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사/수학사(상)2022. 7. 9. 08:00
반응형

수학사 11-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2)

 

 

7. 크니도스의 에우독소스

 

 플라톤의 청년시대에는 약분불가능량의 발견이 명백한 논리학상의 문제를 일으켰는데 그 까닭은 약분불가능량이 비례와 관련된 정리에 큰 혼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예를들어 정사각형의 빗변과 변과 같은 두 양의 비(\(\sqrt{2}:1\))를 정수와 정수의 비로 나타낼 수 없을 때 이들 두 양은 약분불가능하다고 한다. 

 분명히 그리스 사람은 네 개의 양 \(a,\,b,\,c,\,d\)에서 두 개의 비 \(a:b=c:d\)에 똑같은 호제법이 적용된다면, 그것들은 비례관계 \(a:b=c:d\)에 있다는 생각을 이용했던 것 같다.

 그러나 당시에 이런 정의를 사용하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따라서 유클리드의 원론 5권에서도 쓰이는 명확한 비례론의 발견은 에우독소스의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단 '비'라는 말은 그리스 수학에서 본질적으로 정의되지 않은 개념이었다. 왜냐하면 같은 종류의 두 양 사이의 크기에 관련된 어떤 관계로서 비에 관한 유클리드의 '정의'는 정의로서는 너무 불충분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은 두 양이 있을 때 "어떤 한 양의 배수가 다른 양을 초과하면 두 양에는 비가 존재한다"는 유클리드의 명제이다. 이 명제는 본질적으로 '아르키메데스의 공리'와 같다. 아르키메데스 자신은 에우독소스가 위의 성질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에우독소스의 비의 개념은 0을 배제하여 같은 종류의 양으로 정의되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선분과 높이, 넓이와 부피는 서로 견줄 수 없다). 비에 대한 이러한 예비사항들을 서술한 뒤, 유클리드는 제 5권의 정의 5에서 에우독소스가 내린 유명한 비의 정의를 다룬다.

 

 "첫째 양과 셋째 양에 같은 배수를 취하고 둘째 양과 넷째 양에 같은 배수를 차례로 취할 때 앞(첫째, 셋째)의 양의 배수가 각각 모두 뒤(둘째, 넷째)의 양의 배수와 견주어서 크거나 같거나 작으면, 첫째 양의 둘째 양에 대한 비와 셋째 양의 넷째 양에 대한 비는 같다고 한다" -원론- 

 

곧 \(m,\,n\)을 정수라고 할 때, 네 개의 양 \(a,\,b,\,c,\,d\)에 대하여 '\(ma<nb\)이면 \(mc<nd\)'이거나 '\(ma=nb\)이면 \(mc=nd\)'이거나 '\(ma>nb\)이면 \(mc>nd\)' 이 셋 중 어느 하나가 항상 성립하면 \(\frac{a}{b}=\frac{c}{d}\)이다.

 에우독소스의 비의 상동에 대한 정의는 오늘날 분수에 사용되는 교차 곱의 과정 '\(ad=bc\)이면 \(\frac{a}{b}=\frac{c}{d}\)'와 다른 것이 아니고 통분에 해당하는 과정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사실 그 정의는 19세기의 실수의 정의와 그렇게 동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유리수 \(\frac{m}{n}\)의 종류를 \(ma\leq nb\)이나 \(ma>nb\)에 따라 두 범주로 구별하고 있다. 유리수는 무한히 많이 존재하므로 그리스인은 스스로 피하고 싶었던 개념인 무한집합의 개념에 모르는 사이에 직면하고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비례를 포함하는 정리는 만족할 만큼 증명할 수 있게 되었다.

 

8. 착출법

 

 약분불가능량으로 생긴 위기는 에우독소스에 의해 성공적으로 해결되었으나 직선도형과 곡선도형의 비교 문제이다. 여기서 그 문제의 열쇠를 제공한 자가 에우독소스로 보인다. 

 초기 수학자들은 곡선도형에 다각형을 내접, 외접시켜서 변의 수를 무한히 증가시키려 했으나 그 당시에는 극한의 개념이 알려지지 않아서 그 논쟁을 어떻게 결론지어야 할 지 몰랐다.

