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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광수 교수의 "왜 나는 순수한 민주주의에 몰두하지 못할까"를 읽고



*"왜 나는 순수한 민주주의에 몰두하지 못할까"에서 감명깊게 읽은 부분들이다.

1. 

무엇이 '순수'인가


30대 문학평론가는 북한과 동독에 대해 동정심을 표시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북한과 동독은 이데올로기 문제보다 경제문제로 인해 주도권을 남한, 서독에 빼앗겼다. 이들의 사상은 정통성이나 결백성에 있어 남한이나 서독보다 우월한데 남한이 친일분자들을 포용하고, 서독이 나치협력 재벌들을 옹호한 반면 북한에서는 친일분자들을 엄벌하고, 동독에서는 나치 잔당을 엄벌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문화인들은 격변하는 세계 역사의 흐름을 제대로 쫓지 못하고 있는데 그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의 현실인식이 지나치게 이중적이기 때문이다. 

노동자의 삶을 예찬하면서 정작 자신들은 노동자가 되지 못하고, 지식인의 부르주아적 삶을 비난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은 부르주아적 삶을 지향하고 있다. 때문에 이러한 이중적 자기모순이 그들의 외침을 더욱 더 공허하게 만들어 가고 있다.


인간은 원래 스스로의 본능적 욕구를 관철시키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역사는 언제나 약육강식의 원칙에 의해 이끌어져 왔다. 모든 전쟁은 언제나 '땅따먹기'이거나 '노동력으로서의 인구 뺏기'가 전부였다. 종교나 이데올로기는 오직 핑계거리일 뿐이다.

이런 사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자유, 평등, 박애만을 부르짖으며 명목상의 민주주의에만 집착할 때, 개인이든 국가든 결국 기초가 흔들리게 된다. 

(90년대의) 대학원생들은 세미나 시간에는 이타주의적 입장에서 남의 걱정을 하지만 저녁 술자리에서는 대학교수 되기는 커녕 시간강사 되기도 어렵다고 한탄한다. 문학을 재미있게 공부할 수 있는 소재거리로만 생각할 뿐 스스로의 삶 자체를 문학관과 일치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이제는 순수한 민주주의도, 공산주의도 존재할 수 없고, 실용주의적 쾌락주의와 인간심리에 대한 근원적 성찰에 바탕을 둔 '실리주의'만이 필요하다.

역사발전의 계기는 언제나 일정한 명분에 의해 이루어진다. 하지만 그 발전을 지속시키는 것은 개인의 쾌락욕구이다. 

앞으로 전개될 90년대의 사회는 육체적 쾌락을 좀더 극대화시켜 정신적 쾌락으로 연결시켜야 한다. 

미국식 청교도 주의는 "숨어서 요령껏 바람을 피우는 것은 그 사람의 능력이요, 재수없게 걸리는 놈은 병신이다"는 원칙이 통용되는 양다리 걸치기식 구조이다. 그러니까 결국 힘있는 놈이 이길 수 밖에 없다. 


옛날 독재자들은 대체로 지독한 결벽증 환자 아니면 청교도주의자들이었다. 대표적인 예로 로베스피에르, 크롬웰, 히틀러가 있다. 성욕을 원활하게 해소하지 못하면 반드시 잠재의식 안에 억압된 울분이 쌓이게 되고, 그 울분들은 성 이외의 다른 탈출구를 찾으려고 애쓴다. 

예술창작이나 건전한 취미를 통해 성욕의 대리배설을 시도할 수 있으나 정치가의 경우는 권력욕을 강하게 타고나서 '사디즘적 쾌락'의 충족을 원하고 있다. 

주변에 주색을 싫어하거나 경멸하는 사람들의 심성에는 잔인하고 이악스러운 면이 있어서 겉으로는 청렴결백한 생활을 해도 그 주변 사람은 피해를 입는다. 

퇴계 이황은 문하생을 받아들일 때 다음의 시험방법을 썼다고 한다.

한 여름 삼복더위에 의관을 정제하게 하고 앉게 한 다음 문답을 하는데 이때 퇴계 자신은 시원하고 가벼운 옷차림이고 제자를 자청한 사람들은 잔뜩 차려입고 더위를 참아가며 대화를 주고받아야 한다. 

이때 옷을 벗은 사람을 제자로 받아들이고, 끝까지 참는 사람은 비인간적이라고 해서 제자로 받지 않았다. 이렇게 피도 눈물도 없는 강인한 성격의 사람이 나중에 벼슬을 하게 되면 백성들은 고통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 퇴계의 지론이었다. 


정치가가 사생활을 전혀 갖지 못하고 성적 욕망도 억지로 참아야 한다면 그 사람은 삐뚤어진 성격을 가질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정치가는 유별난 변종이거나 불감증 환자여서는 안된다. 그저 보통 사람처럼 식욕과 성욕에 삶의 가치를 두는 사람이어야 한다. 

대체로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혁명가나 독재자는 어린시절에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랐거나 자신의 성적 능력에 컴플렉스를 가진 이들이 많았고, 이것은 정치가 뿐만 아니라 소위 출세한 사람들에게서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성욕에 사용할 에너지를 다른 쪽으로 돌렸기 때문에 혁명가적 열정이나 출세지향적 노력이 가능했다. 

사람이 정치가로든 경제인으로든 또 다른 무엇으로든 출세하려고 아둥바둥대는 이유는 남보다 더 신나는 마음껏 본능을 충족시키고 싶기 때문이다. 


