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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불살조(殺佛殺祖: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

 

 

나는 소설 '상도'를 읽다가 이 구절을 접하게 되었다. 

 

"당나라의 선승 임제는 말하였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스승을 만나면 스승을 죽여라."

 

바로 그 순간 임상옥은 임제의 말처럼 석숭을 만났으며 마침내 석숭을 죽여버릴 수가 있었다. 임상옥은 석숭을 딛고 뛰어넘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 구절을 처음 접했을 때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스승을 만나면 스승을 죽여라"라는 말이 궁금하지 않았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 구절의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해 했고, 구글에서 검색을 하게 되었다. 

구글 검색을 하다가 '임제어록: 지금 여기서 자유로워라'라는 글을 읽었고,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이 글의 주소: dbr.donga.com/article/view/1303/article_no/3334/ac/magazine

religion-service-center.me/buddhism-quote/

 

이미 일어난 생각은 이어지지 않도록 하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생각은 일어나지 않도록 하면 그대들이 10년 동안 행각(行脚)하는 것보다 좋을 것이다. 나의 생각에는, 불법에는 복잡한 것이 없다. 단지 평상시에 옷 입고 밥 먹으며 일 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임제어록>

 

어느 스님이 제자를 불로 몽둥이를 휘두르며 물었다. "이 몽둥이가 있다고 해도 맞을 것이고, 없다고 해도 맞을 것이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맞을 것이다. 이 몽둥이는 있는가. 아니면 없는가? 말해보라." 스님은 제자가 깨달았는지, 다시 말해 제자가 현재에 눈을 뜨고 있는지를 확인하고 싶어서 이런 질문을 던졌다. 제자는 어떻게 대답해야 몽둥이 세례를 피할 수 있을까?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으로 유명한 <반야심경(般若心經)>을 떠올리면서 제자는 "있는 것이 없는 것이고 없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제자는 네 대나 맞게 될 것이다. '있다'라는 말을 두 번, '없다'라는 말을 두 번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너무 생각에 잠겨있을 수도 없다. 그것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스승의 몽둥이 세례로 이어질 테니까 말이다.

 

어떻게 대답하면 스승으로부터 몽둥이 세례를 피할 수 있을 까? 만약 스승이 들고 있는 몽둥이에 집착한다면 몽둥이 세례는 불가피할 것이다. 그러나 제자가 스승이 흔들고 있는 몽둥이에 집착하지 않고 현재로 마음을 연다면, 몽둥이 세례를 받지 않을 것이다. 제자가 대답할 수 있는 답은 무한대에 가깝다. 가령 이런 대답들이다. "스승님, 차 향기가 좋네요.", "법당에 파리가 날리네요.", "바람이 시원하네요.", "목이 말라요." 등등. 바로 이것이다. 몽둥이에 집착하고 있는 사람들은 '지금 그리고 여기에' 펼쳐져 있는 차 향기, 파리, 바람, 목마름 등을 향유할 여유가 없다. 

 

법에 맞는 올바른 견해를 얻고자 한다면 다른 사람에게 미혹당하지 말아야 한다. 안이건 밖이건 만나는 것은 무엇이든지 바로 죽여 버려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고, 친척을 만나면 친척을 죽여라. 그렇게 한다면 비로소 해탈할 수 있을 것이다. -<임제어록>

 

승려로서 임제는 부처, 조사, 나한과 같이 깨달은 사람들을 만나면 모조리 죽이라는 파격적인 주장을 제자들에게 피력한다. 부처, 조사, 나한이 되려는 제자들에게는 경천동지할 이야기이다. 물론 부처, 조사, 나한, 부모, 친척을 실제로 죽이라는 것이 아닌 미래에 대한 지나친 기대감, 즉 자신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지나친 소망 때문에 현재의 삶을 부정하지 말아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출가한 제자들에게 부모와 친척은 마음 속 깊이 담고 있는 기억이고, 부모와 친척으로 상징되는 과거에 대한 집착은 현재를 역동적으로 살 수 있는 자유에 장애가 될 수 있다고 임제는 생각한 것이다. 

