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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인] 정주영



파일:정주영 회장.jpg

(정주영, 1915년 11월 25일 출생~ 2001년 3월 21일 사망)


정주영(鄭周永)은 대한민국 현대그룹의 창업주로 1915년 11월 25일에 일제강점기 강원도 통천군 아산리에서 정봉식과 한성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농사꾼이었고, 할아버지는 서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훈장이였다. 호는 아산(峨山)으로 고향 지명인 통천군 아산리에서 유래한 것이다.

소학교(지금의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3년간 할아버지의 서당에서 천자문(千字文), 동몽선습(童蒙先習), 소학(小學), 대학(大學), 맹자(孟子), 논어(論語)를 배우고, 무제시, 연주시, 당시도 배웠다. 

소학교에 입학했을 때 1학년에서 3학년으로 월반을 했고, 붓글씨 쓰기와 창가(唱歌)를 잘 못해서 2등이었다. 소학교에 입학하면서 방학이나 일요일은 물론 학교 공부가 끝난 방과 후부터 밤늦도록 아버지 옆에서 농사일을 배우며 도왔다. 

소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아버지를 도와 농사일을 했으나 동네 구장댁에 배달되던 '동아일보'를 읽고, 도시로 나가기 위해 가출을 결심한다. 

동아일보에 연재되는 소설 '흙'의 주인공 허숭 변호사에 감동해서 가출했을 때 변호사가 되겠다고 보통고시(지금의 사법고시-폐지됨)를 보았으나 낙방했다.

처음 가출했을 때는 고원(高原)의 철도공사판에서 일을 했으나 아버지가 그 공사판으로 찾아오는 바람에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어 첫 가출은 실패했다. 두 번째 가출때는 금화에서 일을 했으나 아버지가 찾아와서 실패로 끝났고, 세 번째에는 소 판 돈 70원을 훔쳐서 서울 덕수궁 옆에 있었던 경성실천부기학원에서 부기를 공부하다가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어 세 번째 가출도 실패로 끝났다. 이때 

세 번째 가출이 실패하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열심히 아버지를 도와 농사를 지었으나 흉년이 들었다. 


이에 19살이 되던 해 늦은 봄에 고향 친구인 오인보(吳仁輔)에게 돈을 빌려 함께 서울로 갔고, 또 한번 50전을 빌려 인천으로 가 인천부두에서 노역을 했다. 인천부두에서 죽도록 노동을 했지만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의 돈만 벌렸고, 다시 걸어서 서울로 올라갔다. 

인천 부둣가의 노동자 합숙소에는 빈대가 들끓었고, 빈대를 피하기 위해 긴 탁자 위에서 잠을 잤으나 빈대는 탁자 다리를 올라왔고, 이에 탁자 다리를 물이 담긴 냄비에 담그고 잠을 잤으나 이번에는 천장으로 올라가 뛰어내렸다. 이렇게 빈대에게서 "무슨 일이든 절대로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죽을 힘을 다한 노력만 쏟아부으면 이루질 못할 일이 없다"는 교훈을 배웠다.

서울로 올라가던 중 소사(지금의 경기도 부천)에 있는 어느 농가에서 품앗이 일꾼으로 일을 하고, 서울로 돌아와 보성전문학교(지금의 고려대학교) 교사(校舍) 신축공사장과 풍전엿공장에서 일을 했다. 엿공장에서 1년을 보냈는데 돈이 안모아지고, 기술도 제대로 가르쳐 주지 않아서 그만두고 쌀가게 복흥상회(福興商會) 배달원으로 취직했다.

복흥상회는 안정된 직장이었고, 점심, 저녁이 제공되는 데다가 월급이 쌀 한 가마니였다. 가게의 쌀과 잡곡이 뒤죽박죽으로 놓여서 쌀은 쌀대로, 잡곡은 잡곡대로 정리하고, 쌀, 콩, 팥이 몇 가마 있는지 파악이 가능하게 정리했다. 

