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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광수 교수의 "행복 철학"을 읽고

 

 

 

1. 인생에 별 기대를 걸지 마라

 

인생에 별 기대를 걸지 말아야 '웬만큼' 행복해질 수 있다. '과도한 기대'는 '과도한 절망'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추가로 설명하자면 과도한 기대는 소망하는 일의 성취를 불가능하게 하고, 시큰둥한 기대는 소망하는 일의 성취를 가능하게 한다. 

우리는 부모에 의해 태어났지 스스로 태어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원한을 지니지 말아야 웬만큼 행복해질 수 있다. 인생살이를 힘겹게 하도록 만든 부모를 용서하라.

 

허무주의를 삶의 지표로 삼으면 어떠한 어려움과 고난이 오더라도 어느 정도 견뎌낼 수 있다. 절망보다 더 화근이 되는 것이 희망이다.

+내 의견: 먼나라 이웃나라 미국 역사편에서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유럽에 대공황이 닥쳤는데 전쟁의 상처 때문에 견딜만 했고, 반면 미국은 무기를 팔고 주가의 상승으로 이익을 보다가 종전(1차 세계대전의 종전) 10년 후 대공황이 닥쳤다. 이때 미국이 입은 타격은 고통스러운 타격이었다" 라고 적혀있다. 이 글은 허무주의가 고난을 견딜 수 있다는 것을 뒷받침하기 위해 적은 것이다.

 

저자(마광수 교수)가 중학교, 고등학교 다닐 때 교장선생님은 자주 "젊은이들이여, 야망을 가져라!"라는 훈시를 하곤 했다. 야망은 만능이 아니라 '허망'으로 이어지기 쉽다. 나폴레옹과 히틀러는 야망으로 인해 비참한 지경에 이르었고(나폴레옹은 세인트헬레나로 유배되었고, 그 곳에서 위암으로 사망, 히틀러는 벙커 안에서 자살).

행복한 삶은 '적극'보다 '소극'을 택하는 것이 나은데 부조리한 삶의 전쟁터에서 적극적으로 앞서 나가는 것은 실패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자존감', '의지력', '긍정적 사고', '패기', '용기' 이런 말에 겁을 먹을 필요도, 압력을 받을 필요도 없다. 저자가 젊었을 때 미국 목사가 쓴 "정신력의 기적"이란 책을 읽고 반했다가 다시 읽으니 '허망한 희망'을 심으려는 내용의 글이었다. 행복은 무모한 '정신력'이 아닌 '느긋한 체념'으로부터 온다

교수가 되겠다는 '야망'을 덮고 공부나 착실히 해나갔다. 그 결과 '요행'으로 교수가 될 수 있었다. 인생의 운(運)은 필연이 아닌 우연이고, "노력하면 성공한다"라는 사탕발림의 격언에 속아 넘어가서는 안된다. 그러면 반드시 실패가 오고, 추가적으로 '절망'이 온다. 필연을 거부하면 좋은 '우연'이 올 수 있다.

+내 의견: 내가 고3 때 수학을 죽어라 공부했지만 결국 9월 모의평가와 수능에서 5등급 맞은 기억이 떠오른다. 세상에는 오랜 시간 공부해도 좋은 성적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고, 반대로 적은 시간 공부해서 좋은 성적을 받는 사람들이 있다. 나의 고3 시절 경험 때문인지 이 말에 공감이 간다. 그러나 요즘 어른들이라면 이 말을 '헛소리'라고 할 것이다. 

 

반찬 없이 맨밥만 먹으면 맛이 없지만 오래 굶다가 맨밥을 먹으면 맛이 있다. 또는 맨밥만 먹다가 반찬과 같이 먹어도 맛이 있다. 행복은 이것과 비슷하다. 배고픈 상태에 있다가 맨밥을 먹게 될 때 느끼는 감정이 행복이다. 항상 맛있는 반찬과 밥을 먹으면 전혀 행복을 느낄 수 없다. 항상 행복하려고 하는 것은 욕심이고 욕심은 반드시 재앙을 부른다. 삶을 하찮게 여겨야만 작은 행복이나마 누릴 수 있다.

+내 의견: 만식당육(晩食當肉)이라는 고사성어가 있는데 배고플 때 먹는 음식은 고기와 같다는 뜻으로 굶주린 상태에 있다가 밥을 먹게 될 때 느끼는 행복과 같다. 

 

석가모니가 깨달은 진리 사성제(四聖諦)는 '고(苦), 집(集), 멸(滅), 도(道)'인데 '고(苦)'는 글자 그대로 "인생살이는 무조건 고통"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고'의 깨달음으로부터 출발해야만 '도'가 이루어진다는 말이고, 허망한 낙관주의를 경계한 말로써 건방진 자존심과 낙관주의를 끊어야 도(道), 즉 행복에 이를 수 있다. 

험난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비관주의'라는 예방주사를 맞아야 한다. 굵고 짧게 살기 보다 가늘더라도 길게 사는 것이 더 현명하다. 장기적인 계획을 세워 그 계획을 실현시킨다고 해서 원하는 결과가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그러니 인생살이는 그때그때 본능이 시키는 대로 '벼락치기 공부'를 하듯이 살아가는 것이 낫다.

벤저민 프랭클린이 주장한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말은 엉터리인데 하늘은 언제나 인간이나 자연에 대해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하늘의 보상'을 바란다고 해서 보상을 내려주지 않는다. 만약 그 '하늘'이 종교라면 종교에 의지해도 말짱 도루묵이다. 마음을 텅 빈 '진공상태'로 놓아두어라.