 아르키메데스에 따르면 오늘날 아르키메데스의 이름이 붙은 공리(연속성 공리라고도 한다)를 고안한 사람은 에우독소스이다. 이 공리는 적분의 그리스 판이라고 할 수 있는 착출법(method of exhaustion, 또는 실진법)의 기초로 쓰였다.

 이 공리는 "비를 갖는 두 양(둘 다 0이 아니다)이 있을 때 어느 한 쪽을 정수배하여 다른 쪽보다 크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명제에서는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선분이나 무한소에 대한 모호한 논의는 피했다. 이것은 뿔 모양의 각(주어진 곡선과 그 위의 한 점에서 그은 접선이 이루는 각)과 보통각의 비교를 제외했다. 뿔 모양의 각은 0과 다른 양으로 생각되었으나 직선으로 이루어진 각의 척도에 대해서는 에우독소스의 공리를 만족하지 못했다.

 '배리법'으로 에우독소스(또는 아르키메데스)의 공리로부터 (그리스의) 착출법의 기초가 된 명제를 증명하는 건 쉽다.

 "임의의 어떤 양에서 반 이상(또는 정확히 반)을 없애고 그 나머지에서 그 반 이상(또는 정확히 반)을 없애고 이런 과정을 계속하면 결국에는 주어진 양에서 어떤 작은 양보다도 작은 어떤 양이 남을 것이다."

 착출성(exhaustion property)이라는 이 명제는 유클리드 원론 10권 명제 1과 같은데 현대식으로 표현을 바꾸면

 "어떤 양 \(M\)이 주어져 있고, 그와 같은 종류의 양 \(\epsilon\)이 있다면, \(r\)이 \(\frac{1}{2}\leq r<1\)일 때, 모든 \(n>N\)에 대하여 \(M(1-r)^{n}<\epsilon\)이 성립하는 양의 정수 \(N\)을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곧 착출성은 \(\displaystyle\lim_{n\,\rightarrow\,\infty}{M(1-r)^{n}}=0\)이라는 현대식 표현에 해당한다.

 게다가 그리스인은 이 성질을 이용하여 곡선도형의 넓이와 부피에 관한 정리도 증명했다. 특히 아르키메데스에 의하면 원뿔의 부피는 밑면과 높이가 같은 원기둥 부피의 \(\frac{1}{3}\)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만족할 만하게 증명한 사람은 에우독소스로 추정된다.

 원의 넓이는 그 원에 정다각형을 내접시켜 변의 수를 한없이 늘려 착출될 수 있다고 믿었으나 에우독소스의 착출법을 통해 처음으로 엄밀한 절차가 만들어졌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착출법'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에우독소스가 이 착출법을 실제로 이용했다고 생각되는 논법의 보기로서 원의 넓이의 비는 원의 지름 위의 각 정사각형의 넓이의 비와 같다는 증명을 현대의 기호를 사용하여 나타낸다.

 유클리드의 원론 12권의 명제 2에서 제시한 증명은 아마 에우독소스의 증명일 것이다.

 원 \(c\)와 원 \(C\)의 지름을 각각 \(d\)와 \(D\), 넓이를 \(a\)와 \(A\)로 한다. \(\frac{a}{A}=\frac{d^{2}}{D^{2}}\)를 증명하고자 한다.

 간접증명법에 의해 다른 가능성 \(\frac{a}{A}<\frac{d^{2}}{D^{2}}\)와 \(\frac{a}{A}>\frac{d^{2}}{D^{2}}\)가 성립하지 않음을 보이면 증명은 끝난다. 

 먼저 \(\frac{a}{A}>\frac{d^{2}}{D^{2}}\)라 하자. 그러면 \(\frac{a'}{A}=\frac{d^{2}}{D^{2}}\)를 만족하는 양 \(a'(<a)\)이 존재할 것이고 \(\epsilon=a-a'>0\)이라 한다.