 

'지금 그리고 여기서' 자유롭게 된다면, 임제의 표현을 빌리자면 '해탈한다면', 우리는 부처, 조사, 나한, 부모 친척을 만날 때 그 현재적 만남을 향유할 수 있게 된다. 참된 자유(참된 해탈)는 우리가 타자를 기억이나 기대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삶으로 응대할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다음은 스님의 책 3권과 목사의 책 1권(6권이지만 가장 임팩트한 1권만 소개하기로 하겠다)을 읽고 쓴 독후감이다.

글 주소: www.youngsunsa.org/youngsunsa/customer/comm_view.html?page=&table=BBS09&id=441&limit=&keykind=&keyword=

 

1. 선의 나침반-현각 엮음(숭산스님의 설법을 제자인 현각스님이 엮은 책이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다. 이 책에서 숭산스님의 설법은 실천이 중요하지 언어가 중요한 게 아니다. 관세음보살이 맞는지? 관세으음보살이 맞는지? 그런 언어는 중요한 것이 아니고(불립문자: 문자가 지닌 형식과 틀에 집착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코카콜라 코카콜라를 외워도 상관없다. 

어떤 기독교인 노신사가 "천지창조는 누가 했나요?"라는 질문을 하자 숭산스님은 "당신이오"라고 답했다. 

싯다르타(석가모니)도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다"라고 가르쳤다. 부처 또는 예수를 위해 내가 존재해서는 안되고 나를 위해 예수 또는 부처가 존재해야 한다.

 

2.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도법스님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이 말이 어렵다면 어렵고 쉽다면 쉽다.

어떤 기독교 목회자가 "임제의 가르침대로 불상을 훼손하고 사찰에 불질렀는데 무엇이 잘못되었냐?"라는 주장을 한 기독교인은 무식하다.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죽여라"라는 말은 "부처 또는 예수는 필요할 때만 찾고 필요없으면 버려라"라는 뜻으로 보인다. 

 

3. 삶은 苦가 아니다-도법스님

"불교는 절대 신을 모시고 그 밑에 엎드려 구원이나 복을 비는 종교가 아니다. 내가 살아 있음을 맛보고 체험할 수 있는 가르침이다."

*()안은 기독교의 가르침이고 이 책에는 없다. 

 

# 자녀등록금을 못내 눈물짓지 말고, 타력(神)에 의지하지 말고
스스로의 노력으로 해결하라. (神께 기도하면 모두 해결해 준다)
# 내 마음의 선장은 나 자신이다. (나는 主의 피조물이다)
# 부처만 스승이 아니고 강도도 스승이다, 저렇게 살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가르친다.
(강도도 전도의 대상이다)
# 부처가 과일을 먹었다고 내 배가 부른 것이 아니다,
내가 과일을 먹어야 배가 부른 것이다. - 내 배부터 채우고 절에 시주하라.
(교회에 헌금부터 하고 내 배를 채워라)
# 스스로 지는 감옥에 갇혀 "업보" 라는 고정관념에 빠져 있으면
마음이 계발되지 않는다.(신의 가르침 안에 살고 무조건 순종하라)
# 빚 보증 또는 어음부도로 전재산을 날렸다.
-그건 원래 내 것이 아니고 남의 것이다. (신이 더 크게 쓰려고 하신다)

 

이 책과 그 앞의 책 이 두권의 공통점은 딱딱하고, 부처 믿으라는 말과 돈 내라는 말은 한마디도 없고, 목사가 쓴 책의 공통점은 모두 "하느님의 왕국을 세우는 데 인간의 돈이 왜 필요할까?"라는 의문만 들고 맹목적 충성을 요구하며 교세확장을 위해 멀쩡한 사람을 세뇌교육 시키는 데 혈안이다. 