정치와 상징, 내각책임제


자유당 시절 야당에서 내각책임제를 수립하려고 했으나 대통령 중심제로 그쳐야만 했고, 4.19 이후 5.16 군사정변으로 장면 정권이 무너진 탓에 내각책임제에 대한 단점만이 노출되었다. 게다가 내각책임제는 진짜 정치인들이 가진 이상적 정치관의 반영으로서가 아닌 정리정략적 차원에서 논의된 것이었다. 


광해군은 폭군이라기보다 소신을 굽히지 않는 인물이었다. "청나라 오랑캐들과 친밀한 외교"를 통해 전쟁을 막으려고 했으나 명나라에 대한 의리와 모화사상에만 집착한 수구파들은 광해군을 폭군이라는 죄목으로 폐위시켰다. 조선시대의 정치제도는 임금은 말만 왕이었지 허수아비에 불과했으며, 실질적 권한은 많지 못했다. 


입헌군주제나 내각책임제의 장점은 언제라도 국무총리를 교체할 수 있다는 점이 있고, 대통령(또는 왕)은 형식적으로는 국가원수여도 상직적 통치자에 불과해 실권을 갖지 못해서 탐낼 수 있는 자리가 되지 못한다. 

내각책임제를 하더라도 쿠데타의 위험이 있다는 것만은 틀림없다. 4.19후에 내각책임제를 시작했으나 5.16으로 인해 수포로 돌아가 버렸다. 하지만 이것은 윤보선 대통령이 상징적 대통령에 머물고 싶지 않아해서 일어난 비극이었다. 그는 장면 국무총리를 증오하다시피 했고, 자기가 직접 실권을 잡고 싶어했다. 만약 윤보선 자신이 제2공화국의 상징이라는 자부심이 있었더라면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에게 무릎을 꿇지 말고 맞서 싸워야 했다.


국가는 이념의 상징이 필요해서 로마제국은 기독교를 국교로 채택했고, 중국 한나라는 유료를, 일본은 신도 이념과 천황제를 국가의 상징으로 채택해서 어느 정도 성공했다. 

좌,우익 이데올로기보다 가장 큰 문제는 종교적 이데올로기이다. 편협한 일부 종교나 종파의 독선적 이데올로기가 극성을 부리기 때문에 이로 인해서 국민적 대동단합이나 민주발전, 통일에 장애가 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제도에 있어서만이라도 상징적 통합이 이루어져야 한다. 

대통령 중심제가 성공한 나라는 미국 뿐이다. 그러나 미국은 청교도주의라는 상징적 국가이념을 가진 나라이다. 어떤 특정 이념을 국가적 상징으로 채택하기 보다 차라리 제도적 상징만을 가지고 유연하게 대처하는 것이 낫다고 볼 때 우리 조상들의 정치제도, 특히 조선시대의 왕정의 상징적 메세지에 주목해 우리의 옛 전통과 현대 제도를 친밀하게 결합시키는 쪽으로 나아가야 한다. 

일본 사람들이 악선전을 해서 그렇지 조선 정치제도는 결코 나쁜 것이 아니었다. 당쟁이 많았다는 것은 언로(言路)가 뚫려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특히 임금이 상징적인 위치에 있었다는 것은 합리적인 정치제도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아마겟돈으로 가는 종교적 편견


수 많은 종교들이 각기 가지고 있는 특정한 신조와 배타성을 버리고 하나로 뭉칠 수 있을 때, 그때 가서야 비로소 세계 인류는 백해무익하기만 한 이념분쟁의 참화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인류역사를 돌이켜 볼 때 특정 종교를 국교로 삼아 지나칠 정도로 충성을 바쳐대던 나라들은 다 멸망했다. 로마제국은 기독교 공인 이후로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고, 결국 중세기의 천년 암흑시대로 이어졌다. 우리나라에 불교를 전파한 동진은 불교를 숭상했는데도 멸망했다.

우리나라가 좁은 국토와 미미한 국세에도 지금까지 단일 언어를 보존하면서 존속할 수 있었던 까닭은 특정한 종교를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려시대에는 불교가 국교였고, 조선시대에는 국교였으나 그것이 전 국민적 신앙으로 확산된 적은 없었다. 고려시대에는 유학이 있었고, 조선시대라 해도 불교와 도교가 민중신앙의 큰 몫을 차지하고 있었다. 단군 이래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가장 보편적으로 신앙돼 온 종교는 샤머니즘인데 이것은 모든 만물에 정령이 있다고 믿는 신앙체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특정한 유일신만을 섬기는 데 따르는 배타주의적인 면을 별로 보이지 않았고, 따라서 유연하면서도 융통성 있는 인간관과 세계관을 유지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 유학은 특정한 신을 섬기거나 내세의 문제 또는 형이상학의 문제에 관심을 갖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불교 조차도 민간신앙으로서의 기복 종교로서만 그 명맥을 이어갈 수 밖에 없었다.

조선 말기에 천주교가 들어오게 되면서 세계에서 가장 많은 수의 순교 성인이 배출되고, 지금 현재 다수의 신도를 가진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자리 잡게 되었다. 그 이유로는 조선조 말기에 관리들이 부패, 타락하여 가렴주구에 지친 백성들이 쉽게 기독교 교리에 빨려들어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보다 먼저 천주교를 받아들였던 일본은 현재 기독교인 수가 전 인구의 10%에도 못미친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로는 일본의 국민성이 무종교성에 뿌리가 있는 데다가 신도사상이 일본인들을 결속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신도사상은 오직 관습적 제의(祭儀)의 형태로만 존속했을 뿐 종교의 차원에까지 미치지 못했다. 