취직하던 날 복흥상회의 주인은 자전거를 탈 줄 아냐고 물었고, 타본 적이 있어서 탈 수 있다고 답했다. 취직한 지 4일 째 되던 날 쌀 한 가마와 팥 한 되를 왕십리의 주인 집으로 자전거로 배달해야 했는데 이 날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배달하던 도중 쓰러져서 쌀 가마니와 팥 자루에 진창이 묻어 엉망이 되었으나 주인아주머니는 오히려 격려해 주었다. 그날 밤 선배 배달꾼에게 자전거 쌀 배달의 기술과 요령을 배워 4일 동안 거의 밤잠을 안 자고 배달연습을 했다. 쌀 가마는 세워서 싣고, 자전거에 비끄러매서는 안된다는 요령을 터득했다. 그 후 한꺼번에 쌀 두 가마를 싣고 자전거로 빠르게 배달할 수 있었다.

3년이 지나자 1년 월급이 쌀 20가마가 되었고, 그때에 고향집에 안부편지를 썼다.

부기학원에서 배운 부기실력으로 복흥상회의 주인의 신임을 얻었고, 주인의 아들은 주색잡기에 빠져 재산을 탕진하곤 했다. 이에 쌀가게 주인은 가게를 인수할 의향이 없냐는 제안을 받았고, 가게를 인수해 '경일상회(京一商會)'로 간판을 걸고 24살에 쌀가게 사장이 되었다.


그러나 1937년 노구교 사건으로 발발한 중일전쟁으로 인해 총독부의 전시체제령이 내려졌고, 그로 인해 쌀 가게를 시작한 지 2년만인 1939년 12월에 쌀 배급제가 실시되면서 쌀가게 문을 닫아야 했다. 가게를 정리하고 번 돈의 일부를 갖고 고향으로 가서 아버지께 논 2천평을 사드리고 변중석(邊仲錫)과 혼인을 했고, 다시 서울로 돌아왔는데 이때 수중에 7~800원이 있었다.

이 무렵에 경성공업사에 다니던 엔진기술자 이을학으로부터 아현동에 '아도 서비스(art service, 현대자동차와 현대건설의 전식)'라는 자동차 수리공장이 매물로 나와있음을 알게 되었고, 이을학의 돈과 사채업자 오윤근으로부터 3,000원의 빚을 져 아도서비스를 인수하고 자동차 정비업을 시작했다. 이을학의 뛰어난 솜씨로 돈이 잘 벌렸으나 1달도 되기 전인 3월 20일 밤에 자동차 칠을 하던 중(당시 도로가 제대로 포장되어있지 않아서 차로 이동하면 먼지가 일었고, 그 때문에 먼지가 덜한 밤중에 자동차 칠을 했다) 새벽에 일어날 세수할 물을 데울 불을 피우기 위해 신나통을 화덕에 부었으나 불길이 신나통으로 불이 붙었고, 그 결과 공장 건물과 트럭 다섯 대, 당시 세도가 윤덕영의 올즈모빌 승용차가 타버렸고, 빚더미에 오른 것은 물론 경찰 조사를 받았다. 고의성이 없었고, 인명피해가 없어서 바로 풀려났다. 다시 사채업자 오윤근을 찾아가 뜻하지 않은 화재로 모든 것을 잃고 빚더미에 올라 먼저 빌린 돈을 갚을 길이 없으니 한 번만 더 도와달라고 사정했고, 3,500원의 돈을 빌릴 수 있었다. 이 3,500원으로 신설동 빈 터에 무허가로 수리공장을 열었는데 당시 법에 의하면 자동차 수리공장의 허가는 자동차 제조 공장으로만 나가게 되있어서 자동차 수리 공장 허가를 얻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무허가로 영업을 했기 때문에 순사들이 찾아왔고, 이에 매일 새벽 곤도(近藤) 보안계장 집에 찾아다니면서 한 달 동안 사정을 했다. 그 결과 "대로변에서 공장이 안 보이게 판자로 울타리를 쳐서 숨어서 하는 시늉을 내라"는 답을 얻었다.

