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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이 절대 교회 보내지 마라-송상호

 

 

교회를 가고 안가고는 전적으로 본인 자유다. 자녀들을 교회에 보내고 안보내고도 철저히 자신들의 자유이며, 자녀들이 교회에 가고 안 가고도 그들의 자유다. 우린 누구도 남에게 명령할 권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설령 그게 자신이 낳고 기른 자녀라 할지라도. 

 

아이들이 어렸을 적부터 교회(또는 절)에 다니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다. 나중에 나이 들어 자의적으로 판단해서 다니면 종교에 대한 이해도 더 풍성해진다. 다니기 싫으면 안 다녀도 그만이다. 아이들에겐 그럴 권리가 있고, 우리 어른들은 그럴 권리를 짓밟을 권리가 없다. 아이들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어려서 아이들에게 교회를 강요하는 것을 그만두어야 한다. 

 

저자의 외할머니는 마흔 살에 '신 내림'을 받고 무당을 하지 않고 마을 사람들의 점을 봐주다가 마흔 중반에 교회를 다니게 되었다. 이때 작은 신(신 내림)이 떠나고 더 큰 신(예수)이 들어와서 신통한 능력을 잃는 대신 아팠던 몸이 나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새벽기도회를 가다가 오토바이에 치인 다음 73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이 일로 "예수 믿고 교회생활 잘 하면 복 받는다"는 목사의 설교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현주 목사의 '산 정상으로 가는 길은 여러 가지가 있다. 불교의 길도 있고, 유교의 길도 있고, 기독교의 길도 있다. 다만 진리는 하나다'라는 가르침이 내면을 흔들었고, 한참 헤매다가 교회로 돌아갈 수 있었다고 한다. 

 

'인생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이니 하나님을 무조건 신뢰하라'라는 목사의 설교가 나(저자)의 반항심을 억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의문을 품는 것이 죄요, 불복종은 죄'라는 교회의 금기사항이 이성을 잠재웠으나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8개월 동안 공장을 6곳이나 옮긴 일로 잠재워졌던 이성이 폭발했다. 

 

목사 안수를 받았으나 2003년 3월 1일에 교단 탈퇴 성명문을 쓰고 교단을 탈퇴했다.

성명문은 "교단 탈퇴 설명서. 우리 주님의 교회(개척교회 이름)는 이 땅에 있는 교단과 교회는 인정하지만 교단지상주의와 교권주의는 인정할 수 없기에 교단을 탈퇴합니다"라는 내용이다. 

또한 개척교회에 다음의 10가지를 없앴다.

1. 예배는 일주일에 한 번 뿐이다(새벽 기도회, 주일학교 예배, 학생회 예배, 구역 예배가 없다).

2. 교회당 간판이 없다(교회당 간판이 없어도 교회는 교회라는 단순한 논리 때문, 교회 속에 예수가 있어야 교회이다).

3. 소속 교단이 없다.

4. 목회자 사례비가 없다(경제 일선에서 생계를 위해 뛰는 분들을 진심으로 이해해보라는 차원).

5. 조직이 없다(남전도회, 여전도회, 주일학교, 성가대 등등).

6. 절기행사가 없다(성찬식은 없으나 성탄절은 있다).

7. 헌금의 종류가 없다(모든 헌금은 감사헌금, 헌금을 드리면서 십일조라고 생각하고 드리면 되고, 못 드리는 사람은 안내도 된다).

8. 어떠한 절대적 규범이 없다(예배 참석은 자율).

9. 성도의 이동에 제한이 없다(교인명부나 교인등록이 없다).

10. 섬김의 대상에 한계가 없다(꼭 교회에 다녀야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요 목회와 섬김의 대상이다. 이 생각은 창세기에서 나온 것이다).

 

3번의 쫓겨남을 겪은 후 '무위도식'을 실천하기로 했다. 원망이 가라앉아서 자신을 볼 수 있었다.

'세상이 아닌 자기 성질이 ? 같았다'

자신이 할 줄도 모르면서 무언가를 하려 했기에 당한 역경이었다. 대책, 수단도 없이 단지 무식하게 덤빈 결과였다. 이상만 높고 현실감각은 없었던 자신(저자) 탓이었다. '마음을 비우니 행복하더라'라는 말이 들어맞았다. 