우라나라에 기독교인이 급격하게 늘어난 것은 미국의 영향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해방 후 미국이 우리나라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면서 미국유학은 출세의 첩경이 되었고, 미국에 유학하려면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 유리했다. 교회에 나가면 구호물자라도 받아먹을 수 있었던 것도 이유였다. 특히 6.25이후 반공이 국시가 되자 정치가들은 공산주의자로 몰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기독교인이 되어야 했다. 크리스마스가 국정 공휴일이 된 것도 미국 때문이다. 


기독교가 하나의 사상으로서 다른 종교사상과 공존할 수 있다면 별 문제가 없지만 유아독존적이고 배타적인 쪽으로만 흐른다면 국가발전에 장애를 초래할 수 밖에 없다. 

현실에서의 안락을 거부하고 빈곤하고 열악한 생활환경을 기쁜 마음으로 수용하려고 하는 것은 기독교 뿐만 아니라 불교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소승불교를 채택해 고행주의적 수도방법과 인과응보 및 윤회의 교리를 신봉하는 국가는 모두 가난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앞으로의 정치는 종교를 어떻게 다루는가에 따라 그 판도가 좌우될 것이다. 어떤 나라의 종교가 현시로가 타협해 실용주의적 노선으로 가지 못하고 내세지향 위주의 현실도피주의로만 가면, 그 나라의 민주발전 및 경제발전은 침체될 수 밖에 없다. 

종교의 자유는 반종교적 사상을 주장하거나 유포할 수 있는 자유도 포함하고 있다. 


그래도 줏대는 있어야 한다


6공화국 초기에 대부분은 대통령인 노태우를 지지하고 전 대통령인 전두환을 욕했다. 그러나 물가와 부동산 가격이 치솟는 바람에 노태우를 비방하고 전두환을 지지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전두환을 지지하는 이들은 "5공 때는 그래도 집값이 지금처럼 오르지 않았다", "물가도 언제나 한 자리 숫자로만 올랐고 폭력사범이나 흉악범죄도 별로 없었다"라면서 노태우 정부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는 데다가 심지어 삼청교육대가 저지른 만행을 잘한 일이라고 하기도 한다. 흉악범들이 설치다 보니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5공화국 때 물가가 별로 안오르고 노사분규가 없었던 것은 삼청교육대 식으로 폭압적으로 눌렀기 때문인데 사람들은 이것을 모르고 치솟는 물가고에 따른 당장의 생활고 때문에 옛시절을 그리워하고 있다. 

정치문제나 이데올로기 문제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문제는 경제문제, 구체적으로는 경제적 형평의 문제이다. 일반 서민들이 열심히 정직하게 일하면 어느 정도 거기에 따른 보람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 줘야 하는데 요즘 우리나라의 형편은 그렇지 못하다. 


공자의 생각에 따르면 정치는 족식(경제)과 족병(국방), 민신(정부에 대한 백성의 믿음)이 세가지를 잘 통제하면 모든 문제가 풀릴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민신이라고 말했다. 족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정치에 가장 기본 바탕이 되는 민신을 회복하는 쪽으로 정치가들은 총력을 집중시켜야 한다. 

노태우 대통령의 우유부단성에 대해 국민들은 불평이 많고 이로 인해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대한 향수와 그리움을 더 느끼게 만드는 결과가 발생되었다. 

영웅주의적 발상 이나 통치권자의 카리스마에 대한 동경은 21세기에는 불식되어야 한다. 대통령이 전지전능한 신이 아닌 평범한 보통 사람이 되어야 한다. 


현대판 암행어사는 필요없다.


암행어사는 조선시대 후기에 활용된 임시관직으로 임금 직속이고 지방에 파견되어 지방관들의 잘못을 살펴서 마패로 자신의 신분을 밝힌 다음 크게 잘못한 지방관의 관인을 뺏고 봉고파직을 하는 업무와, 백성들의 사정을 조사하는 업무를 수행했다. 암행어사로 임명되면 부모나 임금이 죽더라도 자기에게 부과된 일을 끝마치기 전에는 돌아올 수 없었다.  

이 제도는 처음에는 많은 효과를 거두었으나, 숙종 이후 당파싸움으로 인해 정치적 색채를 띄게 되었고, 심지어는 고관들이 자기들의 비행을 감추기 위해 심복으로 하여 암행어사를 미행해서 그 보고에 따라 어사를 탄핵하는 일도 있었다. 이렇게 되자 민정을 살펴 사실대로 임금에게 보고하는 본래의 목적은 달성하기 어려워졌다. 암행어사 제도는 고종 때 까지 지속되었고, 그 이후로는 폐지되었다.

많은 단점이 있었음에도 조선 말까지 암행어사 제도가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는 조선 후기에 관리들이 극도로 부패하고 타락했기 때문에 암행어사의 파견이 절실히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암행어사 제도가 그 많은 폐단이나 부작용에도 길게 존속했다는 사실은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식으로 끊임없는 부패의 악순환이 계속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암행어사 제도 자체가 조선의 멸망을 예고하는 사건이었다고 볼 수 있다. 암행어사제도 때문에 관리들의 부패가 더 교묘해졌다고 할 수 있다. 


근래에 와서도 대통령 특명으로 암행어사와 비슷한 특명사정반을 조직해 고급공무원의 비리를 조사하지만 결국 큰 고기(빽 있는 사람)는 놓치고 애꿎은 송사리(빽 없는 사람)만 잡아들인다는 우려가 있다.