아무리 성공적인 삶을 살아 행복을 맛보더라도 인간은 결국 죽게 되어있다. 죽은 뒤의 천당/지옥/내세는 없고 이것은 종교를 이용해 돈을 벌려는 자들의 세속적 욕심이 만든 미끼일 뿐이다. 재벌가 집안에서 태어났어도 자살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니 너무 아등바등 세속적인 행복을 누리려고 노심초사하지 않는 것이 좋다. 삶에 별 의미를 두지 말고, 별 기대도 하지 말아야 오히려 행복해질 수 있다

 

2. 게을러져야 행복할 수 있다.

 

'일 중독증'은 '과로사'로 이어질 수 있다. 적당히 일하고 적당히 놀아야 하는데 이를 실천하기가 쉽지 않다. 될 수 있는 대로 게을러져야 건강도 유지되고 새로운 발상이 떠올라 창조적 생산을 할 수 있다. 

저자는 예술의 기원이 '게으르고 심심한 생활태도'에서 나왔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동굴에 남아 무료한 시간을 보내다가 자연스럽게 공상, 망상, 환상, 상상이 발동해 낙서와 노래를 하게 되고 이는 시/노래가 되고 그림이 되었다고 본다. 

그래서 예술가는 보통 사람들보다 좀 더 게을러지고 나태해져야 한다고 본다. 모든 아이디어 사업은 일종의 예술이므로, 고부가가치를 창출하여 물질적으로 행복한 삶을 누리려면 마음으로라도 게을러져야 한다.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이러한 게으름을 스스로의 개성과 장점, 자부심으로 받아들여야 하고 현상적 질서나 논리의 세계, 절박한 주위환경이나 현실상황 등에 눈길을 돌려서는 안된다. 개인주의적 태도와 이기주의에 가까운 자세로 비실용적이고 비이타적인 자기 자신의 몽상만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 

상상력(imagination)과 몽상(fancy)의 차이를 엄격히 구분 지을 필요는 없다. 오히려 논리적 질서를 가정하는 상상력 보다 무질서하고 잡다한 혼돈 속에 놓여지는 몽상이 창의적 사고에 더욱 필요할 수 있다. 

무슨 일이든 한껏 게으르다가 벼락치기로 하면 오히려 더 좋은 결과물이 나올 수 있다. '게으름'의 시간이 창조적 사고를 재충전해줄 수 있는 시간이 돼 주었기 때문이다. 일과표를 정해놓고 한치의 오차도 없이 꾸준히 근면한 생활을 하는 것은 오히려 낡은 사고만 재탕되게 할 뿐이다. 영감은 게으른 자에게만 벼락치듯이 생겨난다.

너무 바쁘게/부지런히 산다고 해서 성공이 보장되지는 않는다. 

결혼하겠다면 혼기에 연연해서는 안된다. 현재는 40살도 청춘이다.

게으름은 권태를 유발시키고, 권태는 변태를 낳고, 변태는 창조를 낳는다. 권태롭지 않으면 기존의 도덕률에 묶여 새로운 자신만의 주체적 판단력을 갖기 어렵고, 기존의 상식과 윤리를 벗어나야만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다. 게으름은 천재로 가는 지름길이다(예: 데카르트).

 

외국에 자주 나가야만 견문을 넓힐 수 있는것이 아니다. 책을 통한 간접경험만으로도 얼마든지 견문을 넓힐 수 있다. 외국어 공부에 게을러도 남보다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 외국 원서 한 권보다 번역서를 읽는 것이 경제적이고, 외국인과 대화를 해야 한다면 통역을 부르면 된다. 내가 영어를 하기보다 외국인이 한국어를 배워 한국어로 대화하면 된다.

바쁘고 부지런한 사람들에 대해 열등감을 갖지 마라. 이들은 머지않아 육체에 이상이 생긴다. 

꿈이 없는 현실은 무의미한 것이고, 꿈과 현실은 분리되지 않는다.  

 

3. 싱글라이프가 행복의 지름길이다.

*나는 여기에 대해 케바케(Case by case), 즉 사람에 따라 다르다고 본다. 마광수 교수는 결혼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지만 하고 싶다면 하라고 한다. 

 

아직도 "결혼해야만 섹스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결주의자들은 한시바삐 봉건윤리의 미망에서 깨어나라!

상대의 '돈'을 보고 결혼하는 사람은 얼마 안 있어 '자기 무덤 파기'의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정략결혼의 위험성). 

결혼은 '선택과목'이 되어야지 '필수과목'이 되어서는 안된다. 주변 사람들이 결혼하라고 권하는 '충고를 빙자한 간섭'에 절대로 속아 넘어가서는 안된다.

+내 생각: 가장 유명해진 김연자의 노래 '아모르파티'의 가사 중에 "연애는 필수, 결혼은 선택"이라는 가사가 있다. 현재 집값이 엄청 오르고, 직장에서 언제 짤릴 지 모르는 상황이여서 다수의 서민들이 결혼을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고 있다.

 

4. '복습형'과 '예습형'으로 본 행복론

 

복습형 인간은 늘 과거에 대한 회한에 젖고, 예습형 인간은 늘 미래에 대한 공포에 떤다. 복습도 예습도 다 필요없고, '현재의 쾌락'이 가장 소중하다. '쾌락'은 곧 행복이다. 

모든 신경증(노이로제)의 원인을 어린 시절에 겪은 정신적 상처(트라우마)에 돌리는 정신의학 이론에는 문제가 많다. '세월이 약'이 되어 트라우마는 사라져 버린다. 

저자는 중학교 입학시험을 치러야 했고, 전기 중학교 입학시험에 낙방, 후기 중학교에는 합격했다. 이때 전기 중학교 입시에서 낙방한 사실을 잊어서 고등학교까지 불만없이 졸업했다. 낙오하지 않고 버티게 하는 원동력은 '과거의 상처 잊어버리기'의 기술에 있다. 

