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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인/독립운동가] 최봉준



최봉준(1859~1917)은 1859년 함경북도 성진(현 김책시)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부모를 모두 잃고 가까운 친척이 없었다. 많은 함경도 사람들이 두만강을 건너 연해주(러시아)로 품을 팔러 갔고, 최봉준도 그 무리들을 따라 두만강을 건넜다. 간도 국자가(局子街)에 이르렀을 때 이미 철이 지나 일꾼을 선발하는 소개소들이 모두 문을 닫아서 다시 몇몇의 어른들을 따라 일자리를 찾으러 북쪽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강추위로 인해 러시아 사람들의 산판(벌목을 위해 나무나 풀을 함부로 베지 못하게 하여 가꾸는 산)도 문을 닫아버렸고, 어른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최봉준은 혼자 정처 없이 눈기을 헤매다가 조선인 여성을 만난다. 그 여성은 어른들이 남의 산판에서 나무를 벤 도둑으로 몰려 러시아 산림 간수들에게 잡혀갔다고 말하고, 산림간수 경찰서가 코란스키에 있다고 알려준다. 

그 여성은 최봉준이 코란스키에 갈 수 있도록 비상식량과 개 두 마리가 이끄는 썰매를 빌려주었고, 최봉준은 썰매를 타고 코란스키로 이동하지만 눈보라로 인해 길을 잃게 되었다. 길을 잃자 산굴로 이동하려고 하는데 늑대에게 포위되었고, 어릴 때 고향 어른들이 '짐승한테 쫓길 때는 불을 피워 방어하라'는 말이 생각나서 불을 지폈다. 불로 인해 늑대들의 공격을 받지 않았으나 지쳐 쓰러졌고, 근처에 나타난 잘 길들여진 집개가 자신을 핥는 느낌에 깨어났다. 그 집개의 목 뒤에는 위스키 한 병이 있었고, 몸는에 털담요가 둘러져 있었다.

위스키 한 모금을 마시고 집개의 몸에 있던 털담요를 몸에 둘렀다. 그러다가 자신이 머무르는 장소에서 설원에서 말방울 소리와 개 짖는 소리를 들었고, 러시아 귀족 야린스키를 만나게 된다.

야린스키는 독실한 그리스 정교 신자로서 날마다 일과가 끝나면 자기가 데리고 다니는 사냥개의 몸에 위스키병과 담요를 매어 밖으로 내보냈는데, 이는 길을 잃고 설원을 헤매는 나그네에게 위스키병과 담요를 전달해 주게 하고, 그 개가 다시 길을 일은 나그네를 데려오게 하려고 한 것이였다. 

이렇게 구조된 최봉준은 야린스키가 73세로 죽을 때 까지 7년 동안 양자 겸 별장지기로 지내게 되었다. 여름에는 농장관리인으로, 겨울에는 야린스키와 함께 날마다 개의 목에 위스키병과 담요를 감아 길을 잃은 나그네를 구조하는 일을 했다. 최봉준은 야린스키에게서 인도주의 정신을 바탕으로 한 사랑과 봉사의 가르침을 받았고, 야린스키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처세정신 10조를 남겼다. 이때가 19세였다.


1.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아라.

2. 명확한 목표를 세워라.

3. 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정말 해낼 수 있다.

4. 상대의 입장에서 행동하라.

5. 자기 계발에 힘쓰라.

6. 기회는 역경의 시기에 찾아온다.

7. 성공은 냉철한 자기분석에서부터 시작된다.

8. 경쟁보다는 협력을 하라.

9. 실패를 귀중한 교훈으로 삼아라.

10. 하루하루를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라.


또한 야린스키의 유산도 물려받았다. 

21세때 김씨와 결혼을 했고, 3남 2녀의 자녀를 두었다. 23세때 야린스키의 유산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그 무렵에 러시아와 함경도의 무역이 활발해졌고, 러시아인 세베레프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원산과 부산을 거쳐 일본 나가사키와 중국 상하이를 잇는 정기 항로를 열었고, 최봉준은 갑판에 올라 직접 정크선조선 정크선들의 척당 적재량은 약 1,000파운드이고, 승객 수는 10~30명이다)들을 지휘하며 블라디보스토크와 함경도를 오갔다. 


러시아 사람들은 개량종 양계법에 따라 달걀을 대량생산하고 있었고, 최봉준은 러시아 농가에서 달걀을 사들여 함경도에서 팔았고, 두 배의 이익을 얻었다. 이렇게 달걀로 기반을 닦았고, 1890년대 후반에 조선이 러시아와 긴밀한 관계를 맺기 시작했을 때, 고향인 함경도 성진을 중심으로 원산·경흥·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부산·홍콩·상하이·일본을 활동무대로 삼았다. 

러시아와 일본, 중국에서 각종 수입품(비단, 광목, 석유 등)들을 들여와 함경도 일대와 부산, 동해안을 거쳐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지배하는 거상이 되었다. 거대한 화물선을 러시아에서 들여와 부산-인천-마카오-홍콩-상하이-대만-일본-블라디보스토크까지 취항하면서 온 바다를 호령했다(그 당시 화륜선(火輪船) 한 척이면 하늘을 흔들 만큼의 재력을 상징했다, 조선이 보유한 국유 화물선은 겨우 세 척 뿐이었고, 그것도 고장나서 제대로 운항을 못해 팔아버린 형편이었다). 