일요일 아침 11시 20분에 하던 '서프라이즈' 방송이 있었는데 가족들이 그 프로의 광팬이었고, 서프라이즈 이후에 하는 '출발 비디오 여행'도 보았다. 그러니 일요 예배시간을 맞출 수 없었고, 자녀들도 예배를 귀찮아해 예배를 그만두게 되었다. 독서를 하다가 노자의 도덕경의 구절 '물은 네모 통에 담으면 네모가 되고, 세모 통에 담으면 세모가 된다. 하지만, 물의 근본은 변하지 않는다'을 접하고 다음과 같은 깨달음을 얻었다.

'바로 이거다 이거야. 내가 고민했던, 살아가야 할 삶의 방식이구나. 내가 기독교의 옷을 입든 불교의 옷을 입든 그것은 나의 자유로구나. 다만 나는 나일뿐. 나는 물처럼 살아야겠구나.'

 

다음은 저자가 중학교 때 교회 부흥사로부터 들은 이야기이다.  

한국 기독교 초기, 어느 교회에 외국 선교사가 부임했고, 그 선교사는 힘을 다해 한국교회를 사랑하며 섬겼다. 그러다가 교인 한 사람이 그 선교사가 성경을 화장지로 사용하는 것을 보았고, 이 사실은 다른 교인들을 낙심하게 했다. 

이 외국 선교사는 "교인 여러분.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담은 책에 불과합니다. 그 책에 있는 진리를 깨달았다면 더 이상 필요 없는 것이 성경입니다. 저는 그것을 믿기에 그렇게 했습니다."라고 설교했고, 사태가 수습되었다.

위의 외국 선교사의 말을 불교식으로 말하자면 살불살조(殺佛殺祖: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였다. 하나의 길에 온전히 이르면 더 이상 형식에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나는 물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흐르고 흘러 바다로 가고, 우리 모두는 '하나의 바다'이다. 

 

교회 다니기 싫은 사람들은 겉으로 표현하지 못하는데 이유는 다양하다. 예배가 지루해서, 목사의 설교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목사와 장로의 꼴을 보기 싫어서, 헌금을 너무 강요하는 것 같아서 등등 다양하다.

(교회 가기 싫은 77가지 이유-이만재 中)

교회 안 가는 것을 실천하지 못하는 이유는 '두려움' 때문이다. 교회에서 들려준 죽음과 사후세계에 대한 두려움(천국과 지옥, 하나님의 심판, 지구의 종말 등에 관한 교리)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두려움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교회, 절, 모스크(성원, 이슬람 사원)를 나간다. 이 두려움에서 위로받고 싶어 신을 찾는다.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는 이 두려움을 해결해줄 뭔가가 있는 것처럼 선전한다.

교회는 사람들에게 조금의 위로를 주고는 두려움을 미끼로 더 큰 것을 요구하기 일쑤다. 미끼, 바로 그것이다. 두려움을 볼모로 교회에 충성하는 착한 양을 만들어버린다. 

철학자 러셀은 "기독교를 포함한 종교 자체가 두려움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인도의 수상 네루도 자신의 딸에게 보내는 옥중서신에서 "종교는 두려움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교회 보내는 부모들의 심정은 마치 자녀를 명문고, 명문대에 보내는 심정과 다를 게 없다. 

기독교인에게 "당신은 왜 교회에 다니는가?"라고 물어보면 소극적으로는 "험한 세상에서 구원 받아 천국백성이 되려고"라고, 적극적인 사람은 "전 생애를 걸고 예수를 배워 예수를 따라가려고"라고 한다.

사실 다 부질없다. 한국교회 교인들은 이런 교과서적 대답을 이미 쌈 싸 먹었다. 그렇게 믿고 따라가는 사람은 드물고, 목사 역시 드물다. 

 

아이들을 절대 교회에 보내지 말아야 할 10가지 이유

 

1. 역사의식이 사라진다. 

다음은 교회 다니는 아이들의 역사의식을 보여주는 유머이다. 

"안중근 의사는 3.1운동 때 부상자들을 치료해준 의사이고, 유관순 누나는 3.1운동 때 거리에서 태극기를 팔았다."

이렇게 된 데는 교회의 책임이 크다.

성경에 따르면 "우리는 아담과 하와의 후손"이라고 한다. 서양에서는 아예 아담을 최초의 인간이라고 본다. 유대민족의 아담신화는 사실이라 믿고, 우리 민족의 단군신화를 허구라고 믿게 한다. 

*

아담-단군

구약성서 모세5경-삼국유사, 제왕운기

 

이것은 심각한 오류이고, 우리 민족의 조상이 단군이라고 믿는 것이 자연스럽다.  

