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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사] 8.(서양교육사) 중세의 교육



중세시대는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476년부터 동로마가 멸망한 1453년(르네상스 운동 전)까지이다. 서로마 제국은 게르만족에 의해 멸망하고 혼란스러웠으나 기독교와 고대 그리스 문화에 의해 내/외적 통일성이 형성되었다. 로마제국의 사상, 기독교적 동기, 게르만족의 관습 등으로부터 엄격한 계급을 지닌 봉건국가가 성립되었고, 이로써 중세사회는 로마교황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와 민족적인 봉건국가에 의해 새로운 질서가 확립되었다.

중세는 고대의 문화와 사상을 바탕으로 기독교 사상에 의해 통일성이 형성되었고, 이러한 종교적 통일성은 교육이념과 내용의 통일성을 가져왔고, 단일한 교육제도의 형성을 가능하게 했다. 그 결과 중세 전반에는 기독교 교화를 목적으로 한 기독교 학교제도가 발달했다.

중세 중반기에는 세속적 교육이 등장했고, 봉건제도와 함께 기사교육이 정비되었으나 농민들을 위한 학교는 설립되지 않았고, 대신 가정에서 생활과업을 배우게 했다. 중세 후반에는 봉건제도가 붕괴되고 시민사회게 성립되어 시민학교와 대학이 출연하게 되었다.


기독교 교육


서로마 말기의 지배계급은 타락했고 대중들은 도탄에 빠졌다. 이로 인해 로마인들은 기독교로부터 정신적 위안을 얻었고, 그 결과 기독교가 로마사회에 수용되었다. 초기 기독교는 '하느님의 창조물이며 자녀'라고 해서 자유민, 노예 구분이 없었고, 이로 인해 로마제국은 기독교화되었다.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정치권력의 분산으로 로마교회의 정치권력이 강해졌고, 로마교회는 로마제국의 행정체제를 모방해서 교황 중심의 교회제도를 정비했다. 그 결과 교회는 국가를 대신해 교육의 실질적인 제공자와 지도자가 되었다.


중세 기독교 교육은 인간을 기독교적 인간으로 만들기 위한 교육이었고, 이를 위해 각 교회에 이교도를 개종하거나 기독교 교리를 가르치기 위한 문답학교가 세워졌다. 문답학교의 교사와 교회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한 고급문답학교가 있었고, 수준높은 교육을 통해 교회 성직자를 양성하기 위한 가장 높은 수준의 대성당 학교가 세워졌다. 이 대성당 학교는 중세교육의 중심을 이루고, 중세 기독교 사상의 근원이 되었으며, 이 학교의 교사들에 의해 스콜라 철학이 발전했다.


중세 전반기에 수도원학교가 출현했고, 이 학교는 수도사 양성이 목적이었으나 나중에 일반 아동들에게도 개방했다. 

초등, 고등과정으로 나누어 교육이 실시되었고, 초등과정에서는 읽기, 쓰기, 셈하기의 기본 교과와 음악, 라틴어, 문법, 시편 암기를, 고등과정에서는 7가지 자유교과를 가르쳤다. 그 이외에도 농경, 목공, 야금, 직물 등의 일을 통해 노동의 신성성을 강조했고, 고전을 필사하고 보존해 고대 문화를 전수했다.

 

세속교육


세속교육에는 기사교육과 시민학교가 있다. 기사양성을 위한 특별한 교육기관은 없었고, 기사가 되려면 기사 가문의 출신이어야 했다. 수업과정은 엄격하고 표준화되어 있었다. 6세까지는 가정에서 어머니나 시녀에 의해 순종의 미덕, 경건한 신앙심, 예의범절 등을 훈련받았고, 7세때 집을 떠나 13세까지(시동, page) 영주의 저택 또는 궁정에서 궁정생활의 예의범절과 종교의식, 읽기, 쓰기, 무예를 배웠다. 14세부터 20세까지(종자, squire)는 기사가 되기 위한 7가지 기예(승마, 수영, 검술, 궁술, 수렵, 장기, 시짓기)와 소양을 익혔다. 21세가 되어 기사로서의 모든 자격이 구비되면 특별한 의식을 거친 후 기사가 되었다. 기사제도가 사라진 후에도 귀족, 왕족, 신사교육의 지표로서 영향을 끼쳤다.


십자군 원정의 결과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도시가 발달되고 시민사회가 성립되고 신흥 시민계급이 형성되었다. 

초기에는 수도원학교나 교회학교에서 간단한 읽기, 쓰기, 셈을 배웠으나 13세기에는 시립학교(시민학교)가 세워졌다. 이 시립학교들은 교회학교제도의 정신을 따랐지만 세속적인 학교제도의 출발점이 되었고, 초보적인 수준의 교육이 이루어졌고, 도시와 의회가 교사를 채용했으며 대부분 독자적 감독기관과 학교규정이 있었다. 14세기에는 모국어 쓰기학교와 읽기학교가 설립되었고, 이 학교에서는 시민들에게 편지, 영수증, 증서를 작성하는 남자들이 어린이들에게 읽기, 쓰기, 셈하기를 가르쳤다. 중세 말에는 모국어 쓰기학교와 읽기학교 외에도 라틴어를 수업언어로 사용하는 라틴어학교가 있었다. 과거에 읽고, 쓰고, 계산하는 기술은 성직자, 상류귀족계급, 왕궁 관리만의 소유였으나 상류, 중간계급의 도시민들도 이 기술을 보유하게 되었다. 중세 말의 학교는 권위를 토대로 하는 순종적인 수업이 이루어졌고, 체벌과 엄한훈육, 많은 암기학습과 의무가 부과되었다.  