+내 생각: 스케일이 작은 일에 대해 잊는 것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스케일이 큰 일(예를 들면 기업이나 국가에게 입은 피해)은 가능하면 잊지 말고 보상과 사죄를 요구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또한 타인은 앞에서 말한 스케일이 큰 일을 당한 사람에게 억지로 잊으라고도 할 권리도 자격도 없다. 

 

흔히 "과거의 경험을 거울삼아 행동하라"라는 말을 하는데 굳이 과거를 거울삼을 필요조차 없고 잊는것이 최고이다. 과거와 현재 사이에 인과 관계는 없기 때문에 과거에 얽매이면 안된다. 마찬가지로 전생과 현생 사이의 인과 관계도 없기 때문에 윤회설에 겁을 먹으면 안된다. 언제나 현재만 생각하라 어제도 내일도 생각하지 마라. 

프로이트 학파에서는 변태 섹스가 어린 시절의 정신적 트라우마 때문에 생긴다고 주장하지만 저자는 약육강식으로 점철된 자연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사디스트가 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본다. 

연산군은 폐위되고 유배된 지 1년도 못되어 울화병으로 죽었으나 광해군은 폐위되고 유배되었어도 과거를 잊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자연친화적 삶을 살아 60세를 넘길 수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부모에 대해 원망도 감사도 갖지 말아야 한다.

유교사상의 치명적 약점은 늘 "옛날이 좋았다"는 식으로 과거에만 집착한다는 것이다. 선비들은 항상 요순 시대만 꿈꾸며 미래지향적 사고를 차단시켰다. 그리고 지금이 옛날보다 불행하다고 생각해 투덜거리는 삶을 살았다. 

불교도 마찬가지다. 불교 신자들은 연기론적 인과론에 집착해 현재의 불행을 과거 탓으로만 돌리려고만 한다. 

기독교사상은 더 심하다. '원죄(原罪)'라는 망상에 얽매여 살아가기 때문이다. 인간이 모두 다 죄인이라면 평생 벌을 받아 마땅하고, 행복한 삶을 누리는 것조차 죄가 되기 때문이다. 

 

진정한 행복을 위해서는 순간의 본능과 순간의 직관적 판단에 충실할 필요가 있다. 순간의 본능을 방해하는 것은 생각 안의 도덕적 검열이고, 순간의 직관적 판단을 방해하는 것은 과거의 이성적 경험이다. 

과거에 대한 회한에 젖지 말고 미래에 대한 불안에 떨지 마라. 그리고 그때그때 닥치는 대로 순간적 본능에 몸을 맡겨라. 마치 게임에 몰두하는 것처럼. 그러면 일이 술술 풀린다. 도덕과 이성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바로 '행복에 이르는 첩경'이다. 

죄를 뉘우치거나 반성할 필요가 없고 그러한 인격수양은 본능적 초능력의 발휘에 방해가 된다. 우리는 뉘우칠 게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이 다 자연의 본성에 합당한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어린이는 예의와 염치 모두 모른다. 그런데도 그들의 눈동자는 어른보다 맑고 순수하며, 얼굴표정도 맑다. 이들은 도덕 교육의 세뇌를 받지 않아 스스로 뉘우칠 게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선과 악을 초월한 동심(童心)으로 돌아가야 행복을 쟁취할 수 있다.

그때그때 직감이 시키는 대로 행동하고 계산적으로 따져서 생각하지 마라. 따지면 따질수록 자연이 선물한 본원의 원시적 생명력을 잃게 된다. 

인상파 화가로 유명한 고갱은 가장으로서의 책무와 좋은 직장을 버리고 그림을 그리기 위해 타히티 섬으로 가서 화가로서 신명나는 삶을 살았다. 이것이 진짜 행복이다.

+내 생각: 고갱의 행동에 대해서 할 말은 없지만 고갱처럼 하고 싶다면 신중하게 생각하라는 말을 하고 싶다.

 

5. 당당한 쾌락주의로 무장한 '놀이꾼'이 되라.

 

중국의 철학자 고자(告子)는 '식색성야(食色性也: 식욕과 성욕이 인간의 본성이다)'라고 하여 인간과 동물의 차이가 없음을 역설하면서, 하늘의 뜻을 빙자한 인의예지(仁義禮智)같은 인위적 도덕률들이 오히려 인간의 자유로운 행복추구에 족쇄를 채운다고 주장한다. 

지금까지 통용되어온 행복론의 본질은 쾌락주의에 반하는 금욕주의적 인생관에 있는데 이것은 일반 민중을 수분안족(守分安足: 분수를 지켜 만족함)하게 하는 쪽으로 유도하여 스스로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특권계급의 저의가 깔려 있다. 

성(性)에 관해 고대 황제들은 스스로 하늘을 대신한다는 구호를 내걸고 후사를 얻는다는 이유와 보신을 핑계로 수백명의 후궁들을 끼고 살았는데 반해 일반 민중들에게는 도덕을 핑계로 성적(性的) 쾌락에의 탐닉을 금지시켰는데, 이는 민중들이 성(性)에 눈을 뜰 경우 자유주의적 가치관이 생겨 민중수탈이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생(生)을 부정하라는 말은 자살하라는 것이 아닌 생에 대한 책임감과 의무감으로부터 홀가분해지라는 말이다. 그리고 인생에서 특별히 형이상학적 보람을 찾기보다 순간순간의 육체적 쾌락을 통해 실질적 '행복'과 '보람'을 찾아라. 

쾌락들을 무시하고 무거운 관념으로써 그것을 억누르는 것만이 우리의 행복을 보장해 준다고 믿었던 중세의 금욕주의자들은 인류의 역사를 그르쳤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에서는 중세시대의 전철(前轍: 이미 지나간 바퀴자국, 과거의 실패를 의미한다)을 밟고 있다. 