(나는(블로그 운영자) 단군을 부정하고 단군 상(像)을 훼손하는 것도 교회의 책임이라고 본다)  

더 심각한 것은 세상을 '선악'이라는 이분법으로 보는 역사의식이다. 즉, '하나님' 아니면 '사탄' 이 두 가지 뿐이다. 

이것은 영국, 프랑스가 식민지를 만드는 근거(기독교 선교)에 사용되었고, 이것을 배운 영국의 청교도들은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가 인디언들을 학살한 후 미국을 건설했고, 이러한 행위를 '청교도들의 행위는 하나님의 뜻을 찾아 떠난 거룩한 행위'라고 주장한다. 

 

2. 합리적인 사람이 되기 어럽다. 

예수가 물 위를 걷는다면 중력의 법칙을,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개(오병이어)로 5,000명을 먹였다면 질량보존의 법칙을,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다면 물질불변의 법칙을(물만 있는 상태에서 알코올이 생기지 않는다), 죽은 지 3일만에 부활했다면 생명의 법칙을 어긴 것이다. 

성서 무오설은 이 세상의 교회에서는 불문율이고, 성서에 흠집을 내는 행위는 이단으로 몰리는 것과 같다. 

 

3. 이중인격자가 되기 십상이다. 

위선자는 '겉으로만 착한 체 하는 사람', 이중인격자는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다. 현재 교회는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다.

"삶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죽음의 순간이다. 중요한 건 회개의 순간이다. 개차반으로 살았어도 최후의 순간에 회개만 하면 하늘나라 시민이 된다. 반면 삶의 질과 내용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어떻게 살았든 회개하지 않으면 영원한 지옥 자식이 된다. 과정보다 결과가 중요하다."

이러니 회개라는 유혹에 길들여진 교인들은 오히려 죄에 대해 둔감해진다. 

종교적인 사회일수록 도덕률이 엄격하다. 엄격한 사회에서는 사람들의 뇌의 구조가 이중적이 된다. 자신을 포장하는 기술이 뛰어나게 된다. 단순히 거룩한 체 하는 위선자를 넘어 겉과 속이 다른 이중인격자 수준까지 가게 된다. 

자신의 자녀를 지킬박사와 하이드 같은 괴물로 만들고 싶은 사람은 없다. 그러나 오늘의 교회는 바로 아이들을 그러한 이중인격자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4. 종교바보가 따로 없다. 

교인들은 무슨 일이 생기면 '이게 하나님의 뜻일까 아닐까'를 먼저 고민하다가 목사 또는 종교지도자를 찾아가고, 이들에게서 해답을 찾는다. 신의 뜻이라고는 하나 결국은 신학적 교리의 뜻이요, 교회의 뜻이요, 목사의 뜻이다. 마치 자신의 뜻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처럼 생각한다.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교인들은 하나의 시각에 매몰된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교회에선 어른들이 말하면 순종해야 한다는 불문율이 작용한다. 목사가 말하면 하나님 말씀처럼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즉 상명하복을 일찌감치 배우는 곳이 교회다.

교회에는 '아니오'가 있을 수 없다. 그 이유는 아담이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한 과일(선악과)을 따 먹는 바람에 인간이 요 모양 요 꼴로 사니까. 교회에서 항상 최대의 적은 '불순종, 반역'이다.

'불순종, 반역'을 싫어하는 부류는 독재자 또는 최고권력자이고 이들은 불순종을 경계한다. 

조선시대에는 역적에게 3족을 멸하는 형벌을 주었고, 신은 남자에게 노동의 고통을, 여자에게는 해산의 고통을 주었으며 낙원에서 추방당하는 벌을 주었다.

이러한 메카니즘 속에 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양태는 크게 다음의 두 가지이다.

(1) 더러워도, 아니꼬워도 꾹 참고 산다(X가 무서워서 피하는 것이 아니라 더러워서 피하는 것이다).

(2) 그나마 기쁘게 적응하며 산다. 권력자에게 자신의 충성을 바치고, 권력자로부터 은총의 열매를 따 먹는다.

이들에게는 자율성이 없다. 

성서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열릴 것이니"-마태복음 7장 7절

보편적인 시각으로 이 구절을 바라보면 "쟁취하고 도전하라, 길이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가라"라는 메세지로 알아들으나 어릴 때부터 교회 생활을 한 사람이라면 다르게 받아들인다.