당시 자동차의 수리기간은 10일 정도였는데 4일로 줄이는 대신 수리비를 비싸게 받아 많은 고장난 차들이 신설동 무허가 공장으로 몰렸고, 낮에는 돌아다니면서 안면을 익히고 수리 주문을 받아가며 수리비를 수금하고, 밤에는 다른 직공들과 똑같이 밤새워 일을 했다. 그렇게 해서 자동차 내부의 기계의 모든 기능을 이해할 수 있었다.

돈을 많이 벌어서 사채업자 오윤근에게 빌린 돈을 이자까지 쳐서 다 갚았다. 1941년에 돈암동의 작은 기와집(신설동에서 수리공장을 할 때 산 집)에 부모님을 모셔오고, 둘째 동생 정인영과 셋째 동생 정순영이 6개월 간격으로 돈암동에서 혼인을 했다. 1941년 12월에 태평양전쟁이 발발했고, 이어 1942년 5월에 기업정리령을 내려서 1943년 초에 수리공장을 일본인이 운영하는 '일진공작소'에 강제로 합병당했다. 그 때가 29살 때였고, 동업자이던 이을학은 떠났다.

설상가상으로 징용으로 끌려갈 위기에 놓이자 수리공장을 할 때 알았던 유화광천업 사장을 찾아가 그 아들과 관계가 있는 조선제련 산하의 광산에서 일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보증금 3만원을 지불하고 자동차 정비에 능통한 김영주(金永柱, 나중에 매제가 됨)를 정비책임자로 하여 홀동광산에서 헌 트럭 10대와 새 트럭 20대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이때 가족들도 함께 광산으로 갔다.

광산에서 홀동금광 소장과 그 동기생인 관리책임자와 대립을 하게 되었고, 결국 2년이 지난 1945년 5월에 계약을 다른 사람에게 넘겼고, 보증금 3만원과 계약을 넘기며 받은 2만원을 합쳐 5만원을 들고 가족들과 함께 홀동광산을 떠났다.

광산에서 떠난 지 3달만에 일본이 패망하고 광복을 맞았다. 홀동광산은 그날로 폐광이 되었고, 광산에 있던 일본인들은 모두 소련군 포로가 되었다. 홀동금광 소장과 관리책임자와의 대립 덕분에 돈이 물거품이 되는 것은 물론 소련군의 포로가 되는 일을 모면할 수 있었다.


해방이 되고 나서 부모님은 고향인 통천으로 돌아갔고, 고향에서 환갑 겸 진갑잔치를 치르고 부모님과 함께 돌아올 때 서울로 가는 길목을 소련군이 통제하고 있어서 한탄강을 직접 건너갔다. 해방 직후에는 미군정이 시작되었고, 1946년에 미군정청에서 적산 일부를 부하할 때 중구 초동 200평의 땅을 불하받아 그곳에서 '현대자동차 공업사'간판을 걸고 자동차 수리공장을 시작했다. 중구에서 수리공장을 운영하던 중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현대자동차 공업사는 초창기에 미군 업무를 청부받아 하다가 일제 고물차를 용도에 따라 개조하는 일을 했다. 1.5톤의 트럭을 중간을 이어 덧붙여 2.5톤으로 개조하거나 휘발유차를 목탄차로 개조했다.   

미군에서 일을 하다가 건설업자들이 많은 돈을 받아가는 것을 보았다. 자동차 수리공장을 하면서 버는 돈은 고작 3~40만원인데 건설업자들은 한번에 1,000만원을 받았다. 이에 건설업을 하려고 했으나 친구 오인보와 매제 김영주가 '무모하다'며 반대를 했다. 

"어떤 일을 시작하든 '반드시 된다'는 확신 90%에 '되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 10%로 완벽한 100%"를 채워서 1947년 5월 25일에 자동차 공업사 건물에 '현대토건사'라는 간판을 달았다. 당시 토건회사들은 큰 토건회사들이 독점해서 작은 업체에 하청을 주었다. 공업학교 교사 출신 한 명과 기능공 10명을 데리고 하청업체 속으로 들어갔지만 실적을 거두지는 못했다.