중학교, 고등학교 교실에 급훈/교훈을 게시하는 것보다 학생들의 신체발육에 따라 높아진 성적(性的) 욕구에 맞는 성교육과 피임교육을 해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 또 피곤한 교사들을 '연수'라는 명목 하에 억지로 집합시켜 무거운 교육철학을 주입시키기보다 교사들의 잡무 시간을 줄여준다거나 근무 환경을 개선해 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 대학도 마찬가지로 교수가 독자적 학문 탐구와 교육과정 개발 등에 들이는 시간보다 교수 상호간의 인간 관계나 학교 행정당국의 눈치를 살피는 데 많은 시간을 쏟아붇고 있다. 

 

정신적 행복감은 그 자체가 모호해서 실체를 파악하기가 어려운데다가 권력에 의해 악용되기 쉬워서 위험한 것이다. 국가를 위한 충성에서 오는 정신적 행복감은 전사(戰死)를 기쁨으로 받아들이게도 하고, 잔인한 집단살상을 보람된 일로 느끼게 한다. 자식을 잘 기르는데서 오는 정신적 행복감은 바로 효(孝)사상의 강요로 이어져 강압적 지배 이데올로기로 변하기 쉽다. 사제 간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앞으로의 행복론은 정신적 메카니즘보다 육체적 메카니즘 위주로 쓰여야 한다. 

육체적 행복감은 집단적 행복감과는 거리가 있다. 그것은 '개인적 행복감'일 수밖에 없고, 따라서 철저한 개인주의적 사고로 무장되어 있을 때만 가능하다. 

타인이 보기에 괴상하고 변태적 방법으로 관능적 쾌감(또는 행복감)을 충족시키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그 사람이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한 그 사람의 행복추구 방법을 나무라서는 안된다. 과거에 남자들이 장발을 했는데 정부에서는 이를 퇴폐척결이라는 명분으로 규제했다. 

도덕은 소중한 것이고, 소중함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권력자들이 지나치게 도덕을 강조해 그것을 기득권 유지의 수단으로 삼다보면, 사람들은 곧바로 도덕에 싫증을 느끼고 도덕불감증에 빠지게 된다. 노자가 도덕경에서 "도덕을 없애야 도덕이 선다"라고 말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창조적 인간'이 되는 것만이 행복을 획득하는 길이고, 창조적 인간은 '놀이하는 인간'과 같다. 또한 창조적 놀이꾼이 많은 사회일수록 발전의 속도가 빨라진다. 노동집약적 산업보다 기술집약적 사업이 낫고, 기술집약적 산업만큼 중요한 것이 '창조력에 바탕하는 산업'이기 때문이다. 

창조적 인간은 어린아이처럼 솔직하고 단순(야)해서 세상물정을 잘 모르며 질투심이 적은 인간이다. 또한 상상력이 풍부해서 공상에 빠지는 것을 즐긴다. 

창조적 인간 또는 창조적 놀이꾼이라는 말은 문학인, 예술인으로 국한하지 않는다. 어떤 종류의 일에 있어서도 창조적 인간이 더 많이 필요해진 것이 선진사회를 향해 달려나가는 우리나라의 현실이라고 볼 때, 폐쇄적이고 전체주의적 봉건윤리에 의한 놀이욕의 억압과 성욕의 억압을 경감시켜야 한다. 그래야만 국민적 울화에 의한 파괴적 기(氣)로 인해 발생하는 성범죄 및 대형사고에 따른 비명횡사를 막을 수 있고, 나아가 국민 모두가 창조적 일에 몰두할 수 있어 국가 발전의 기틀이 튼튼해진다. 지금이라도 몰개성적인 교육제도와 폐쇄적 억압의 논리에 바탕하고 있는 문화정책을 바꿔야 한다. 이제부터는 '수구적 봉건윤리와의 싸움'이 행복의 쟁취를 위한 새로운 사회운동으로 시작되어야 한다

+내 생각: 수구적 봉건윤리와 싸움 이것이야말로 한국을 변화시킬 수 있는 원동력이다. 

 

6.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받아들여라.

 

외모 컴플렉스와 재능에 대한 컴플렉스는 누구에게나 있으므로 무작정 불만을 갖는 것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정신적, 육체적 조건을 허심(虛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조선시대에 신분제도가 있듯이 현대에도 귀족과 평민의 구별이 있다. 우리가 평민에 속한다고 해서 그게 억울해서 자살할 것이 아니라면 주어진 조건을 수긍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삼아 살아가는 수 밖에 없다. 

"하면 된다!"라는 암시를 하거나 악착같이 덤벼드는 것이 아닌 "돼도 그만 안돼도 그만"이라는 태도로 매사에 임하는 것이 좋다. 

자신이 처한상황을 일단 인정하고서 끈질기게 '때'를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타고난 성품을 바꿀 수는 없고 마음/인격 수양한답시고 시간을 낭비하지 마라. 

자기의 직업적 적성을 일찍 파악할수록 행복한 삶을 사는 데 유리하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려고 애쓰지 마라. 그런 자리일수록 '책임'도 많아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학생이라면 공부를 못한다고 한탄하지 마라. 공부 대신 노래, 그림, 장사, 만들기, 사교, 기타 등등의 여러 재주가 있을 수 있다.

우물 밖에 나가서 뱀에게 잡아먹히기보단 '우물 안 개구리'가 나을 수 있다. '나의 행복'과 '남의 행복'을 비교하는 것은 질투와 심통의 나락으로 추락하는 길이고 불행의 원인이다. 

"천재는 1%의 재능과 99%의 노력으로 생겨난다"는 말은 틀렸고, "천재는 1%의 노력과 99%의 적성으로 생겨난다"가 맞다. 자신의 욕망과 적성을 잘 조화시켜 나가야 행복해질 수 있다.