"하나님께 구하라 주실 것이다. 하나님께 찾으라 찾을 것이다. 하나님께 두드리라 열릴 것이다."

이들(어릴 때부터 교회 생활을 한 사람)은 참으로 진취적인 이 구절을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명령어로 받아들이다.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라고 고백하고 하나님 당신은 전지전능하시니 자신의 문제를 풀어달라고 떼를 쓴다. 이런 현실이다 보니 우리 아이들이 교회에서 키워진다면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 지 걱정이 될 수 밖에 없다. 

 

5. 일요일에는 아이들도 쉬고 싶다.  

우리나라의 초기 개신교회들은 주일학교를 운영했고, 주일학교는 먹을 것, 놀 것, 배울 것, 쉴 것을 제공했다. 이것이 주일학교의 본래 뜻이다.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서 변질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가난한 시절 아이들에게 학교는 가고 싶은 곳 1위였으나 지금은 가기 싫은 곳 1위가 되었다. 

현재의 아이들은 학교가 끝나면 놀 시간도 없이 학원 가서 밤 늦게 공부하고 온다. 이런 이유로 학교라는 말을 싫어하는데 어른들은 그런 아이들의 심정을 모른다. 

교회학교에서는 주일을 안식하는 날이라고 가르친다. 안식일이 쉬는 날이라고 하는 것은 창조신화로부터 유래되었다. 신이 6일 동안 창조를 하고 마지막 날인 7일에 안식을 했다는 이야기다. 신이 쉬었으니 우리도 쉰다는 의미이다. 이런 안식일 문화를 살린 기독교는 일요일을 주일(주님의 날)이라고 불렀다. 주일에는 일체의 직업, 의료, 교육 등의 행위를 멈추고 주님 안에서 온전한 쉼을 누리자는 결의가 담겨 있다.

하지만 쉬는 날에 아이들을 불러서 못 쉬게 만들고, 가르치는 교사들도 못 쉬게 만드는 줄 알고 있을까. 차라리 '일요일은 쉬는 날'이라고 가르치지나 말아야 하는데...

월~금요일에는 학교를 가고, 토요일은 놀토지만 체험학습이다 해서 쉴 수도 없다. 일주일 중 유일하게 제대로 쉴 수 있는 날은 일요일이다. 모처럼 늦잠도 자고, TV도 보고 싶어하나 주일학교는 9시부터 시작이다. 

일요일이라도 아이들을 쉬게 해야 한다.

 

6. 교회는 죄인 양성소다.

교회에서 모든 살마들을 죄인이라고 가르치는 것은 '원죄교리'때문이다. 이 교리의 창시자는 아우구스티누스인데, 그가 로마제국 말기에 청년 시절을 방탕한 생활을 했는데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와 자신의 젊은 모습을 회상하면서 '원죄교리'를 창조했다.

사실 원죄교리는 아우구스티누스 이전에는 없었다. 유태인들에게 원죄교리를 설명한다면 분명히 콧방귀를 낄 것이다. 이것은 예수의 십자가 구원설을 정당화하기 위해 교회에서 고안해 낸 발명품이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죄인이 된 것은 아우구스티누스 덕분이다. 그 이전에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죄인은 아니었다. 

이 원죄교리는 마녀사냥과 종교재판의 기반이 되었다. 유대교 율법에는 누구라도 1년에 한 번은 염소나 양을 희생 제물로 신전에 바쳐야 했고, 성전에 종교세 납부, 수시로 헌금을 해야 했다. 하지만 서민들은 이러한 종교적 의무를 감당하기에 벅찼고, 종교적 의무를 다하지 못한 죄인이 되었다. 예수는 이렇게 죄인이 된 사람들을 주로 만났다. 

 

7. 남을 배척하는 꼴통이 되도 좋은가

상식적 수준에서 볼 때,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 그러나 교회에 가면 다른 것은 틀린 것 뿐 아니라 죄악이다. 다른 것은 아예 길이 아닌 물리쳐야 할 사탄의 길이다. 

서방교회에서는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가 곧 하나님"이라고 하나, 동방교회에서는 "예수는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존재 또는 인간과 같이 나약한 존재"라고 한다. 이 상황에서 서방교회는 동방교회를 이겨야 한다. 

마녀사냥과 종교재판, 서양 열강들의 식민지 침략, 영국 청교도들의 미국 개척 역사 등이 교회의 성향을 잘 드러내준다. 

 

8. 경쟁력에서도 뒤처진다. 