대학의 성립


1200년에서 1500년 사이에 대학이 성립되었다. 12세기는 학문의 거대한 발전을 가져온 시기로 기존의 학교들이 급격히 성장하는 사람들의 인식욕구에 더 이상 대처하지 못해서 학문연구를 위한 동료집단이 형성되었고, 이 집단이 확장되어 하나의 거대한 지식인, 학자단체가 되었다. 이렇게 대학이 형성(설립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성장해서 점차 확고한 형태를 띄게 된 것이다)되었고, 정신적이고 세속적인 세력들로부터 인정과 특권을 받았다.

대학(University)을 뜻하는 라틴어 'Universitas'는 학문에 종사하는 교사와 학생들의 단체를 나타낸 것이다. College는 원래 13세기 후반에 가난한 학생들을 돕기 위한 기숙사였고, 오늘날의 단과대를 뜻한다.

대학 설립에는 학문적, 의학적, 경제적, 정치적 측면이 있는데

학문적 측면에서 수도원과 대성당학교에서의 심오한 연구와 지식인의 배출이 목적이었고, 대성당학교에서 성경, 신학, 문법, 철학, 과학 등의 고등과목을 가르쳤으며 스콜라 철학의 기반이 되었다.

의학적 측면에서 전염병인 페스트의 유행과 십자군 전쟁으로 인한 부상자들의 증가로 인해 의술과 의학적 지식이 필요했고 이에 따라 의학 연구가 필요했다.

경제적 측면에서 중세 말기 상업과 무역의 발달로 인해 복잡한 이해관계가 형성되어 분쟁이 발생했고, 이러한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서 전문적인 법률적 지식이 필요했다.

정치적 측면에서 당시 대학은 황제, 국왕 또는 교황으로부터 사회적 명성과 권위를 인정받는 단체였고, 지배층이 자신의 지배에 두기 위해 각종 특권을 부여하면서 대학으로 공인받았다. 단체(대학 이전의 단계)와 국왕 간의 이해관계가 서로 맞아 떨어져 16세기 경에 유럽에 80여개의 대학이 설립되었다.

대학의 강의는 라틴어로 이루어졌고, 보통 신학부, 법학부, 의학부, 학예학부로 구성되었으며 학예학부에서 7가지 자유교과(신학, 법학, 의학의 학업 전 정통해야 할 기본과목)을 가르쳤다. 

대학에는 학문연구의 자율성과 권위, 자치권 등에 관한 특권이 있었고, 자체적으로 법과 행정권을 부여받아 치외법권적 특권을 지녔다.

학생들은 하급 학부(학예학부)에서 공부를 시작해 1년 반~2년의 과정을 마치고 시험을 통해 학사(baccalarius)가 되었고, 그로부터 2년 후에 학사들 중 소수만이 석사(Magister)자격을 얻었다. 석사자격 보유자는 하급 학부에서 2년 동안 가르칠 의무가 있었다. 석사 다음으로 박사(Doctor)학위가 주어지는 상급 학부를 위한 길이 있었고, 박사학위 소지자는 상급 학부에서 가르 칠 수 있었다. 

대학에서의 수업은 교회에 초점을 두고 강의(교재설명)와 논쟁(하나의 문제에 대해 한 학생이 의견을 제시하고 변호하면, 나머지 학생들은 반론을 제기한다)으로 이루어졌고, 수도원적 훈육 속에서 성직자들의 생활방식에 따라 생활했다.

중세 대학들은 지적 활동의 중심부로서 고전문화의 계승자가 되었고, 르네상스 운동의 바탕이 되었다.


교육사상가


아우구스티누스


아우구스티누스는 시대적으로 고대인이지만 중세 사상가이다. 신 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았고, 기독교 사상을 내면화하고 체계화했다. 기독교 교리와 이교도 사상을 통합해 새로운 신학체계를 형성했고, 고대사상을 기독교 교리의 주요 내용들을 설명하는 도구로 수용해 하나의 포괄적인 기독교 역사철학과 기독교 신학을 정립했다.

교육은 종교적 헌신이 요구되고 자체의 목적을 위해 이루어져서는 안되, 교수의 목적은 이미 내재하고 있는 지식을 상기하도록 학생을 돕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7가지 자유교과와 철학을 중세 수도원 교육의 핵심 과정으로 정착시켰고, 교리문답 교육에 큰 영향을 미쳤다.


토마스 아퀴나스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기초로 하여 신학, 철학, 전문 분야의 학문들을 통일하여 '하나의 전체(Summa)'로 총괄했다.

아우구스티누스와 마찬가지로 교사의 역할은 학생의 잠재된 인식을 명확하게 깨닫게 하는 보조자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이는 지식의 증명은 신의 작용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기독교 교리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종합해 스콜라 철학을 집대성함으로써 서양사상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준 사상가이며, 철학자, 신학자가 되었다. 또한 현대 미국 교육철학 중 항존주의 교육이론의 철학적 배경이 되었다.


참고자료: 

교육학적 사유를 여는 교육의 철학과 역사, 정영근 외 3인, 문음사

교육철학 및 교육사, 조경원 외 4인, 교육과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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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kywalker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