역경에 처했을 때는 절망으로 도피하거나 억울해하지 말고 자신의 실존을 직시해야 한다. 그리고 마음을 가라앉히고서 자신의 운이 통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궁하다 보면 언젠가 통하게 되어있다. 

'저 잘난 맛'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열등감에 시달리지 말라. '나 자신의 본성'은 부모가 요구하는 인간상과 무관하다. 부모의 권유/강권에 무조건 따르다 보면 불행해질 수 있다. 그럴 땐 과감히 불효자가 되어야 한다. 

+내 생각: 원래 유교에 대해 알아보다가 부모의 말에 무조건으로 따르는 것이 효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러니 마광수 교수 말대로 아닐 때는 과감히 거절하라. 이것은 불효가 아니다.

 

7.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언제나 지금이다. 어제와 내일을 생각하지 마라. 어제 생각은 회한을 가져오고, 내일 생각은 쓸데없는 걱정을 가져온다. 

인간 예수는 "내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는 명언 중의 명언이다. 미래 걱정에 사로잡히다 보면 오늘이 피폐해진다. 

인생의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지 않는 것도 좋다. 모든 일을 그때그때 가서 벼락 직관과 벼락치기로 대처하는 것이 행복한 삶에 유리하다. 

행복한 삶은 미래를 차근차근 대비해나가는 성실한 자세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미래에 대한 태연한 방심상태에 의해 이루어진다. 

미래의 건강을 위해 계획을 세워 실행하지 마라. 채식을 하거나 운동을 규칙적으로 한다고 해도 어느날 갑자기 사고로 죽을 수 있거나 죽을 확률이 높다. 건강 염려증은 도리어 병을 일찍 불러온다. 

이성의 요구를 따르기보다 육체의 요구대로 움직여라. 내일을 걱정해 오늘 쓰고 싶은 돈을 아끼면 안된다. 오늘 돈을 마구 쓸 수록 내일 돈을 많이 벌게 되는 기적이 일어난다.

머리 굴려가며 계산할 필요 없이 현재의 욕망에 충실할수록 원하는 것을 빨리 이룰 수 있다.

내일의 행복을 위해 오늘의 행복을 희생시켜서는 안된다. 그러면 내일도 불행해진다. 

아무 걱정 말고 지금을 마음껏 즐겨라. 내일 세상이 망할지도 모르니 오늘 사과를 먹어라. 

살아있을 때 쾌락을 즐겨라. 있지도 않은 내세를 위해 쾌락을 참아가며 기도하는 것은 바보짓이다. 

작가는 장편소설을 쓸 때 미리 구상해서 쓰지 않고 "쓰다 보면 어떻게든 굴러가겠지"하는 식으로 처음부터 쓰고 본다. 그러다가 장이 넘어갈 때마다 그때그때 생각나는 대로 주인공의 성격에 맞는 내용을 써나갈 뿐이다. 이런 식으로 장편소설을 완성한다. 

항상 마음을 텅 빈 상태로 놓아두어야 한다. 그래야만 나중에 거기에 무언가가 채워진다. 인간 예수는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다"와 석가모니의 "공즉시색(空卽是色: 마음을 비워야 색(色), 즉 물질적 소득이나 쾌락이 생긴다)" 모두 이러한 의미를 담고 있다. 

 

8. 이중적 가치관을 버려야 행복해진다. 

 

로마의 멸망은 성윤리의 타락이 아닌 기독교의 국교화에 따른 내세중심주의(또는 정신우월주의)로 뒤바뀌었기 때문이다. 쾌락을 추구하던 시절의 로마제국은 강했다. 도덕의 타락보다 이중적 도덕의 극성이 로마의 멸망의 원인이라고 볼 수 있고, 로마에서 기독교가 정치세력화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중세 암흑기가 시작되었다. 

우리나라에서 범죄의 근본적인 원인은 한 개인의 육체가 급격히 죽어버리는 것과 비슷한 메카니즘에서 초래되었다. 즉 그동안 너무나 양기(도덕, 윤리, 검약 등) 위주로만 지탱해왔던 우리 사회가, 생활수준의 향상과 더불어 생겨난 폭발적 쾌락욕구를 적당한 음기(향락과 퇴폐)로 분출시키지 못하고 너무나 갑작스럽게 분출시켰기 때문에 생겨난 결과인 것이다.

양(陽)은 살고자 하는 욕구의 상징이고 음(陰)은 죽고자 하는 욕구의 상징이다. 삶의 본능과 죽음의 본능이 서로 적당한 밸런스를 유지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건전한 정신과 건전한 신체를 유지할 수 있다. 

양(陽)은 보존의 상징이 되고, 음(陰)은 파괴 또는 안정의 상징이 된다. 파괴의 상징이 안정과 맞물릴 수 있는 이유는 인간이 죽음을 맞아 땅 속의 유기물질로 환원된다는 것은 원래의 안정된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난의 경험이 많은 사람이 오히려 행복해진다는 것은 어느 정도의 음기가 항상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고난이 없이 잘나가기만 하는 사람의 심신은 100%에 가까운 양기만으로 이루어져 있고, 음기가 거의 없는 상탱다. 하지만 인간의 원초적 본능은 언제나 음양의 조화를 도모하려고 한다. 그런 현상이 잘나가던 사람의 돌연한 불행이다. 좌절을 경험하지 않던 사람이 사업실패로 몰락하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된다. 