21세기에 적합한 '경쟁력 있는 인간'은 '다양성을 수용할 수 있는 인간, 변화에 대해 적응력이 뛰어난 인간, 창조적이고 진취적인 인간'이다. 그러나 교회는 변화를 싫어한다. 

현대의 한국교회들은 새로움(?)을 추구하기 위해 예배 시간에 영화를 보여주거나 오케스트라를 도입하고, 신나는 찬양을 하다가 지치면 '구관이 명관'이라며 옛 것을 회복하자는 운동까지 벌인다. 

창조적인 인간은 의심할 수 있는 인간이다. 모든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때 새로운 창조는 없다. 이 세상의 모든 새로운 발명과 발견은 의심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결과 갈릴레이는 지동설을 주장했고, 뉴턴은 만유인력 법칙을 발견했다. 

하지만 교회는 '의심'을 최대의 적으로 간주한다. 교회에서의 의심은 곧 반역이다. 

고착화는 '이전의 발달 단계에서 적절했던 대상이나 생각이, 발달이 진행되어 다른 생각이나 행동이 요구되는 데에도 그 이전의 상태에 머무르는 현상'이다. 세상이 변화를 요구해도 죽어도 변하지 않겠다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열등감이 적은 사람은 남의 것을 잘 받아들이고 변화에도 잘 적응한다. 또한 창의적이고 도전적이다. 

 

9. 세뇌,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교회가 아이들을 세뇌시킨다고 하면 교회가 공산당이냐고 물을 수도 있다. 하지만 교회는 세뇌가 없으면 지탱하기 어렵다.

세뇌의 사전적 의미는 '사람이 본래 가지고 있던 의식을 다른 방향으로 바꾸게 하거나, 특정한 사상 또는 주의를 따르도록 뇌리에 주입하는 일'이다. 

세뇌는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또는 저항하더라도 강제력을 행사하는 것이 기본이다. TV광고도 세뇌법칙을 적용한 것이다. 사람들은 TV를 통해 반복해서 그 상품을 접하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TV광고가 비싸다. 

세뇌 작용은 당장 강압적이지 않고 오히려 달콤하다. 

실제로 광고주는 상업적 목적으로, 학교는 교육적 목적으로, 권력자는 정치적 목적으로 이를 이용한다. 이 세뇌의 특징은 세뇌당하는 자도 모르게 야금야금 세뇌시킨다는 것이다. 

일본의 뇌기능 학자 도마베치 히데토의 책 '세뇌의 법칙'에 따르면 이 세상에서 세뇌를 당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자유에 따른 책임을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이러한 현상은 사회가 불안할 때 특히 가중된다. 이때 등장하는 것이 초인(슈퍼맨)이다. 이 초인은 이들의 자유를 저당잡아 유토피아로 인도하게 된다. 모든 종교가 세상에 건재한 이유다.

초인은 자신의 무의식에 존재하는 마음의 심연을 다루는 기술이 뛰어난 사람들이고 이러한 사람들을 '성인'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들은 마음을 조절하지 못하고, 누군가가 조정해주기를 바란다. 

우리의 자유를 저당 잡히는 일이 종교에 귀의하는 일이다. 이것은 권력에 귀의하는 현상과 동일하다. 

교회가 죽을 힘을 다해 전도하는 이유는 교회의 힘이 '교인들의 머리 수'이기 때문이다. 목사들이 사회적 물의를 저지르고도 큰소리 칠 수 있는 이유는 수많은 교인들이 목사를 따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행태가 가능한 한국교회의 구조가 더 문제이다.

심리학자 휴 미실다인은 '몸에 밴 어린 시절'에서 우리의 어린시절을 돌아보게 하고, 이 책에서 '내재과거아'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내재과거아는 어릴 적 부모에게 영향 받은 '부모의 태도'가 자신의 몸에 배어 있는 자아를 말한다. 세상 모든 부부는 네 사람과 같이 산다. 각각 현재의 자신인 두 존재와 각각 내재과거아인 두 존재를 말한다. 부부가 서로 맞춰 살기 힘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내재과거아는 한 사람의 평생을 함께 하며 따라다닌다. 별일이 없는 한 자신의 자녀에게 대물림된다.

어릴 때 부터 교회에 다닌 아이들은 교회가 만들어 준 내재과거아를 가지고 평생 살아갈 수 있다. 결국 이 아이들은 교회의 세뇌를 평생 달고 다니는 아이가 될 것이 분명하다. 