  

박정희 대통령 때 만들어진 새마을운동 본부는 5공화국 떄 극단적인 부패와 권력남용을 자행하는 어용단체로 전락했고, 5공화국 초기에 깡패소탕과 공무원 숙청바람이 불었는데 지금(노태우) 정부에서 그때 억울하게 당한 사람들을 달래느라 크게 애를 먹고 있다고 한다. 

TV프로그램을 통해 교통순경의 비리가 드러났고(당시 순경들은 박봉에 시달리고 있었다), 결국 이들은 면직되었다. 그런데 이 면직된 순경들이 사는 집은 아주 초라한 전셋방이었고, 국민들은 더 큰 비리를 파헤치지 못한다고 불만을 가졌다. 

공무원들을 지나칠 정도로 엄하게 다스린 나라치고 안 망한 나라가 없다. 대표적인 예가 진(秦)나라이다. 

진시황은 강력한 중앙집권제도를 실시해 지방관리나 지방 장교들을 엄하게 통제했는데 이것이 진나라가 멸망하게 된 요인으로 작용했다.

진시황 사후 행정관료나 군인들이 들고 일어났다. 반란을 일으킨 군인들은 대부분 군법을 어긴 사람들이었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으니 그럴 바에야 반란군에 가담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유방과 항우가 세력을 조직하자 많은 문, 무관들이 그들 밑으로 몰려들었다. 


**4. 19를 주도한 학생세력은 장면 정권이 3.15 부정선거 사범들을 미지근하게 처벌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해서 국회에까지 몰려 들어가 소란을 피웠다. 그러나 장면의 태도는 민주적이고 합법적이었다. 아무리 자유당 부패가 밉다고 해도 법은 법대로 집행되어야 하는 것이지 소급입법은 절대로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국민들 대다수는 장면을 겁 많고 맥 없는 사람이라고 조소했고, 그 결과 5.16 쿠데타는 국민들의 저항 없이 성공할 수 있었다. 5.16후에 박정희 정권은 국민들이 원하는 대로 3.15 부정사범들을 위헌적 절차를 통해 강력 처벌하였다. 이에 국민들은 박정희 정권을 지지했고, 학생들 또한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이러한 밀어붙이기 식의 속시원한 행정처리 습관은 위헌적 조치인 '유신'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유신 말기에 온 나라에서 장발 단속을 벌이고 대마초 연예인들을 징계한 것도 국가원수의 강력한 의지표명 덕분이었다. 

법 위에 법이 있고, 기관 위에 기관이 생기는 것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완전히 길들여졌다.


그러므로 앞으로 정부당국이 해야 할 일은 행정의 분업화와 자율화를 실제화시키는 일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는 사회라고 볼 수 있다. 불법 음란비디오는 절대 못 보게 되어 있는데 볼 놈은 다 본다. 매매춘도 법으로 금지되어 있는데 할 놈은 다 한다. 재수 없는 힘 없는 놈은 걸리고, 힘이 있거나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은 빠져 나간다. 

모든 것은 일단 자율화시켜 놓고나서 철저히 관리해 나가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인데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안타깝다(저자의 생각).


신생 문화부


문화부 장관이 할 일은 각종 검열제도의 철폐와 작가들에게 '상상력의 자유'를 불어 넣어 주는 일, 문교부(교육부)와 협력하여 예술적 창조력을 가진 학생들이 마음껏 자신들의 '끼'를 펼칠 수 있도록 밑바탕을 만들어 주는 일, 고급문화와 대중문화 사이의 두꺼운 벽을 부수고 보다 보편적이고 유희적인 대중문화를 창출해내는 일이다. 

어설픈 학자 출신의 장관보다는 차라리 행정관료 출신이 낫다. 


교수, 정치적 눈치꾼 상


교사와 교수는 학생을 가르치지만, 교수는 연구분위기의 보장이 추가된다. 요즘에는 대학교수 지망생이 훨씬 늘어나 박사학위가 교수자격증처럼 되었지만 10년전 만 해도 석사도 교수가 될 수 있었다.

석사는 학사(4년)보다 2년 더 공부했다는 게 다른데 일단 교수가 된 다음에 받는 사회적 예우는 하늘과 땅 차이로 다르다. 그러다 보니 전문분야에 대한 소양이나 연구자질과는 별도로 일단 교수가 돼놓고 보자는 식의 한탕주의의 분위기가 대학사회에 만연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교수가 된 사람들일수록 더욱더 권위를 가장하고 도덕을 내세우면서 공부와 사색보다는 명예욕의 충족에 혈안이 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교수로 채용될 때 우여곡절을 많이 겪었거나 누군가로부터 강력한 조력을 받았다면, 그 사람은 일단 교수가 된 다음에도 당당한 단독자로서의 개성을 십분 발휘하는 것이 힘들어진다. 자기를 끌어준 선배 교수나 보직 교수의 눈치를 살펴야만 하고, 그러다 보면 학파가 아닌 단순한 인맥에 의한 파벌에 휩쓸리기 쉽다. 

유신시절부터 시작된 교수 재임용 제도, 승진 시의 심사제도(논문 이외의 요소, 예를 들어 학자적 품위, 학생지도 실적 등 모호한 기준이 많다)등 관료주의적 행정의 잔재가 아직도 많이 남아 있어, 교수의 개성적이고 주체적인 사유와 판단에 지장을 초래하고 있다. 

