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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 당 태종 이세민



(당 태종 598년 1월 28일 출생, 647년 7월 10일 사망)


당 태종(唐 太宗)은 성씨가 이()고, 휘가 세민(世民)으로 598년에 당 국공 이연(李淵, 훗날의 당 고조)과 두씨(훗날의 태목황후)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위로 건성(建成)이라는 형이 있었고, 아래로는 현패(玄覇, 요절), 원길(元吉)이라는 2명의 동생들이 있었으며 수 양제의 이종조카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의 이세민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별로 없으나 구당서에 따르면 "어릴 때 부터 임기과단(臨機果斷), 소절(小節)에 구애되지 않고 때와 사람을 잘 알아보았다."라는 기록이 있다. 


614년에는 장손씨(훗날 문덕황후)와 혼인을 올렸고, 617년에 수 양제의 폭정으로 나라가 어지러워지고 황제(양제)가 강도로 피난가자 태원지역의 유수(황제가 부재중인 궁궐에서 황제 대리로 업무를 보는 직책)이던 아버지 이연을 설득해서 거병을 한다. 처음에 이연은 거병에 반대했으나 나중에 이세민의 요구대로 거병을 하게 된다. 마침 태원 지역에 돌궐군이 쳐들어오고 농민 반란이 일어나자 이를 명분으로 군사들을 모았고, 이세민은 거병을 준비하기 위해 평소에 사재들 들여 빈객들을 돌보고 군도협객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여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3만명의 군사를 모은 이연은 막내아들인 원길에게 태원의 수비를 맡기고 첫째, 둘째아들인 이건성과 이세민을 앞세워 장안으로 진격했다. 진격하는 동안 수많은 유민, 반란 세력들이 합류해서 3만의 군대가 20만으로 증가했다. 이 20만의 군대로 황제(양제)가 없는 장안성을 함락시키고, 장안의 수비를 맡았던 양제의 손자인 대왕 양유를 허수아비 황제(공제)로 세우고, 양제를 태상황으로 하였으며 이연은 스스로 당왕(唐王) 자리에 올랐다. 또한 618년에 양제가 우문화급에게 피살당하자 당왕 이연은 공제로부터 양위를 받아들여 당 황제(고조)가 되었고, 이세민은 상서령 및 대장군의 직책을 맡았고, 진왕(秦王)으로 봉해졌으며, 맏형 건성은 태자로, 동생 원길은 제왕(齊王)으로 봉해졌다. 


이렇게 당나라가 세워졌으나 세워질 무렵은 장안을 비롯한 위수 유역만을 보유한 상태였다. 감숙 지방에 설거(薛擧)가, 산서 지방에 유무주(劉武周)가, 낙양성에 왕세충(王世充)이, 하복 지방에는 두건덕(竇建德)이, 과거 양현감의 반란에 동참했던 이밀(李密)과 같은 유력한 군벌들이 할거하고 있었다. 


설거가 아들인 설인고를 파견해 당나라를 공격했지만 이세민에 의해 격파되었다. 그러자 설거가 직접 기병들을 이끌고 출전했는데 이 무렵에 이세민이 학질(말라리아)에 걸리는 바람에 은개산()이라는 장수가 방어를 했는데 설거가 기병전에 능통해서 은개산은 물론 이세민도 패배했다. 이 기세를 몰아 설거는 장안성으로 향했으나 불행 중 다행으로 설거가 병사하고, 그 아들인 설인고가 그 뒤를 이었다. 설인고는 경주(涇州)를 본거지로 삼았다. 이세민은 설고를 치러 경주로 갔다. 설인고의 군세는 10만명이었는데 식량이 충분하지 못했고, 이 틈을 탄 이세민은 내부 붕괴공작을 해서 설인고의 군사들 중에서 항복을 하는 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결과 경주가 포위되고, 항복하는 자들이 늘어나자 결국 설인고는 항복한다.


설인고의 항복을 받아낸 이세민은 유무주(劉武周)와 송금강(宋金剛)을 상대했는데 이 무렵부터 고조(이연)와 이세민 사이의 갈등이 시작된다. 고조의 친구인 배적과 유문정이라는 공신이 있는데 이 둘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고조는 배적의 편을 들었고, 유문정은 술에 취해 불평하다 반역죄를 뒤집어 쓰게 되었다. 이세민은 유문정의 편에 섰고, 이 때문에 고조와 사이가 틀어졌다. 결국 유문정은 처형되었고, 배적이 유무주를 상대했지만 패배했고, 태원을 포기하게 되는 상황에 이른다. 하지만 이로 인해 유무주와 송금강의 보급선이 길어지게 되었고, 이때 이세민이 3만의 군사들로 방어에 치중하고 적들의 보급선을 교란했다. 그렇게 해서 적들의 식량을 떨어뜨려 타격을 가했고, 송금강과 유무주는 돌궐로 도망가지만 이용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돌궐은 이 둘을 살해했다. 이 때 이세민은 두건덕 수하의 위지경덕(尉遲敬德)이라는 창의 명수를 부하로 얻었다. 


