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사] 5.(한국교육사) 조선 개화기의 교육
조선 초기와 중기는 성리학적 질서체계로 국가를 유지했으나 후기로 가면서 실학사상의 대두, 서학(천주교)의 전래로 성리학적 기강이 해이해졌고, 고종 초기에 흥선대원군이 집권하여 쇄국정책을 유지했으나 대원군이 실각한 후로 문호개방을 하게 되었다. 근대학교는 선교를 위해 외국에서 온 선교사와 민간인, 정부에 의해 세워졌다.
이 시기의 조선 정부는 영어교육의 필요성을 깨닫고 신식교육기관인 동문학(同文學)과 육영공원(育英公院)을 세웠다.
동문학
동문학은 영어 통역관 양성을 목적으로 세워진 학교로 1883년에 통리기무아문에 부설되었다. 이 학교에서는 영어, 일어, 서양의 필산 등을 가르쳤고 졸업생들은 여러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했다. 1886년에 육영공원의 설립으로 문을 닫게 되었으나 여기서 영어를 배운 학생들이 육영공원의 교습 조교로 참여했다.
육영공원
1886년에 설립된 최초의 관립근대학교로 고종이 미국 공사 푸트(Foote)에게 교사 파견을 의뢰해 3인의 청년 선교사가 입국하여 설립되었다. 초기에 영어공부를 강조했으나 나중에는 영어로 지리, 수학, 자연과학, 국제법, 정치경제학 등의 신지식을 가르쳤다.
육영공원은 좌원(左院)과 우원(右院)으로 나누어 학생들을 선발했다. 좌원은 과거합격자 또는 연소한 현직 관리중에서 10명을, 우원에는 아직 과거에 합격하지 못한 사람들 중에서 20명을 선발했다. 실제로 육영공원의 학생들은 대부분 고급관리 또는 유명 양반가문의 자제였다.
육영공원의 학생들은 입학 전의 한문공부로 인해 기억력이 발달되었다는 기록이 있고, 졸업생들은 특별과 과거(문과의 2차 관문인 회시에 곧바로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음)를 통해 등용되었다. 그러나 정부 관리들의 이해와 지원 부족, 재정적 곤란, 학생들의 향학열 부족으로 외국인 교사들은 계약기간인 1894년까지만 근무하고 사퇴해서 결국 1894년(갑오개혁이 실시된 해)에 폐교되었다. 이 학교는 영국인 허치슨(Hutchison)이 인계받아 지금의 관립한성외국어학교로 통합되었다.
조선의 본격적인 교육개혁은 1894년 갑오개혁을 통해 이루어졌다. 갑오개혁으로 과거제도가 폐지되었고(신지식 시험으로 대체) 신분제가 타파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신분의 귀천과 문벌에 관계없이 인재를 등용하는 원칙을 세웠다. 이를 위해 학무아문을 설립했고 1895년에는 고종이 직접 교육입국조서를 발표하였다. 이에 따라 한성사범학교 관제(학교관제는 학교설립을 위한 기초법안)를 공포하였고 이 관제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학교 법규이다. 이후로 많은 학교관제가 공포되었고 이를 토대로 여러개의 관립 근대학교들이 설립되었다. 한성사범학교는 수신(충군애국과 신민으로서의 의무를 강조)을 주요교과로, 국어(독서, 작문, 습자), 산술(수학), 역사, 지리, 체조(체육, 무사적 용맹의 필요성 때문에 함)교육을 했고(이러한 교육활동에 대한 기록이 없어서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재학 중 학비가 지급되었으며 졸업시험으로 독서, 작문, 지리, 산술시험을 보게 해서 교사로서 근무할 수 있게 했으나 지방 임용을 기피해서 면직되는 사례가 빈번했다.
개화의 가장 중요한 수단은 교육이었고, 민간인들은 나름대로 근대학교 설립을 위해 정부 못지않게 노력했다.
1876년에 운요호 사건에 따른 강화도 조약으로 인해 1880년에 원산항이 개항되어 일본 상인들이 대거 진출하게 되었고 원산의 시장경제가 일본 상인들에 의해 잠식되자 원산 주민들은 자신들이 재정부담을 한다는 조건으로 근대학교 설립을 정부에 요청했고 원산학교가 설립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로는 교육을 통해 상실한 국권을 되찾겠다는 교육구국운동의 차원으로 사립학교들이 설립되었다.
1905년에 이용익은 교육구국의 이념에 따라 보성학교(현재의 고려대)를 설립했고, 1907년에 안창호는 대성학교를(1912년에 조선총독부에 의해 폐교), 이승훈은 오산학교(지금의 오산중, 고등학교)를 설립했다. 이들 학교는 민족의식이 강한 학교로 일제시대 때는 감시의 대상이었다.