1948년 5월에 토건사 사무실을 광화문 근처 빌딩으로 옮겼고, '현대토건사'는 포천, 인천, 대전 등지의 체면을 유지할 정도의 미군 공사를 맡았다.

1950년 1월에 '현대토건사'와 '현대자동차공업사'를 합병해 '현대건설주식회사'를 세웠다. 그로부터 6개월 후에 6.25전쟁이 발발했고, 정부를 믿었으나 동아일보 외신부 기자였던 동생 정인영이 전한 소식을 듣고 가족들과 부산으로 피난갔다. 부산에서 '현대건설' 간판을 걸었고, 동생 정인영은 미군 통역장교가 되어 공병대 소속인 맥칼리스터(McAllister) 중위의 통역을 맡았고, 그 덕분에 미군 공사들을 도맡아 하게 되었다. 

전쟁 중 미국 대통령 당선인인 아이젠하워(Eigenhower, 미국 34대 대통령)가 한겨울에 부산 UN군 공동묘지를 방문하게 되어서 묘지에 잔디를 입히는 일을 발주받았다. 파란 풀로만 덮으면 된다는 미군의 답변을 받고 보리 싹으로 묘지를 뒤엎었고, 겨울이 지나자 보리를 갈아엎고 다시 잔디를 심었다. 이 공사 덕분에 더 많은 미군 공사를 발주받을 수 있었다. 

1953년 1월 27일에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그해 7월에 휴전협정이 맺어져 8월에 정부가 서울로 환도(還都)하고, 9월에 서울로 올라와 현대자동차공업사 건물에 있다가 소공동 사무실로 이사했다.

휴전협정이 조인되었던 1953년 4월에 정부로부터 고령교(대구와 거창을 잇는 다리) 복구 공사를 발주받아 시작했다. 이 공사는 그동안 발주받았던 공사에 비하면 큰 규모의 공사(5,478만 환 규모의 공사)였고, 복구보다 신축에 가까운 공사였다. 큰 공사 경험이 전무했고, 장비도 부족한 데다가 애써 박아넣은 교각이 홍수에 쓸려 내려갔고, 설상가상으로 물가가 폭등하는 바람에 인부들에게 지급할 월급을 체불해 노동자들이 파업을 했다. 

적자가 예상되었으나 '신용'을 중요하게 여겨서 동생 정순영의 집과 매제 김영주의 집, 최기호의 집, 초동 자동차 수리공장 부지를 매각해 얻은 9,970환을 투입하고, 얻을 수 있는 빚은 모두 끌어 써서 월 18%의 높은 이자를 지불하면서 1955년 5월에 계약 공기보다 2개월 늦게 고령교를 완공했다. 계약 금액은 5,478만 환이었고, 적자금액은 6,500만환이었다. 이 고령교 공사로 인해 20년 동안 채무를 상환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지만 신용을 얻어 더 큰 공사를 쉽게 발주받을 수 있었다.

다음은 고령교에서 큰 적자를 본 3가지 이유이다.

1. 인플레이션(물가상승)의 기미가 있었는데 분할계약을 하지 않았다.

2. 낙동강 바닥의 토질을 모른 채 공사에 뛰어들었다.

3. 당시(1950년대) 대한민국의 장비수준으로 가능한 공사 난이도를 몰랐다.

채근담(採根譚)에 '득의지시 변생실의지비(得意之時 便生失意之悲: 뜻을 이룰 때 실패의 뿌리가 생긴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이 정주영에게 절실한 진리였다. 

정주영은 이 고령교 공사를 '비싼 수업료'를 내고 공부한 셈치자고 생각했다. 또한 장비 부족의 해결을 첫 번째 목표로 삼았다. 시경(詩經)에 불감폭호 불감빙하(不敢暴虎 不敢馮河: 맨손으로 호랑이를 때려잡지 못하고 걸어서 황하를 건너지 못한다)라는 말이 있다. 건설에는 장비가 첫 번째였다.