표면의식과 잠재의식이 서로 불일치할 때 인간의 생명력은 그 괴리와 갈등에 못이겨 자포자기적 허탈상태로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자포자기적 허탈상태의 궁극적 도달점은 곧 인생 파탄이다. 그럴 경우 아무리 인격수양을 도모한다 해도 죽거나 고통받을 확률이 높아진다. 잠재의식의 원활한 활동은 육체적 쾌락의 능동적 공급을 통해 얻어지는 자연 그대로의 생명력인 것이다. 

 

9. 상상력을 적극 활용하라.

 

상상의 힘은 현실에 구속되지 않으려는 몸부림과 창조적 저항정신에서 나온다. 상상의 힘은 개인에게서 시작되지만 나중에 가서는 기성사회의 권위와 제도적 틀에 틈을 내고 마침내 그 사회를 변화시킨다.

이러한 상상의 힘을 두려워하는 것은 봉건 기득권 수구세력들이다. 저질이니 외설이니 하는 것은 상상의 역동성을 억압하려는 핑계에 불과하다. 도덕이니 규범이니 하는 잣대를 함부로 들이대는 것은, 상상의 힘을 두려워한 나머지 현실적 가치통념으로 상상의 힘을 옭아매어 사회적 파장을 최소화하려는 술수에 불과하다.

천진한 본성들이 성을 더러운 것으로 보는 위선적 사회문화 속에서 억압될 때, 갖가지 도착이 난무하는 '프로이트적 잠재의식'으로 나타난다는 게 라이히의 주장이다. 다시 말해 프로이트가 '도덕적 양심'이라고 부른 슈퍼에고(초자아)의 과잉이 모든 성 도착과 성범죄의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최근의 성애소설들은 프로이트적 관점보다 라이히적 관점에서 본능적 성을 다루고 있다)

상상의 힘은 기성 질서에 회의를 표시하며 온갖 규정된 것들에 대해 도전한다. 그래서 인류의 문화 발달이 이루어지고 새로운 패러다임이 산출되어 사회는 보다 진보하게 된다. 상상을 재판하기까지하는 사회는 문화적 후진성을 도저히 벗어날 수 없다. 

 

10. 건강과 행복

 

비타민 결핍증에 대한 공포는 오로지 제약회사와 일부 의사들의 합작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약 장사들과 일부 의사들의 결탁에 의한 의약품의 남용이 국민들이 건강을 해치고 있다. 특히 항생제의 남용이 그렇다. 제약회사의 선전에 속지 말고 의사들의 주장에도 무조건 속아 넘어가지 말자.

암에 걸리면 어느 정도만 치료를 받고 삶을 즐길 때까지 즐기며 살다가 죽는 것이 낫다. 이것은 양심적인 의사들이 주장하는 얘기다. 

어떤 병에 걸렸다면 적어도 3명의 의사에게 진찰을 받아봐야 한다. 오진율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여기서 의사란 (양)의사와 한의사를 말한다.

건강 염려증은 지독한 병이다. TV에서 의팍 프로그램을 내보내고 신문과 잡지에서도 내보내는데 거기에 나오는 의사들은 겁주는 얘기들을 많이 한다. 이들의 말을 무조건 믿으면 낭패를 보게 되는데 그 이유는 병에는 '모르는 게 약'일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건강염려증에 걸려 자주 건강검진을 받다가 오히려 병에 걸리는 바보짓을 그만두어야 건강하게 살 수 있다.

건강에 대한 지나친 관심은 오히려 병을 불러들이고, 건강에 대한 무관심은 오히려 병이 물러나게 한다. 

의사의 말을 100%믿지 마라. 자기에게 맞는 최고의 의사는 '혓바닥'이다. 영양학자들의 말을 무시하고 자기의 '입맛'을 믿어라. 음식으로 못 고치는 병은 약으로도 못고친다고 히포크라테스가 말했다.

병에 걸린 것은 네 탓이 아닌 부모의 유전자와 대기오염, 수질오염, 농약을 쓴 채소, 성장촉진호르몬을 주입해 기른 동물의 고기가 주 원인이다.

월급을 많이 주더라도 일을 너무 많이 시키거나 스트레스를 많이 주는 직장에서 일하지 마라. 과로사로 죽을 수 있다.

대한민국은 GDP가 아무리 높아도 질투와 중상모략, 남 헐뜯기, 튀는놈 매장시키기 등이 떳떳하게 활개 친다. 용기 있는 젊은이라면 한시 빨리 대한민국을 떠나는 것이 평탄한 삶을 살아가는데 유리할 수 있다.

육체적 질병 뿐만 아니라 그릇된 법이 야기하는 고통 또한 너무나 많은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많은 청소년들이 겪는 우울증, 자살, 탈선 등의 원인을 해결하는 방법은 미성년자의 나이를 만 17세 미만 정도로 개정하고 이때 철저한 피임교육을 병행한다. 자유를 주면 자율이 생긴다. 

 

11. 고독과 행복

 

우정에 너무 시간을 투자하지 말고 가족 간의 유대감에도 기대를 걸지 마라. 부모에 대한 효도나 형제간의 우애에도 나몰라라 식으로 시큰둥해질 필요가 있다. 

혼자 있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그래야만 외롭더라도 견뎌나갈 수 있다. 죽는 날까지 고도간 개인주의를 고수하라. 나를 진심으로 도와줄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어떻게 해서라도 홀로서기를 도모해야 한다. 

사회적 사교에도 과도한 시간을 투자하지 마라. 원활한 대인 관계를 유지하는 비결은 스스로 고독해지려고 애쓰는 데 있다. 남이 나를 찾아오게 해야지 내가 남을 찾아가서는 안된다. 

나와 타인을 비교하며 상심하지 마라. 행복을 가로막는 가장 해로운 것은 열등감이고, 열등감이 커지면 정신건강이 피폐해진다.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평생 외국 여행을 해본 적이 없고 자기 마을을 결코 떠나지 않았다. 세계를 다 돌아다녀봐야만 훌륭한 지혜를 터득할 수 있다는 그릇된 미망을 버려라. 한 장소에서 홀로 있음을 즐길 수 있어야 마음이 평온해진다. 