최봉준은 1895년에 러시아 군대에 소고기를 납품하기 시작했다. 수요 예측을 잘못해서 위기를 겪기도 했으나 1900년에 일어난 의화단 운동과 1904년에 일어난 러일전쟁으로 막대한 수익을 얻었다.

1906년에 일본에서 청일전쟁 때 사용되었던 화륜선 후시미마루(伏見丸)호를 사들이고, 준창호(俊昌號)로 개칭한다. 

최봉준이 소유했던 배 준창호의 모습. 독립기념관 제공

(준창호 사진)

이 준창호로 매달 1,000여마리의 소를 러시아에 수출하고, 광목과 중국산 비단을 취급해 엄청난 이익을 얻었다. 또한 고향에 대한 사랑이 있어서 성진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남녀노소에 관계없이 성심껏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 늘 따뜻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래서 최봉준의 일에 조선사람들이 도우러 나섰다. 


최봉준은 사업가지만 독립운동가들을 돕는 일에도 나섰다. 1905년에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시베리아에 한국민회(韓國民會)를 조직하고 재정적 후원을 맡았다. 또한 1908년 2월 26일에 해조신문을 창간하고 시일야방성대곡을 쓴 장지연을 주필로 초빙해 항일애국 논설을 집필하게 했다. 

『해조신문』

(해조신문)

3월 21자에 안중근 의사의 인심결합론(人心結合論)을 게재했고, 조선 통감부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어고, 1908년 4월에 신문지법(新聞紙法)을 뜯어고쳐 해조신문의 국내 판매를 금지하고 압수했다. 또한 사장 최봉준에게 폐간을 강요하며 그의 사업에 압력을 가하는 바람에 1908년 5월 26일에 제 75호를 끝으로 폐간되었다.

1909년에 한인거류민회 민장이 되어 계동학교 증축비로 600루블을 기부했고, 안중근 의사의 의거 후 재판에서의 변호사 비용과 안응칠유족구제회를 세워 유족들을 지원했다.

1910년 8월에 조선이 국권을 상실할 위기에 처하자 이상설, 유인석, 김학만 등이 시베리아 신한촌(新韓村)에서 한인들을 모아 조직한 성명회(聲明會)의 선언서에 서명하고, 조선 독립의 당위성과 열강의 조선 독립을 지지하는 극동정책 실시를 호소하는데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자금을 지원했다. 그러나 성명회는 일제의 압력을 받은 러시아에 의해 1910년 9월 11일에 해체되었다.

(성명회 취지서)

최봉준은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과 함께 활동했으나 1909년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하던 무장투쟁 의병에 대한 원조를 거절해 최재형과 결별하게 된다(이 행동에 대해서 친일 논란도 있지만 보수적인 계몽주의자 최봉준의 한계라고 평가한다).


1912년 이후로 사업이 점차 실패를 하기 시작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러시아 군대에 소고기를 납품하고 있었는데 러일전쟁에서 패배한 이후로 이득을 보지 못했고, 1912년에 준창호가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좌초된 이후 수출에 타격을 입은데다가, 블라디보스토크로의 소 수출이 급감하는 바람에 결국 채무만 남기고 준창호를 일본인에게 매각하게 된다. 

1917년에 러시아혁명이 일어나자 고려족 중앙총회의 임원으로 활동하지만 9월에 사망하였다. 사망하기 전에 조선의 청년들에게 다음과 같이 마지막 말을 남겼다.


“조선 젊은이들은 이 땅의 자연적 약속을 깨우치고 역사적 사명에 눈을 떠야 한다. 지금껏 작은 이익에 집착, 서로 헐뜯는 기질이 나라를 병들게 하고 망하게 했음을 바로 알아야 한다. 앞으로 조선 백성이 살아 나아가야 할 방향을 옳게 깨달아야 한다. 조선은 오직 중국과 일본 사이에 놓인 반도가 아니다. 아시아 대륙 전체의 무궁한 발전에 반드시 필요한 귀고리다. 신이 아시아를, 더 나아가 온 세계를 아름답게 하기 위해 그 자리에 조선이라는 귀고리를 달아 놓은 것이다. 레이스로 삼면이 둘러싸인 칠보이고 자수정이다. 이처럼 아름답고 정교하게 깎여 만들어지고 가꾸어진 보석 같은 나라 조선이 또 있겠는가. 이제 우리가 잊어버린 바다에 대한 인식을 바로잡고 깨달아, 그 가치를 발휘하고 지위를 확보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바다와 더불어 국가 민족의 무궁한 장래를 개척해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태평양에 둘러싸인 조선 젊은이들의 영광스러운 임무이다. 조선을 바다에 우뚝 서는 나라로 일으키는 사람만이 오늘의 조선을 구해 낼 수 있다. 남방 대양으로 거침없이 나아가 국민 의기를 드높이고 국가경제를 일으켜, 조선 민족의 성실함과 총명함을 온 세계에 알리고 우리 조선을 세계 으뜸 나라로 세워나가자.”


참고자료:

http://www.okpedia.kr/Contents/ContentsView?localCode=cis&contentsId=GC95300734

http://a-i.co.kr/bbs/board.php?bo_table=STORY&wr_id=194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50527023010

https://m.chosun.com/svc/article.html?sname=news&contid=2010042702626

http://www.k-today.com/news/articleView.html?idxno=808

http://m.monthlymaritimekorea.com/news/articleView.html?idxno=18282

http://theoceandiscourse.com/download/2018_06/OceanDiscourse-2018_06_09.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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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kywalker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