 아킬레스는 거북이가 간 지점에 다다르면 거북이는 조금 더 앞서 나가 있기 때문이다. 거북이가 앞서 나간 그 거리까지 아킬레스가 다 뛰어갔을 때 거북이는 또 조금 더 앞으로 나가 있을 것이다. 이 과정은 한 없이 계속될 것이기 때문에 발 빠른 아킬레스라도 느린 거북이를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분법과 아킬레스의 역설을 통해 보면 공간과 시간의 무한 분할가능성을 가정하고서는 운동은 불가능하다. 한편 '화살'과 '스타디움'의 역설에서는 위의 반대의 가정 곧, 공간과 시간은 그 이상 분할되지 않는다는 설을 세워도 마찬가지로 운동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제논의 논의는 그리스 수학의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 영향은 약분할 수 없는 양의 발견이 가져다 준 영향과 맞먹을 정도이다. 피타고라스 학파는 원래 양을 조약돌(calculi, 이것에서 계산(calculation)이라는 말이 나왔다)로 나타내고 있지만 유클리드 시대에는 관점이 완전히 바뀌었다. 양은 일반적으로 수나 조약돌이 아닌 선분과 관련지어졌다.
원론에서도 정수조차도 선분으로 나타내고 있다. 수의 영역은 이전의 이산적 성질(조약돌)을 계속 유지했지만, 연속량의 세계(이 세계는 그리스 이전의 수학과 피타고라스 학파의 수학의 대부분을 포함)가 되면 수와 별개로 기하학적 방법으로 다루어야 했다. 이것은 아마 영웅의 시대에 이루어낸 가장 원대한 결말이었다.
참고자료:
수학의 역사-상, (칼 B 보이어, 유타 C 메르츠바흐 지음), 양영오, 조윤동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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