이 무렵 이밀은 낙양성을 공격하다가 왕세충에 의해 세력이 궤멸되어 부하장수인 서세적(徐世勣, 당 황조로부터 이씨 성을 받아 이세적(李世勣)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당 태종이 즉위했을 때 피휘(황제의 이름과 중복되는 글자를 없앰)를 위해 이적(勣)으로 개명)과 함께 당나라에 항복했다. 하지만 왕세충 또한 피해가 컸고, 이세민은 이 틈을 노려 낙양성을 공격한다. 승기를 잡고 낙양성을 포위했지만 하북의 두건덕이 왕세충을 구원하러 낙양으로 진군하고 있었다. 두건덕은 농민 봉기군 출신으로 왕세충이 무너진다면 다음 상대가 자신이 될 것임을 알고 왕세충을 구원하러 갔다. 이에 이세민은 동생인 원길에게 낙양성의 포위를 맡기고 두건덕을 상대했는데 식량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이렇게 되자 두건덕의 책사 능경은 산서를 치자고 건의했지만 이를 무시했고, 부인도 능경의 제안을 받아들이라고 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만약 두건덕이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당나라에는 위기가 되고, 왕세충의 낙양성은 포위가 풀렸을 것이다. 능경의 주장은 전국시대 손빈이 위나라를 공격해서 조나라를 구원한 전법(위위구조)이다.) 

결국 두건덕은 식량부족으로 철수했고, 이 틈을 타 이세민은 공격을 해서 두건덕을 포로로 잡았고, 포로로 잡은 두건덕을 왕세충에게 보여 항복을 받아낸다. 그 이후에 두건덕은 장안으로 압송되어 처형되었고, 왕세충은 목숨은 건졌으나 과거에 원한을 산 사람에게 암살당했다. 이렇게 당나라는 중국 대륙을 통일했고, 이세민은 고조로부터 '천책상장(天策上將: 하늘이 내린 장수)'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당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고 나서 이세민은 형인 태자 건성과 동생 원길과 갈등을 겪게 된다. 형인 태자 건성도 크게는 아니지만 적어도 공을 세우긴 했지만 개국공신의 역할을 한 이세민에 비하면 한참 모자랐다. 이대로 있다가는 존재가 희미해지고 결국 태자 자리를 빼앗길 것이라고 판단해 막내동생인 제왕 원길과 함께 이세민을 제거할 음모를 꾸민다. 이세민은 방현령, 두여회, 위지경덕, 처남 장손무기 등의 인재들을 수하로 만들었고, 태자 역시 동생인 제왕 원길과 위징 등을 자신의 수하로 만들었다. 또한 태자와 원길은 고조의 비빈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 이세민을 참소(무고)하지만 고조는 우유부단했고, 이 틈을 타 이세민은 측근들의 건의에 따라 형인 태자와 아우인 원길을 제거하기로 한다. 그러기 위해 먼저 현무문(장안성 황궁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수비장인 상하(常何)를 매수했다(황궁 내부에는 황제의 근위군 이외의 군사를 들일 수 없다). 626년에 돌궐이 당나라를 침공하자 고조는 제왕 원길을 사령관으로 해서 이세민의 수하장수를 출전시키려고 했으나 이세민이 알게 되었고, 현무문 내부에 자신의 군사들을 매복시키는 한편 고조를 알현해 형제(태자, 제왕)들이 자신을 무고한다고 아뢰었고, 이연은 태자와 제왕에게 입궁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 명령을 받은 태자와 제왕은 현무문 안으로 들어갔고, 내부에서 매복중인 이세민의 군사들에게 살해되었다. 태자와 제왕을 제거한 이세민은 황궁을 장악하고 고조에게 "태자와 제왕이 반란을 일으켜 선참후보 하였고, 이 일의 원인은 고조에게 있다"라고 한 다음 고조를 별궁에 유폐시킨다. 이 사건을 '현무문의 변(玄武門之變)'이라고 한다. 

그 다음으로 후환을 남기지 않기 위해 조카인 태자와 제왕의 아들들을 죽이고 태자와 제왕의 남은 가족들도 황적(황실 호적)에서 제명했으나 그 이후 측근들의 죄는 묻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태자의 측근 중에서 위징()과 왕규()는 중용되었고, 특히 위징은 태자에게 이세민을 제거하라고 간언한 인물로 당나라 발전에 공헌했다. 현무문의 변이 일어난 지 두 달 후, 이세민은 고조의 양위를 받아 황제가 되었다. 묘호는 태종(太宗)이고, 시호는 문무대성대광효황제(文武大聖大廣孝皇帝, 간단히 문황제)이다.