마음속으로라도 가족관계로 인한 온갖 의무감으로부터 탈출하여 스스로 홀로 독립하기를 시도해보라. 그러면 차츰 행복해진다.

공부도 독학이 최고다. 학원 선생이 빠르게 풀어주는 수학문제를 지켜보다 끝나는 교육방법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무슨 일이든지 혼자서 고독하게 파고들어야 한다. 나를 도와주는 것은 '나' 이외에 없다. 

한국의 못된 특성 중 하나가 집단주의다. 뭉치면 살고 헤어지면 죽는 것이 아니라 뭉치면 배가 산으로 가기 쉽고 헤어져 혼자가 되면 개성이 발휘될 수 있다. 

모든 고독은 의타심에서 온다. 의타심을 버리고 고독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진정으로 행복하다.

사람들은 자기가 할 수 없는 일을 남이 할 때 시기와 질투를 못이겨 공격을 시도한다. 아무리 가까운 친구라도 예외가 없다. 

 

12. 종교를 멀리하라.

 

한 사람이 망상에 빠져들면 그 사람은 노이로제 환자가 되지만 다수의 사람들이 망상에 빠지면 그것은 종교가 된다.

기독교는 죗값에 대한 공포를 조장하는 종교이고, 불교는 모든 사람의 불행이 전생의 업보 때문이여서 현생의 불행이 일어난다고 가르친다. 

사실 예수나 석가는 만민평등주의와 휴머니즘의 실천을 부르짖은 사회개혁가였으나 예수와 석가를 종교라는 권력집단이 우상화하여 이용하고 난 뒤부터, 그들은 공포와 전율의 대상이 되었다. 

공자의 미지생 언지사(未知生 焉知死: 아직 삶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라는 말은 우리에게 열심히 살아갈 생각만 해야지 죽음 이후의 일까지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과학의 발전을 막은것은 언제나 종교였다. 대부분의 종교는 죄의식을 지나치게 강조하며 신도들을 겁주고 윽박지른다. 평생을 원인 모를 죄의식에 사로잡혀 죗값에 대한 공포에 떨면서 살면 도저히 행복해질 수 없다.

종교 또한 자유로운 연애와 성을 훼방하여 행복한 인생을 불가능하게 한다. 성적 쾌락은 죄악시해서는 안된다. 

신(神)이 자비롭다면 노아의 홍수 이야기와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자기 자식들이 방탕하다고 해서 죽이는 아버지가 과연 자비로운가?

삶을 내세에 저당 잡히면 안된다. 내세를 증명한 사람은 없고, 죽으면 썩는다. 종교에 있어서 부모에게 불효자가 되어야 한다.

이데올로기와 종교는 서로 비슷하다. 특정한 이데올로기에 빠지면 그 이데올로기는 노예로 전락하기 쉽다.

순교자들은 헛되게 비명횡사한 사람들 뿐이다. 다른 종교를 믿는 나라에 가서 자신의 종교를 선교하다가 죽으면 그건 성스러운 죽음이 아닌 개죽음이다.

윤동주 시인은 한국의 현대시를 빛냈으나 부모의 종교인 기독교를 그대로 물려받아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그가 요절한 것은 잠재의식이 예수의 삶을 모방하려고 했기 때문일 수 있다.

교회나 절에 바치는 돈(헌금, 시주)을 차라리 복지기관에 기부하라. 그러면 진짜로 복을 받는다. 

결혼을 한다면 특정 종교에 깊이 빠진 사람을 배우자로 삼지 마라. 

 

조선왕조는 공리공론에 불과한 주자학(성리학)이라는 형이상학적 잡념에 매달려 500여년을 소모한 최악의 왕조였고, 결국 제대로 된 전쟁 한 번 못하고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신이든 하늘이든 하나님이나 기타 등등 잡귀신에 홀리지 않고 스스로 우뚝 설 수 있어야만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다.  

 

13. 마음의 행복에는 허무주의가 답이다.

 

무슨 일을 당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수 있는 버릇을 들여야 한다. 과도하게 기뻐할 것도, 슬퍼할 것도 없다. 세상살이가 대수롭지 않게 보이면 어떤 고난이 닥쳐오더라도 평정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고, 평정한 마음이야말로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허무주의는 한자로 체(諦)에 가깝다. 이 체(諦) 자를 체념, 단념, 포기 등의 의미로 사용하지만 원래의 의미는 깨닫는다는 뜻이다. 

그릇이 비어야 무언가를 넣을 수 있다. 이렇게 텅 빈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 허무주의다. 그러므로 허무주의적 자세로 삶에 임해야 행복을 채워넣을 수 있다.

인생을 돌격적인 자세로 사는 것은 아주 위험하고, 오히려 도피안(번뇌와 고통이 없는 경지로 건넘)적 자세로 살아가는 것이 나을 수 있다.

언어유희적 사변이나 공리공론적 철학에 빠져들면 안된다. 구 소련은 공리공론적인 마르크스 사상에 빠져들다가 해체되었다. 

인생은 허무하고 부질없는 것이다. 허무주의를 지향하는 노장사상에서 비롯된 도교사상은 방중술을 중요시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허무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삶 자체가 비극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았기 때문에 오히려 평온한 삶을 오랫동안 살 수 있었고, 석가모니 역시 인생을 허무하게 보았기 때문에 80세까지 살 수 있었다. 반면 자신이 슈퍼맨이라고 굳게 믿으며 신념으로 가득 찬 인생을 산 히틀러는 정신분열증 환자가 되어 벙커에서 자살했다. 