1957년 5월에 중구 초동 서비스 공장에 중기 사무소를 차려 매제 김영주에게 관리책임을 맡겼고,  한강인도교 복구공사, 오산 비행장 활주로 포장공사, 미 극동군 공병단 발주, 인천 제 1 도크 복구 공사 등을 수주해 1960년 국내 건설업체 중 도급한도액이 1위가 되었다.

모든 설계를 미국식 시방에 의해 작성하고, 품질 관리에 엄격해졌는데 이는 모두 미군 공사를 하면서 배운 것이다.

시멘트를 '건설 공사의 쌀'이라고 여겨 1957년에 시멘트 공장 설립 계획에 착수해 1958년에 충북 단양군의 석회석광을 사들여 시멘트 공장 설립 허가를 받으려 했으나 당시 자유당 정권에서는 기존 공장만으로도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다는 이유로 보류했으나 4.19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고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자 허가를 받을 수 있었으나 다시 5.16 군사정변이 일어났다. 다행히 혁명정부틑 국토 건설 사업에 역점을 두었고, 1964년에 단양에 시멘트 공장을 세울 수 있었다. 이 시멘트 공장은 현대시멘트주식회사가 된다.

1963년에 500만 달러 규모의 베트남 수도 사이공의 상수도 시설공사 국제 입찰에 참가했으나 불발로 끝났다. 그러나 1965년 5월에 태국의 수도 방콕에 지점을 설치하고 네 번째 동생인 정세영을 지점장으로 해 수주 활동을 해서 푸켓 교량 공사, 하자이 비행장 건설 공사 입찰에는 실패했으나 파타니 나라티왓 고속도로 공사를 입찰받았다. 

태국 고속도로 공사는 전반적인 기술의 낙후성과 경험부족, 전근대적 공사 관리 체제의 취약점, 장대비와 나쁜 토질 등으로 막대한 손실을 입었으나 거듭되는 시행착오를 시정하는 과정에서 얻은 새로운 경험, 노하우를 얻었고, 훗날의 국내 고속도로 건설에서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있었다.

1966년 1월에 베트남 캄란 만(灣) 준설 공사를 수주해 베트콩이 24시간 잠복해 있고, 전쟁이 일어나는 상황 속에서 공사를 했다. 1967년에는 소양강 댐 공사를 맡게 되었는데 대일 청구권 자금이 일부 투입되는 공사여서 일본공영이라는 회사에서 설계, 기술, 용역을 맡았다. 이 회사의 설계는 콘크리트 중력 댐이었는데 소양강 댐 부지 주변에는 자갈과 모래들이 많아 사력(砂礫)댐(earth dam) 으로 건설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자 일본공영에서는 반발했으나 박정희 대통령이 이 사실을 알고 사력댐으로 건설하라는 지시를 내려서 사력댐으로 건설하게 되었다.

1967년 11월에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하게 되었고, 대전~대구 구간에 속하는 옥천군과 영동군 사이 소백산맥 4km에 터널(당제터널)을 뚫어야 했지만 빈번한 낙반(落盤: 터널 갱 내부에서 지질불량으로 천장부가 붕괴하여 떨어짐) 사고가 일어났고, 대학 교수들도 이 터널 공사에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러나 조강 시멘트(빨리 굳는 시멘트)를 이용해 3개월이 걸릴 공사를 25일 만에 끝낼 수 있었고, 1970년 7월 7일에 경부고속도로가 완공되었다.