 

10. 교회, 곧 사라질 운명이다.

그 동안 교회는 장년층과 노년층에 의해 유지되었다. 그러나 지금 젊은이들은 교회에 가지 않는다. 

책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는 33가지 이유-이상화'을 읽어볼 것.

 

교회는 건물이 아닌 죽은 지 4일만에 부활한 예수 자체가 교회이다. 부화한 예수를 믿는 우리가 교회이다. 교회가 건물이라는 것은 편견이고, 버려야 할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교회라는 단어는 '에클레시아(ekklesia)'이다. 항상 장소가 아닌 사람의 모임을 나타낸다. 

영어 'church'는 독일어 'kirche'와 스코틀랜드의 'kir'에서 왔다. 이것들은 그리스어 'kuriakon'에서 유래된 것으로 '주님께 속한다'라는 뜻이다. 성서에는 에클레시아가 건물이라는 용례로 사용된 적이 없었고, 교회를 건물로 아는 교인들은 철저하게 비성서적이다. 

성경에도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요한복음 12장 19절"라는 구절이 있다. 

 

교회가 건물이 된 것은 예수가 아닌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에 의해서였다. 이 때의 교회는 권력의 단맛을 영양분으로 하여 충실히 탈바꿈한 애벌레와 같다. 콘스탄티누스 이후로 교회는 '예수의 공동체'에서 '황제의 건물'로 탈바꿈했다. 2,000년이 지난 지금도 교회는 그 메카니즘 속에 허덕이고 있다. 

 

건물교회의 창시자가 콘스탄티누스라면, 개신교회 예배의 창시자는 칼뱅과 루터이다. 이들은 종교개혁을 시도했으나 형식만 바뀌었을 뿐, 아무 것도 개혁하지 못했다. 

루터는 가톨릭으로부터 버림받자 1517년 10월 31일에 '95개조의 반박'이라는 제목으로 가톨릭 교회를 반박하는 문서를 내걸었다. 이러한 루터의 행위를 가톨릭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당시의 왕, 제후, 신흥세력, 농민들이 지지했고, '울고 싶은 사람에게 뺨 때려 준 꼴'이었다. 

칼뱅은 에라스무스와 루터를 인용한 이단적 강연의 초고를 썼다는 이유로 가톨릭의 탄압을 받았고, 스위스 바젤로 피신한다. 다음으로 스위스 제네바의 종교개혁을 했는데 성경 교리를 어긴 자들을 사형으로 다스리는 폭력정치를 했다. 

기독교는 유대교에서 뛰쳐나왔고, 개신교는 가톨릭으로부터 뛰쳐나왔다. 기독교는 계속 뛰쳐나왔지만 모두 다 그 나물의 그 밥이다. 지금의 개신교회는 유대인 성전의 다른 이름일 뿐이고, 예수가 부수고자 했던 성전이다. 

 

심리학자 로버트 존슨은 자신의 저서 '당신의 그림자가 울고 있다'에서 종교(religion)라는 단어는 라틴어로 다시라는 의미의 're'와 연결되고 묶고 다리를 놓다라는 의미를 갖는 'ligare'에서 유리되었다. 그러므로 종교란 '다시 함께 묶는다'라는 뜻으로 종교를 설명했다. 종교란 인간의 끊어진 무언가를 묶고 다리를 놓아주는 것이다.

여기서 연결해야 할 그 무엇이 '근본'이다. 이 근본을 기독교에서는 하나님, 불교에서는 부처님, 이슬람교에서는 알라라고 불렀다. 

이 세상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 한 장의 종이에 연관되지 않은 우주는 없다. 이것이 우주적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자타불이(이 세상 모든 것은 둘이 아니다)'는 진리와 상통한다. 

구약성경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세기 1장 1절"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 구절은 세상이 둘이 아닌 한 뿌리에서 왔다는 것을 드러낸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누가복음 9장 58절"이라고 말한 예수처럼 사는 길이다. 깃털처럼 구름처럼 가볍게 사는 길이다. 

 

*우리 역사를 이어갈 차세대에게 '자신 스스로 생각하거나 결정하게 하자'는 것이다. 부모나 기성세대의 영향력으로 왜곡된 인간상을 조각하지 말고, 다양한 가치 체계를 경험하고 섭렵하면서도 주체적인 인간으로 자기철학과 세계관이 세워지게 하자고 주장하는 것입니다.(이 책의 추천사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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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kywalker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