교수는 자기의 전공분야에 대한 독자적 탐구만을 업으로 살아가야 한다. 대학은 다양한 이론과 사상의 전시장이나 토론의 장소가 되어야 하지, 통일된 의지의 집합소가 되어서는 안된다. 어떠한 시론이나 억설조차도 용남되어야만 하며, 그것이 정상적인 비판의 절차를 거치지 않고 일방적으로 매도되어서는 안된다.


예수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고 했는데 이 말은 거꾸로 "자유가 너희로 하여금 진리를 발견케 하리라"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독일에서는 "대통령보다 높고 하느님보다 낮은 것이 대학교수"라는 말이 통용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대학제도와 독일의 대학제도는 다르지만 우리나라의 대학에서도 이 말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대학에 어용교수도, 무능교수도, 속물근성에 노예가 된 교수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한 나라의 학술과 문화를 진흥시키기 위해서는 이들에게 참된 자유를 부여해야 한다. 말하자면 이들을 건방지고 오만불손한 사색꾼으로 만들어 줘야 한다.

교수 재임명제도는 완전히 철폐되어야 하고 대학의 보직제도도 개선되어야 한다. 그리고 공정한 교수채용제도와 승진심사제도가 확립되어야 한다. 


2. 


백년대계 교육의 길


인구교육도 좋고 철학도 좋지만 무조건 여러 과목을 구멍가게식으로 늘여 놓고 많이 가르치기만 하면 좋다는 사고방식이 문제이다. 컴퓨터 교육이나 운전교육을 고교과정에 필수로 넣자는 주장도 거론되는데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중, 고등학교 교육과정이 비빔밥 잡탕식으로 돼버리게 된다. 

말로는 전인교육을 부르짖으면서 실제로는 지식전달 교육에만 치우치는 것, 이것이 중등교육의 실상이다. 

우리나라의 교육문제를 논함에 있어 가정교육이나 사회교육의 문제도 빠뜨릴 수 없다. 그러나 가장 먼저 논의돼야 할 것은 학교교육이고, 특히 중, 고등학교 교육이 제일 문제가 심각하기 때문에 먼저 논의되어야 한다. 


학교교육은 한 인간의 사고방식과 성격, 인생관과 우주관을 형성시켜 주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중등교육은 가장 감수성이 예민하고 지적 호기심이 강한 청소년들이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에서 보낸다는 점에서 볼 때, 한 사람의 인생을 좌우할 만큼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중등교육에 대한 점검이 시급한 이유는 대학입시 위주의 교육풍토 때문에 병들어가는 청소년들과 무분별한 학벌 인플레 현상, 사회에서 모든 문제들에 대한 궁극적 해결책이 중등교육의 근본적 개선책에서부터 비롯되기 때문이다. 

우선 중등교육을 바로 세워 놓아, 고등학교만 나오면 일단 교양인으로서의 자격이 갖춰지게끔 만드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개선책이 된다고 본다. 대학의 숫자를 아무리 늘려 놓아도 중, 고등학생들의 막연한 욕구불만을 채워 줄 수 없고, 대학졸업자들의 심각한 취업난을 감당할 수 없다. 대학교육을 전문교육으로 자리 잡게 하고, 중등교육을 전인교육으로 원위치시켜 놓아야 한다. 그런 바탕 위에서 초등교육과 대학교육의 질을 개선하고 차츰 교육 민주화를 도모해야 할 것이다. 

시급히 개선되어야 할 것은 중, 고등학교의 교육과정을 개편하는 일이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중등교육은 학자들의 '밥'노릇을 해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 고등학교에서 공부를 잘한다고 하는 기준은 오직 끈기와 참을성에 따라 판별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대입 학력고사 점수가 아무리 높다고 해도, 암기실력이나 요령껏 눈치있게 퀴즈풀이를 잘하는 실력을 칭찬할 수 있을 뿐, 진짜 실력과는 아주 거리가 멀다. 

학력고사 점수가 높은 학생이라고 해서 대학에 입학한 뒤 곧바로 우수한 성적으로 연결되는 예가 드물다는 것이 이 사실을 입증한다. 

학력고사의 문제가 진짜 독해력이나 문학적 심미안을 평가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닌 단순히 점수 차이에 의해 학생들의 우열을 가리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중등교육의 교과목 수를 대폭 줄여야 한다. 특히 고등학교 때부터는 문과와 이과의 구별을 뚜렷하게 하여, 문과 학생들에게는 복잡한 수학이나 물리, 화학을 가르칠 필요가 없고, 이과 학생들에게는 잡다한 사회과목이나 국어의 고문(古文) 등을 상세히 가르칠 필요가 없다. 문과, 이과를 막론하고 암기식 지식 주입 위주의 교과과정을 지양해야 한다. 

물리과목의 경우는 '우주는 왜 생겼나', '상대성 원리란 무엇인가' 등을 과학 철학적 입장에서 논술식으로 서술한 교과서를 가지고 가르쳐야 한다. 생물의 경우는 '사람과 동물 차이는 무엇인가', '왜 인간은 직립하게 되었나' 따위의 제목을 가지고 학생들이 보다 근본적으로 과학적 성찰에 임할 수 있도록 유도해 줘야 할 것이다. 설사 이과 전공의 학생이라 할지라도 멘델의 유전법칙 같은 것을 시시콜콜 도표식으로 가르쳐서는 안된다. 중등교육에서는 유전의 개념을 설명하는 데 그치고, 더 상세한 것은 대학의 생물학과에서 가르치게 하면 된다. 

따라서 현재의 잡다한 과목들을 국어, 외국어(영어, 제2외국어는 대학에서 하면 됨), 사회, 과학 등 네 과목으로 축소시키는 것이 바람직하고, 경우에 따라서 철학을 필수과목으로 넣어 다섯 과목으로 제한하는 것도 좋다.