황제가 된 태종은 연호를 정관(貞觀)으로 고치고 다음의 3가지 조치를 취했다. 태종의 치세를 정관의 치(貞觀之治)라고 한다.

1. 환속 중지: 당시 당나라에서는 불교, 도교의 사찰과 사원을 폐쇄하고 도사와 승려를 환속시키고 있었는데 이를 중단시키고 원위치 해서 여론을 호의적으로 돌렸다.

2. 계급과 서열에 관계없이 의견이 있는 신하들은 모두 상소로 정책을 올리게 했다. 

3. 3000명의 궁녀들에게 자유를 주어 궁궐 바깥으로 내보냈다. 


농민들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고 조용조 제도(토지를 받은 사람은 국가에 곡물을 바치고, 1년 중 20일을 국가를 위해 일하며, 직물 등을 바치게 하는 제도)로 세금을 걷었다. 또한 과거제도를 실시해 인재를 양성하고 징병제를 도입했으며, 인재가 많아 당나라는 번창해지고, 백성들의 민심도 얻었다. 또한 태종은 자신의 적을 위해 일한 장수라도 능력이 뛰어나면 자신의 사람으로 등용했으며, 신하들이 자신에게 독설을 해도 그 간언을 잘 받아들여 국가와 백성을 위한 좋은 정책을 만들 수 있었다. 

태종의 황후 문덕황후 장손씨는 현모양처로 위징의 간언으로 태종의 기분이 나빠졌을 때 위징을 칭찬하면서도 기분을 좋게 하고, 외척의 개입을 막아서 처남인 장손무기에게 재상 자리를 주지 말라고 했다. 불행히도 황후는 36세로 요절했고, 태종은 비통에 잠겼다. 

말년에는 초심을 잃어 간언을 잘 듣지 않고, 궁궐을 많이 지어 백성들의 부역을 늘리자 부역을 피하기 위해 수족을 자르는 일이 일어났고, 그들을 처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630년에 돌궐을 제압해 힐리가한의 항복을 받아내는 한편, 고창국(투루판), 토욕혼, 티베트도 정복해 당나라 영토를 고조 때 보다 2배로 늘리고 실크로드를 장악했다. 그 이후에는 수 양제가 하지 못한 고구려 원정을 진행하는데 대막리지 연개소문의 쿠데타와 고구려가 신라를 괴롭힌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방현령과 위징 등이 반대했지만 이를 물리치고 이적(이세적, 서세적), 장량 등의 장수와 대군을 동원해 고구려 요동성으로 가는 길목인 요하에 다리를 놓아 도하하고, 수 양제가 함락시키지 못했던 요동성을 함락시키고 안시성까지 진격했으나 안시성주 양만춘의 끈질긴 방어에다가 안시성 주변에 토산을 쌓았는데 이것을 고구려군에게 빼앗겼고, 게다가 요하의 다리를 도하가 다 끝나자마자 불태운 탓에 보급이 원할하지 못했고 설연타가 당나라를 침공해서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고구려 원정에서 태종은 한 쪽 눈을 잃었다. 

고구려 원정에 실패하고 당나라로 돌아온 태종은 이질을 앓았고, 649년 7월에 장안에서 51세로 사망한다. 사망하기 직전 후계자인 태자 치(훗날의 당 고종)에게 자신의 잘못을 본받지 말고, 무씨 성을 가진 여인(훗날의 측천황후)을 궁에 들이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러나 무씨 성을 가진 여인은 궁에 들어가게 되고, 측천황후가 되어 황권을 장악해 당나라를 좌지우지하게 된다.         


태종과 문덕황후 사이에는 장남인 태자 승건(承乾)과 차남인 태(), 막내인 치()가 있었는데 장남 승건은 어렸을 적에 총명했으나 열병을 앎고 나서 품행이 어지럽고 제멋대로 노는 기행을 했고, 급기야 반란(태종 암살계획)을 일으키지만 발각되어 진압되었고, 서인으로 강등되어 이궁에 유폐되었다. 차남인 태는 체격이 좋고 학문에 뛰어났으나 권모술수를 좋아해서 지나치게 태자 자리를 탐냈고, 결국 태종의 눈 밖에 나고 만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태자 자리는 막내인 치에게 가게 된다.


참고자료: 

https://ko.wikipedia.org/wiki/%EB%8B%B9_%ED%83%9C%EC%A2%85

https://ko.wikipedia.org/wiki/%EC%A0%95%EA%B4%80%EC%9D%98_%EC%B9%98

https://ko.wikipedia.org/wiki/%ED%98%84%EB%AC%B4%EB%AC%B8%EC%9D%98_%EB%B3%80

https://namu.wiki/w/%ED%83%9C%EC%A2%85(%EB%8B%B9)?from=%EB%8B%B9%20%ED%83%9C%EC%A2%85#s-3

https://namu.wiki/w/%ED%98%84%EB%AC%B4%EB%AC%B8%EC%9D%98%20%EB%B3%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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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kywalker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