1966년 4월 미국의 포드 자동차에서 대한민국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 내한했을 때, 포드와 접촉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단양시멘트 공사를 위한 차관 교섭을 위해 미국에 가 있던 첫 번째 동생 정인영에게 차관은 늦어도 좋으니 포드사와 자동차 조립 기술 계약을 맺으라는 지시를 내렸고, 1967년 2월 포드 사의 국제 담당 부사장 일행과 만나 그 다음 해 1월에 '현대자동차 주식회사'를 세웠다. 그 다음에 울산에 자동차 공장 부지를 매입하려 했으나 땅값의 갑작스런 상승과 보상을 노린 브로커의 개입, 게다가 공장 부지 예정지에 폭우가 내렸는데 이재민들이 현대를 천재지변의 원흉으로 몰았다. 이재민들에게 8,000만원의 보상을 한 후에 공장을 세울 수 있었다. 공장 건설이 다 안된 상태에서 '코티나'라는 첫 차를 생산했으나 도로 사정을 감안하지 않고 제작되어 실패했다. 게다가 1969년 9월 중순에 대홍수로 현대자동차 공장이 침수되었다. 그 이후 포드와의 갈등으로 포드와 결별하고, 미쓰비시와 가솔린 변속기, 후차축 제조를 위한 기술 협조 계약을 체결했다. 이탈리아의 디자인 회사와 손을 잡고, 영국의 조지 턴블 BLMC(British Leyland Motor Corp., Ltd)사장을 설득해 엔진, 엑셀러레이터, 트랜스미션 등 주요 부품 제작의 기술계약을 맺었다. 그 결과 1976년 1월에 자동차 고유 모델 제 1호 '포니(PONY)'가 탄생했다.

 

(포니 자동차)

1971년 1월에 현대자동차, 현대건설, 현대시멘트주식회사 등을 총괄한 현대그룹을 창립하고 대표이사 회장에 취임했다.


1971년에 조선소를 건설하기 위해 미국, 일본에 차관을 얻으려 했으나 무산되었고, 기권하려고 했으나 박정희 대통령이 무조건 해내라고 해서 다시 얻으러 나섰다. 처음으로 유태인 메리도와 계약을 맺었으나 메리도의 독단적인 일처리로 인해 계약을 파기하고, 6.25 전쟁 때 전투기 조종사였던 데이비스를 만났고, 그는 영구의 버클레이즈 은행과 스위스 은행에 차관을 받을 수 있게 했으며, A&P 애플도어 사와 스코트 리스고우 조선사와 기술 협조 계약을 맺을 수 있게 주선했다. 영국의 A&P 애플도어 사의 롱바톰 회장에게 버클레이즈 은행을 움직여달라고 할 때 500원 짜리 지폐에 그려진 거북선을 보여주면서 "영국의 조선 역사는 1800년대이나 거북선은 1500년대에 만들어졌다"고 하자, 롱바톰 회장은 버클레이즈 은행과 차관을 도입할 수 있게 해주었다. 또한 처가의 고향이 그리스여서 당시 선박왕 오나시스의 처남 리바노스를 소개받을 수 있게 해주었다. 그 결과 1972년 3월 23일에 8,000만 달러로 '현대조선소'를 건설할 수 있었다.


1973년에 1차 오일쇼크가 터졌고, 중동 산유국들은 떼돈을 벌었다. 1975년에 10월에 바레인에서 아랍 수리 조선소를 착공하고, 12월에는 사우디 해군 기지 해상공사를 했다. 그 다음 사우디에서 주베일 산업항 공사에 대한 입찰을 실시했고, 앞에서 버클레이즈 은행과 애플도어의 도움으로 입찰 자격자 선정을 얻을 수 있었으나 2,000만 달러의 보증금이 필요했다. 보증금 문제는 바레인 은행이 사우디 국립 산업은행과 다리를 놓아 줘서 보증금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입찰가격을 8억 7,000만원으로 정했으나 담당직원이 9억 3,114만 달러로 적었고, 이 가격에 입찰되었다. 공사비를 아끼고 기간을 단축하기 위해 본국에서 모든 기자재들을 바지선에 싣고 주베일로 옮겼고, 도중에 풍랑을 만나지 않아서 무사히 도착했다. 1978년에는 아산사회복지사업대잔을 설립했고, 그 해 4월 29일에 강남구 압구정동에 현대고등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이사장으로 취임했으며, 1983년에는 현대전자주식회사를 세웠다. 

서산간척지 공사를 할 때 기존의 방법(단순한 방법)으로 매립이 잘 안되자 큰 폐선 두 척을 이용해 매립공사를 한 후 폐선을 분해해 팔았다. 이 공법을 '정주영 공법'이라고 한다. 