*수학이 빠졌다!

음악, 미술, 체육은 특별활동으로 하면 되고 필수로 가르칠 필요는 없다. 


현재의 중등교육 과정은 미국의 실용주의와 실증주의 사조에 맞춰서 짜여진 것이므로 문제가 있었다. 

옛부터 우리나라의 교육은 어문교육 위주로 된 사변적이고 철학적인 것이었다. 해방 전까지만 해도 일본인들은 독일식 교육제도를 모방했기 때문에 지금처럼 자질구레한 공식의 나열이나 실증적으로 객관화된 사실 위주의 교육을 시키지 않았다. 이것은 단순히 독일의 교육제도를 본받은 것이 아닌 동양의 전통적 교육방법이었던 어문교육 위주의 교과과정에다가 유럽의 문법 및 철학교육 중심의 교과과정이 한데 합쳐져서 이룩된 것이었다. 그래서 그 때는 소학교(초등학교)만 나와도 면사무소의 면장일을 훌륭하게 수행할 수 있었고, 편지 한 장을 써도 듬직하고 그럴 듯한 문장을 구사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는 옛부터 과거제도를 실시했고, 시험과목은 오로지 문장 하나 뿐이었다. 글은 곧 그 사람의 인격과 교양을 대변하므로 요즘의 사법고시나 행정고시같이 형법, 민법, 행정법, 헌법 등 지엽적인 과목들을 테스트하여 지도적 관리를 뽑는 것보다 훨씬 더 효율적이고 현명한 방법으로 관리를 뽑았다고 할 수 있다. 

지엽적인 암기사항들은 일단 관리가 된 뒤에 추가로 공부하면 되는 것이지, 미리부터 거기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것이 우리 조상들의 사고방식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이라도 조상 전래의 교육철학을 다시 본받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되려면 먼저 사지선다형 객관식 문제 위주로 된 평가방법을 없애고 모든 문제를 모조리 논술식 출제방식으로 돌려놓아야 한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가장 중요한 교육 주체라고 할 수 있는 교사의 선발방법이다. 헌법재판소에서는 국립 사범대 졸업생들의 우선 임용제도를 위헌이라고 판결했는데 앞으로는 사범대학 자체를 없애야 한다.

사실 사범대학은 일제시대 때 관제교육을 철저히 시킨다는 목적으로 만들어졌고, 지금도 그 제도가 유지되고 있다. 사범대학의 교육과정은 일반대학에 비해 교직과목을 필수로 수강하게 한다는 점만 다를 뿐 그 외에는 차이가 없다.

그러므로 사범대학의 모든 학과를 일반학과로 전환시키고, 원하면 누구든지 교직과목을 이수할 수 있도록 기회를 줘야 한다.

교직과목도 없애는게 좋다고 보는데 올바른 교육이란 것이 교육학 관계의 과목을 몇 과목 수강했다고 해서 더 잘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교직과목 교수들이 반발할 것이므로 우선 모든 학생들에게 교직과목 이수의 기회를 고르게 주고, 그 다음 교사선발은 공립, 사립 막론하고 각 학교장의 재량에 맡기자는 것이다. 

국공립 대학들이 교수채용을 각 학교마다 독자적으로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 고등학교 교사채용도 반드시 그런(학교단위) 방법으로 해야만 학교간에 선의의 경쟁을 불러일으켜 우수한 교사를 선발할 수 있다. 

모든 대학생들에게 교직과목 이수의 기회를 주자는 것도, 될 수 있는 한 많은 교사 후보자들 중에서 교사를 골라내는 것이 우수교사 확보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훌륭한 선생님은 자격증 한 장의 유무에 따라 판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다음으로는 각 학교마다 전근대적이고 전제적 교육풍토를 고쳐야 한다. 자유 복장제도를 채택했다가 다시 교복제도로 환원되고 있다. 아직도 우리나라의 교육방법은 '무조건 억제시키기'와 '우범자 식별해내기'식의 범주를 못 벗어나고 있다.

청소년의 성문제, 폭력문제든 모든 일탈의 원인은 오직 '숨 막히는 통제'에 있다. 머리를 어떻게 기르든 옷을 어떻게 입든, 심지어 화장을 어떻게 하든 간에 '무조건 내버려 두기'식의 생활지도 방법이 건전한 시민정신을 자율적으로 키워나가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본다.

현실과 안맞는 봉건윤리를 아무리 주입시켜봤자 학생들은 더욱 반발심을 느낄 뿐이다. 게다가 요즘 학생들은 경제발전 덕분인지 영양 상태가 좋아져서 체격도 크고 성징도 빨리 나타난다. 

그러므로 중, 고등학생들도 대학생들이 누리는 자유로운 복장과 꾸밈새, 자유로운 출석(대학처럼 결석이 1/3을 넘지 않는 범위에서), 학습을 허용해 줘야 한다. 술과 담배를 제외하고 자유연애를 포함한 모든 자유를 중, 고등학생들에게 허락해 줄 수 있을 때, 그때 비로소 그때에만 학생들에게 자기 조절 능력이 생겨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학생들은 물론 교사들에게까지도 혜택이 돌아가, 생활지도를 빙자한 자질구레한 잡무들로부터 해방되는 계기가 마련될 수 있다. 이 말은 교사와 학생이 일방적으로 간섭하고 타율적으로 종속되는 관계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여기에는 교사들의 개방적인 의식구조 함양이 전제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남은 문제는 대학입시제도이다. 현재의 중, 고등학교 교육은 대학입시제도에 따라 많은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대학을 신설하는 등의 무조건적 대학정원 증설을 하면 안되고 오히려 유럽 식으로 고등학교 졸업생의 대학진학율을 20%로 낮추어야 한다. 그래서 대학을 명실상부한 전문교육기관으로 만들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지금처럼 고등학교 교육이 입시 위주로만 흘러가는 것이 방지될 수 있고, 더 완벽한 전인교육 쪽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여기에 전문대학을 더욱 활성시키고 고교졸업자와 대학졸업자 간의 임금격차를 줄여나가는 것도 전제되어야 한다.