 원 \(c\)와 원 \(C\)안에 넓이가 각각 \(p_{n},\,P_{n}\)인 정\(n\)다각형을 내접시키고, 다각형의 바깥쪽과 원의 안쪽에 있는 틈새를 생각한다. 

여기서 변의 수를 두 배로 하면 이 틈새의 넓이가 반 이상 줄어드는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착출성에 의해 변의 수를 차례로 두 배씩 늘려가면(\(n\)을 증가시키면), \(a-p_{n}<\epsilon\)이 될 때까지 틈새의 넓이를 줄일 수 있다. 그런데 \(a-a'=\epsilon\)이므로 \(p_{n}>a'\)이 된다. 그런데 앞 정리에서 \(\frac{p_{n}}{P_{n}}=\frac{d^{2}}{D^{2}}\)임이 밝혀지고, 또 \(\frac{a'}{A}=\frac{d^{2}}{D^{2}}\)이 가정되었기 때문에 \(\frac{p_{n}}{P_{n}}=\frac{a'}{A}\)가 된다.

 그러므로 이미 증명한 바와 같이 \(p_{n}>a'\)이라면 \(P_{n}>A\)라고 결론내리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P_{n}\)은 넓이 \(A\)인 원에 내접하는 다각형의 넓이이므로 \(P_{n}<A\)이어야 한다. 

 잘못된 결론은 잘못된 전제로부터 나오므로 \(\frac{a}{A}>\frac{d^{2}}{D^{2}}\)일 가능성이 없음이 밝혀졌다. 마찬가지로 \(\frac{a}{A}<\frac{d^{2}}{D^{2}}\)일 가능성이 없다는 것도 밝혀진다. 따라서 원의 넓이의 비는 각 지름 위의 정사각형의 넓이의 비와 같다는 정리는 증명되었다. 

 

9. 수리천문학

 

 에우독소스는 과학사에서 천문학의 아버지로서도 알려져 있다. 플라톤은 자신의 아카데미 회원들에게 태양, 달, 5개 행성의 운동을 기하학적으로 표현해 보자고 제안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때 이 운동들은 모두 한결같은 속도로 움직이는 원운동으로 구성되어야 한다는 것이 확실히 암묵적으로 가정되었다. 이러한 제약에도 불구하고 에우독소스는 7개의 천체 각각의 운동을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할 수 있었다.

 에우독소스는 각 천체의 운동이 지구를 중심으로 하는 동심구이면서 반지름이 다른 천구 몇 개의 회전의 합성으로 생긴다고 했다. 이때 각 천구는 다음의 더 큰 천구의 표면에 대해 고정된 축 둘레를 같은 속도로 회전한다. 그리고나서 각 행성에 대해 각각 다른 천구에 의한 회전계를 구체적으로 제시했고, 이 회전계를 동심천구계(homocentric sphere)라고 불렀다.

 이상 서술한 기하학적 천구체계는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아리스토텔레스 학파의 그 유명한 투명 천구체계와 통합되어 거의 2000년 동안 사람들의 우주관을 지배했다.

 에우독소스의 수학적 저작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지구의 둘레를 400,000스테이드(stade), 곧 약 6,400km로 계산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어림값도 에우독소스의 계산값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아르키메데스는 에우독소스가 태양의 지름을 지구의 9배가 된다고 계산했다고 하기 때문이다. 에우독소스는 자신이 생각한 천구체계에 따라 히포페데(말의 차꼬)로 알려진 곡선을 따라 고리 모양의 궤도를 움직이는 행성운동도 원운동의 조합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당시는 곡서을 새롭게 정의하는 방버이 두 가지 밖에 없었다.

 

1. 일정한 속도로 운동하는 것 끼리의 결합

2. 낯익은 기하학 도형의 곡면끼리의 교차

 

에우독소스의 히포페데는 1, 2중 어느 것으로도 만들 수 있는 곡선의 좋은 보기이다. 에우독소스가 유명해진 까닭은 비례론과 착출법 때문이다.

 

참고자료:  
수학의 역사-상, (칼 B 보이어, 유타 C 메르츠바흐 지음), 양영오, 조윤동 옮김

반응형
Posted by skywalker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