허무주의자는 절대로 과대망상증 같은 정신질환을 앓지 않고 조울증에도 안 걸린다. 기대가 없으니 절망도 없고, 따라서 평정한 정신 상태를 지속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이들은 사는 것의 본질이나 죽음의 본질을 놔두고 흐르는 물같이 인생을 담담하게 살기 때문에 마음이 늘 행복하다. 

 

14. 용감보다는 비겁을 택하라

 

남 보라고 용감한 체하는 것 같은 바보짓은 없다. 오십보 도망간 군인보다 백보 도망간 군인이 더 안전하다. 삼십육계 주위상계(三十六計 走爲上計)다. 그저 목숨 보전하는 것이 제일이다.

쓸데없는 영웅 심리를 발휘하지 마라. 자신의 용감성을 믿고 까불다가는 졸지에 피를 보게 된다.

뭐든지 화가 나는 일을 겪었을 때 곧바로 대응하면 안된다. 겉으로는 태연을 가장하고 두고보자 정신으로 나가야 한다. 싸워봤자 나만 손해다. 한고조 유방을 도운 한신이 젊었을 때 깡패들을 만났는데 이길 수 있었음에도 깡패의 가랑이 밑으로 기어갔다. 헛되이 싸워봤자 상처뿐인 영광이 되기 쉽기 때문이었다. 

인생을 살 때 앞뒤 가리지 않고 용감하게 돌진한다고 성공이 보장되지 않는다. 가끔 뒤도 돌아보고 소풍 가듯이 쉬었다 가야 행복을 얻을 수 있다. 

감나무 위에 올라가 감을 따다가 떨어지기보다 멍청하게 감나무 밑에 누워 입을 벌리고 감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게 낫다.

러시아에서 가장 존경받는 문인 푸시킨은 자신의 애인을 가로채간 남자에게 결투를 신청했으나 사격 솜씨가 형편없는 탓에 자기가 죽었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심한 모욕을 가하더라도 당장 용감하게 대응하지 마라. 비겁하게 또는 바보같이 실실 웃으면서 싸움을 피한 다음 장기적인 복수를 계획해 나가야 한다. 

그때그때 닥쳐온 상황에 따라 용감과 비겁 중 한 가지를 현명하게 선택할 수 있어야 행복해진다.

병자호란 때 비겁하게 항복한 것은 잘한 일이었다. 만약 죽기로 싸웠다면 백성들은 거의 도륙을 당하고 삼천리강토는 무자비하게 짓밟혔을 것이다. 

고려시대때 무신정권이 몽골의 침입에 맞서 항전한 것은 무모한 용감이었다. 왕과 권력자들은 강화도로 도망쳐 호의호식하면서 백성들만 들볶았다. 그 결과 귀중한 문화재들이 다 타 없어지고, 백성들이 엄청난 피해를 입었으며, 결국 무신정권도 무너졌다(이건 내 생각).

꼿꼿이 자란 나무는 좋은 재목감으로 지목되어 나무꾼이 벌목하지만(화, 禍), 꾸불꾸불 못생긴 나무는 재목감으로 쓸모가 없어 벌목되지 않는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그때그때 용감과 비겁을 잘 가려서 선택해야 한다. 

 

15. 남의 눈치를 보지 말고 살아라

 

욕망이 이끄는 대로 살아라. 남의 눈치를 보려고 들면 아무것도 할 게 없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이전에 개인적인 동물이다. 철저한 개인주의로 무장하고 집단을 따르는 것이 아닌 나의 주체적 판단대로 살면 당장에 불이익이 와도 결국에는 삶의 승리자가 되고, 그래서 행복을 만끽할 수 있다.

우리는 혼자 세상에 나왔다가 혼자서 죽는 외로운 인생이다. 부모, 형제, 배우자, 자식, 친구 모두 소용없다. 그러니 그 어떤 사람의 눈치도 보지 말면서 살고, 그 어떤 사람한테도 의지하지 말고 살아야 한다. 그러한 처신의 결과는 결국 실질적 행복으로 내게 되돌아온다. 

자기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 뿐이다. 그러므로 남의 눈치를 봐가면서 출세할 필요는 없다. 스스로 홀로 우뚝 서서 당당하게 세상을 헤쳐 나가라.

대학에 입학할 때 소신 지원을 하지 못하고 눈치 지원을 한 사람은 대학생활을 우울하게 해나간다. 그때의 시대유행이 어떻더라도 반드시 자기가 원하는 전공을 택해서 진학해야 성공한다. 

이순신은 정유재란 때 왜군의 함대를 격파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승산이 없다고 판단해 전투에 임하지 않았고 결국 파면되었다. 반면 왕의 눈치를 보던 원균이 명령을 받았으나 많은 함선들과 병사들을 수장시키고 자신도 죽었다.

세종대왕이 대신들의 눈치를 보면서 한글 창제를 강행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알파벳을 문자로 사용하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가 결혼을 결행하게 된다면 부모, 친척, 친구 등의 눈치를 보지 말고 자기의 판단력만 믿어야 한다.

설사 욕을 얻어먹더라도 항상 독불장군이 되어라. 그러는 것이 결국에 가서는 행복한 삶의 획득에 유리하다. 

우화에 나오는 불효자 청개구리처럼 부모, 스승, 어른 등의 권고와 반대로 가면 그 사람의 인생은 행복하고 성공적인 인생이 될 확률이 높다. 

진리라는 것에 눈치를 보지 말아야 한다. 예수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고 말했지만 진리는 자칫 도그마가 될 수 있고, 우선 자유로운 탐색이 있은 후에야 무엇이 진리인지 알 수 있다. 그래서 작가는 "자유가 너희를 진리케 하리라"라고 말하고 싶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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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kywalker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