다음으로 대학입학 시험을 완전히 대학 자율에 맡교 지금처럼 6년 배운 것을 단 하루 동안 결판내는 식의 무모한 선발방법을 지양해야 한다. 그러므로 각 대학은 고등학교 3학년 2학기때부터 각각 다른 날짜를 임의로 택하여 학생들에게 여러 번 시험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좋다. 

대학간의 우열이 생길 것을 걱정해 학생들을 희생시켜가면서 한날 한시에 시험을 치르게 하는 현재의 제도는 반드시 재고되어야만 한다. 

어떤 개선책이 나오든지 간에 항상 전제되어야 할 것은 '민주적 교육풍토의 정립'이다. 관(官) 위주의 획일적 교육정책을 탈피해야 한다. 교육부나 시, 도 교육위원회의 권한을 대폭 축소시켜 나가면서, 모든 세부적인 교육지침을 각 학교의 학교장이 아닌 '교사, 학생, 학부모 협의체'의 결정에 따르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3


나(저자)의 길


지금까지 나는 마음만이라도 어린아이처럼 본능에 솔직할 수 있는 마음, 별다른 관념적 선입관이 없는 텅 빈 마음으로 살려고 노력해 왔다. 예수가 말한대로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을 받는다"고 믿었고, 불교에서 공즉시색(空卽是色)을 마음이 공(空)해야만 색(色)이 생긴다는 뜻으로 풀어, 사후 천당이나 극락에서가 아닌 현실 안에서도 어느 정도 천국의 상태가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때그때 닥쳐오는 본능적 욕구에 따라 살려고 노력했고, 원대한 이상이나 포부, 또는 형이상학적 잡념이나 이데올로기에 빠지지 않으려고 애썼다. 

예수는 "내일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했는데, 될 수 있는 대로 그렇게 살려고 애쓰고 있다. 이 말은 순간의 욕구에 충실하면서, 능동적으로 계획을 세워 가만히 마음을 비우고 앉아 어떤 계기가 마련되기를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것이다. 

우리가 이타주의적 시혜의식이나 정신우월주의에 빠져들지만 않는다면 그럭저럭 이 세상은 재미있는 세상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나의 쾌락을 위해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이기주의자가 되라는 말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남' 보다는 '나'로부터 출발하자는 말이다. 

석가모니는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存: 천상계와 인간계에서 '나'가 중요하다)이라고 해서 '나'로부터 출발했고, 예수는 현실의 아버지를 부정하고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선언함으로써 가족관계의 좁은 울타리로부터의 탈출을 시도했다. 

조국이나 부모, 또는 동포나 이웃에 대한 참된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우선 나 자신의 욕망에 충실할 수 있어야 한다. 나와 너가 서로 유착관계로 맺어져 있을 때, 그리고 개인적 욕망이 그럴 듯한 대의명분이나 이데올로기로 위장될 때, 개인이든 사회든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려 들어갈 수밖에 없다. 


잘먹고 잘살면 그만


자살하는 청소년의 수가 증가해서 교육계에서 골머리를 앓고 있다. 그런데 대개 자살의 근본원인이 대학입시에 대한 과중한 부담감과 공포감으로 되어있으나 진짜 원인은 다른 데 있다. 학업을 이유로 자살하는 경우는 극소수이고, 대부분의 청소년들은 불우한 가정환경에 대한 비관, 부모나 형제간의 갈등, 선생님들로부터의 소외, 남녀간의 애정문제 등으로 인해 자살을 결심하게 된다. 

경제발전의 결과로 청소년들의 발육상태가 좋아져 이미 성년으로서의 자질을 갖추고 있다. 그래서 성욕도 강하고 놀이에 대한 욕구도 강하다. 그런데도 성욕을 대리배설할 수 있는 통로는 오직 공부 뿐이다. 

공부에 능한 소수의 학생들은 공부를 통해 성취감을 맛보며, 일류대학에 진학하고자 애씀으로써 성욕이나 기타 다른 문제들을 대리배설할 수 있다. 그러나 나머지 대다수의 학생들은 학교에서도 그저 앉아있을 뿐, 하루종일 멍하니 백일몽에 잠겨들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선생이나 학부모들은 노력이 부족하다고 야단만 친다. 그리고는 공부를 위해 다른 생리적 욕구들을 절제하라고 강요한다. 

하지만 공부는 결국 인간이 선천적으로 타고난 여러 가지 끼나 재주 중 하나일 뿐이다. 그러므로 공부를 못한다고 해서 그 학생의 노력이 부족한 탓이라고 책망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청소년들을 교육할 때, "어떤 일에 종사하든지 간에 그저 잘먹고 잘살면 그만이다"라는 생각을 주입시키도록 애써야 한다. 