개화기에는 개신교 및 천주교 선교사들이 자신들의 종교를 전파하기 위해 교육과 의료활동을 했다.
1855년 제천에 메스트르(Maistre) 신부가 배론신학당을 세웠고, 1861년에 성요셉 신학교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이 학교에서는 신부(천주교 사제)양성을 목적으로 한문, 라틴어, 수사학 등의 언어, 역사, 지리, 동식물학, 의학, 천주교 교리를 포함한 철학과 신학, 성가를 위한 음악을 가르쳤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천주교 박해가 이루어지고 있었고, 결국 1866년에 병인박해로 교장신부가 체포되어 순교됨에 따라 폐쇄되었다. 그 이후로 1887년에 용산신학교가 설립되었고 이 학교는 지금의 가톨릭대 신학부와 성신고등학교이다.
1885년에 북감리교(개신교 교파 중 하나) 선교사 아펜젤러는 배재학당(지금의 배재중, 고, 대학)을 설립하였다. '학당'이라는 명칭은 조선 초기 4부학당에서 따온 것이고 고종으로부터 "배재학당"이라는 현판을 하사받았다. 이 학교는 기독교인과 국가 인재를 양성하는것이 목적이었고 교훈(校訓)은 "큰 인물이 되려는 사람은 남을 위해 봉사할 줄 알아야 한다(欲爲大者當爲人役)" 이다.
1890년에 배재학당에서 보통과와 본과로 나누어서 보통과에서는 한문, 영어, 쉐필드의 만국역사 등을 가르쳤고, 본과는 영어과, 한문과, 지리과(지금의 대학 학과)로 나누어 고등교육을 실시했다. 또한 근대적으로 실험실습수업도 했다. 학자금 조달이 어려운 학생들의 아르바이트를 위해 자조부를 설치해서 붓, 구두 제작과 사환 일까지 하도록 했으나 실패하여 인쇄소로 대체했고, 제본소를 설치해서 이러한 학생들의 학자금 조달을 도왔다.
1886년에 스크랜튼(Scranton)부인은 이화학당(지금의 이화여대)을 설립했고, 명성황후로부터 "이화학당"이라는 명칭을 하사받았다. 이 학교는 최초의 여성교육기관으로 언문의 읽기, 쓰기, 편지쓰기, 영어와 재봉, 침공, 수예 등을 가르쳤다.
또한 언더우드는 고아들을 대상으로 "언더우드학당"이라고 불린 기숙사 학교를 설립했고 이후 경신학교로 명칭을 변경했으며 지금의 경신고등학교이다.
의사이면서 선교사인 알렌(Allen)은 의사 자격으로 조선에 입국했고 갑신정변 때 큰 부상을 입은 민영익을 치료해서 선교활동을 묵인받고 1885년에 근대식 국립병원인 광혜원을 설립하고 1886년에는 의료교육을 실시했다. 광혜원은 이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로 바뀌었다가 해방 후에 연희전문학교와 합쳐 지금의 연세대학교가 되었다.
육영공원은 좌원에 지원하는 사람들이 감소했으며 학업에 대한 열의를 찾아보기 힘들었는데 그 이유는 과거합격자이거나 관리신분이였기 때문이었고 반대로 우원에 지원하는 사람들에게는 커다란 혜택이였다. 육영공원 졸업이 관직을 보장받는 조건이 된다거나 또는 사회적으로 중요한 경력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문을 닫을 수 밖에 없었고 이것은 성균관의 전철을 밟은 셈이다.
갑오개혁으로 신분제도와 과거제도가 폐지되어 신지식 시험을 통해 관직에 오를 수 있었는데 근대학교에서 공부한 학생들에게 결정적으로 유리했고 특히 특정학교(관립 근대학교) 출신들을 관리로 임용하면서 이러한 학교에 입학하는 것이 출세를 위한 길로 인식되어서 이것은 오늘날 우리나라 교육계의 고질적 문제인 맹목적 교육열(학력주의 사회)의 근본이 되었다.
참고자료:
교육학적 사유를 여는 교육의 철학과 역사, 정영근 외 3인, 문음사
교육철학 및 교육사, 조경원 외 4인, 교육과학사
https://ko.wikipedia.org/wiki/%EC%9C%A1%EC%98%81%EA%B3%B5%EC%9B%90
https://ko.wikipedia.org/wiki/%EB%8C%80%EC%84%B1%ED%95%99%EA%B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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