1979년에 박정희 대통령은 24회 올림픽을 서울에 유치하겠다고 했으나 같은 해 10월에 피살되고 1980년에 정부에서는 올림픽 유치 의사를 IOC(국제올림픽위원회)에 통보했다. 일본 나고야와 경쟁을 하게 되었고, 나고야 올림픽 유치위원회에서는 비싼 시계를 IOC위원들에게 나누어 주는 반면에 정주영 회장은 IOC위원들의 숙소에 꽃바구니만을 돌리며 홍보했다. 그 결과 각 국가의 IOC위원들은 시계보다 꽃에 대해 더 많이 관심을 가졌고, 1988년 올림픽을 유치하는데 성공했다.

1987년에 현대그룹 회장직에서 물러나 현대그룹 명예회장에 추대되었고, 1992년 1월에 통일국민당을 창당했고, 같은 해 3월에 제 14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자신을 포함한 31명의 당선자를 배출해 단번에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했다. 이때 배우 최불암도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본명인 '최영한'으로 출마)했고, 당선되었다.

파일:통일국민당.jpg

(통일국민당을 창당하는 정주영 명예회장)


같은해 가을에 반 김영삼 계열의 정치인들을 영입해서 제 14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다음은 통일국민당의 주요 공약들이다.


-반값 아파트

-대학 입학정원 폐지 미 졸업자격제 도입 및 사학육성

-경부고속도로 복층화

-국민학교, 중학교 전면 무료급식

-재벌 해체

-여성부 설립 및 여성할당제 실시

-금연 공약


그러나 16.3%(400만도 안되는)의 득표율로 김영삼, 김대중에 이어 3위로 낙선했다. 낙선 후 현대그룹 계열사들은 세무조사를 받았고, 1993년 2월에 국회의원직을 사퇴했다. 이 무렵 현대그룹은 다음의 정치적 보복을 당했다.

1. 2년간 현대의 자금줄을 묶어놨다. 미국계 시티은행의 대출을 통해 숨통이 끊기지는 않았다.

2. 세무조사를 1년에 2회씩 당했다.

김대중이 15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1998년 2월 25일에 국민의 정부가 출범하여 대북 햇볕 정책이 진행되었다. 정주영은 여기에 맞추어 금강산 개발 사업을 추진했고, 1998년 6월 16일에 '통일소'라고 불린 소 500마리와 함께 판문점을 통해 북한을 방문했고, 같은 해에 2차로 소 501마리와 함께 북한을 방문했다. 이후로 더 방북해서 호화 유람선 금강, 봉래호를 이용한 '금강산 관광'을 성사시켰으며, 1999년에는 평양에서 체육관을 건설하기 시작해 2003년에 완공했고, 이 체육관을 '류경정주영체육관'이라는 이름으로 개관했다. 1999년 2월에 대북사업을 위해 현대아산을 설립했다. 2000년 5월에 명예회장직에서 물러났고, 건강이 악화되어 서울아산병원에 입원했다가 자택에서 요양 생활을 했다. 2001년 1월에 다시 병원에 입원했으나 3월 21일에 폐렴으로 인한 급성 호흡부전증으로 사망하였다. 이 무렵의 현대그룹은 왕자의 난으로 인해 현대자동차그룹(둘째 아들 정몽구), 현대건설(다섯번째 아들 정몽헌), 현대중공업그룹(여섯번째 아들 정몽준) 등으로 분해되었다.


다음은 정주영이 남긴 유명한 명언이다.

1. 이봐, 채금자(책임자). 해보기나 했어?

2.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참고자료:

이 땅에 태어나서: 나의 살아온 이야기-정주영, 솔출판사

https://namu.wiki/w/%EC%A0%95%EC%A3%BC%EC%98%81

https://ko.wikipedia.org/wiki/%EC%A0%95%EC%A3%BC%EC%98%81

https://blog.naver.com/asan_nanum/220564531831

https://namu.wiki/w/%ED%86%B5%EC%9D%BC%EA%B5%AD%EB%AF%BC%EB%8B%B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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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kywalker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