가정문제 등으로 고생하는 학생이 있다 하더라도 그들의 천부적 끼를 살려주어 당당한 주체성을 갖도록 해줄 수 있다면 청소년 자살은 줄어들 수 있다. 또한 사회적으로도 지나치게 학벌을 중시하는 풍토를 지양하도록 애써야 한다. 대학을 나와 봤자 고급 샐러리 맨이 될 뿐이지 진짜 행복한 상태(식욕과 성욕의 원활한 충족)에 무조건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맛과 건강


인간이 생명활동을 유지하는 데 있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식욕과 성욕의 충족이다. 식욕은 개체보존을 위한 것이고 성욕은 종족보존을 위한 것인데, 일단 뭐든지 먹어서 배가 불러야 그 에너지를 빌려 성생활이 가능해지기 때문에 우선 잘먹고 봐야 한다. 

한방의학의 이론은 '맛'의 이론으로 가득 차 있다. 서양의학의 시조인 히포크라테스도 음식과 질병의 상관관계를 중요시 해서 "음식으로 못 고치는 병은 의사도 못 고친다"는 명언을 남겼다. 그러나 서양의학에서 말하는 '음식'이란 '맛'을 뺀 '영양소'의 의미를 지닐 뿐이다. 단백질, 전분, 지방질을 비롯한 각종 비타민과 미네랄에 대한 연구는 지금까지도 서양의학의 대종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맛'의 요소를 여전히 무시하고 있다. 

동양의학에서는 옛부터 '맛'만을 위주로 모든 음식물과 약초의 의학적 가치를 가늠하였다. 동양의 모든 학문은 원래 분석적이지 않아서 영양소를 분석할 수도 없었고, 서양의 분석방법론이 도입된 이후에도 한방의학의 치료방법론이나 예방의학적 개념에는 영양소의 분석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동양의학은 모든 질병치료와 건강관리의 소임을 과학적 분석장치가 아닌 '혀'에 맡기고 있는 셈이다. 그만큼 동양사상은 인공이 아닌 자연에 따르면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다는 믿음이 바탕에 깔려 있다. 

우리의 혀를 통해 느껴지는 '맛'은 우리의 건강을 지탱시켜 주는 의사 역할을 한다. 그런데 요즘은 조미료, 식품첨가물 등이 사용되어 혓바닥을 마비시켜 맛을 통한 건강유지가 어렵게 되어가고 있다. 쓸데없는 영양학설에 휘말려 들지 말고 미각을 소중히 가꿔나가야 한다. 


교복의 망령


교복으로 다시 되돌아갈 것을 주장하는 분들이 펼치는 논리는 대충 다음의 네 가지이다.

1. 빈부차이로 인한 위화감 조성

2. 학생지도의 어려움

3. 애교심 고취와 일체감 조성에 지장 초래

4. 사치풍조를 조장할 위험이 있다.

일리가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교복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면, 그건 국민 전체에게 유니폼을 입혀야 한다는 논리와 다를 게 없다. 

빈부격차의 문제는 반드시 극복해야 할 문제지만 그 문제에다가 교복 부활의 이유를 붙일 수 없다. 대학생들도 빈부 격차가 심하지만 지금 교복 없이도 그럭저럭 잘들 지내고 있다. 

학교 선생들이 모두 형사가 될 필요는 없다. 예전에 교복이 있을 때에도 일부 학생들은 사복으로 갈아입고 별의별 짓을 다 했었다. 그러므로 앞으로 학생들의 선도는 보다 더 자율적인 분위기 아래서 학생들 각자 스스로의 건전한 판단력에 의존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 

일체감이니 애교정신은 구시대적 사고의 산물이고, 이제부터 젊은 학생들에게 개인주의적 사고방식을 심어 줘야 한다. 일체감이라는 미명 하에 획일적 사고방식을 강요해서는 안된다. 비이기적인 개인주의의 토양 위에서 건전한 시민의식이 길러질 수 있고 따라서 보다 내면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애교심 역시 함양될 수 있다.

머리는 얼만큼 길러야 하고, 운동화는 이런 것만 신어야 하고 하는 식의 제한이 많아서 오히려 사치풍조가 조장되었다. 그래서 모두 다 비싼 상표에만 눈독을 들이게 되었고 창의적이고 세련된 멋을 가꾸는 것은 불가능했다. 


지금 대학생들이 누리고 있는 것 같은 자유를 그대로 고등학생들에게 허락해 주면 된다. 공부를 하든 안하든 절대로 간섭하지 않는다. 획일적인 규율을 강제하기 위해서 실시하는 전체 조회시간도 없애고, 담임교사제도도 없앤다. 이렇게 해서 반별 조회/종례시간도 없어진다. 교외 생활지도나 가정방문도 없고 특별히 문제가 있는 학생에 한해서만 전문적인 카운슬러(상담가)가 지도한다. 교사는 절대로 학생을 체벌할 수 없고, 오로지 교실 안에서만 가르치기만 한다. 

이런 것이 다 불가능하다면 우선 외모문제 하나만이라도 완전자유를 부여해야 한다. 그렇게만 된다면 고등학교 시절부터 미의식이 신장될 것이고, 미의식이 신장되면 사치와는 무관하게 세련된 외모가 가꾸어진다. 중학교부터는 좀 어렵더라도 적어도 고등학교 때부터는 각자가 멋을 낼 자유를 주어야 한다. 요즘 학생들은 영양상태가 좋아 발육이 빠르고, 고등학생 때 벌써 의젓한 신사 숙녀 티가 나는 학생들이 있다. 그러므로 더 이상 그들을 억지로 아이 상태에 머물게 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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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kywalker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