 

5.목회는 연애보다 짠하다 - 황대연 목사
"이번에 시골땅 팔았어라, 이제 다 정리해 부렀소, 그래도 하나님께 참 감사해 부요".
땅 판돈 2천만원이 제 손에 들어 왔습니다.
- 이런 돈은 좀 뜯어 먹어도 된다.
------------------
"목사님, 전 돈이 아까워서 그러는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얼마던지 드려야지요, 하지만 전 딸이 너무 보고 싶어요"
할머니는 미국 사는 딸이 보고 싶어 한푼 두푼 저금한 돈을 결국
아프리카 선교사를 위해 내 놓고 딸은 포기하고 말았다.
- 불쌍한 할머니께 공갈협박 쳐 돈 뜯어 먹냐?
------------------
빚 갚을려고 14평짜리 아파트를 판 또다른 신도는
십일조 내야 되는지 목사님께 물어보니
"하나님의 은혜로 살겠다고 결단했다면 십일조 내라".
먹사가 걱정한 것은?
"하나님께서 복 주실 믿음의 결단을 중간에서 방해하는지?" 하는 것 뿐.
그래서 신도는 하나님 중심으로 살기로 삶의 방침을 정리하고,
집을 판 돈에서 십일조를 떼 먹사한테 바쳤다.
-사기친게 자랑이라고 책으로 펴 냈냐?.

 

글 주소: www.ibbtv.com/news/articleView.html?idxno=591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라는 말의 의미: 부처 또는 불교란 삶을 자유롭게 하는데 내가 부처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부처를 싫어하는 사람을 미워한다면, 그것은 부처가 나를 구속하는 것이다. 

 

글 주소: www.eduinnews.co.kr/news/articlePrint.html?idxno=3730

 

다음의 그림은 르네 마그리트의 '금지된 재현'인데 거울에 비친 모습은 남자의 얼굴이 아닌 뒷통수를 비치고 있다.

1. 파이프 그림은 당연히 실제 파이프가 아니고 그림이다.(파이프는 파이프고, 그림은 그림이다)

2. 사람 뒤에 거울을 두면 앞 거울에 뒷모습이 비친다.(사람은 사람이고, 거울은 거울이다)

이 그림은 "그림에 속지마라"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이때 '그림'은 '재현된 실제', 다르게 말하면 '그럴듯하게 꾸며진 무엇', 딱딱한 말로 '허상'이다.

허상은 '실제 없는 것이 있는 것처럼 나타나 보이거나 실제와는 다른 것으로 드러나 보이는 모습(국어사전)'이고, "허상에 속지마라"라는 말은 '실상을 보라' 또는 '본질을 찾아라'라는 뜻이다. 

 

눈 밝은 어떤 스님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라고 했다. 이 말은 허깨비 같은 모습에 속지 말라는 뜻이다. "부처가 뭐냐?" 라는 질문에 "뜰 앞의 잣나무"라고 한 것도 다 같은 것이다.  

꽃피고 낙엽 지는 살아있는 이 곳을 떠나 다른 곳에 따로 부처(깨달음, 진리)가 있지 않다는 가르침인데 마그리트도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아름다움은 따로 있지 않다. 언제 어디나 있다"

 

글 출처: www.newsrep.co.kr/news/articleView.html?idxno=27253

"내가 부처다"라고 하는 순간 이미 부처다운 부처는 아니다. 돈오(단번에 깨달음)하는 순간에 이미 거기에 안주하지 말고 나오라. 깨친 부처도 이미 과거에 집착한다면 부처가 아니다. 부처님도 자신에 의지하지 말고 가르침인 법에 의지하라고 했다. 예수보살도 사랑분별만 하는 이들에게 "이런 바리새인같으니"라고 했다고 한다. 

 

글 출처: seonhannews.com/mobile/article.html?no=2665

신흥 종교의 교주들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통하지 않고는 갈 수 없다"는 식으로 자기를 통해 가기를 바란다. 그러나 명상은 그 어느 누구도 통하지 않고 직접 가는 길이다. 누구를 통해서 가지 마라. 

 

정리하자면 살불살조(殺佛殺祖)라는 말은 한자어 그대로 "죽여라"라기보다 "그 대상들에게 얽매이지도 사로잡히지도 마라(속박에서 벗어나라). 그래야 비로소 해탈해 자유자재하게 된다."라는 의미이다. 

 

마지막으로 검색을 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워드 파일의 글로 마무리 짓겠다(이 글의 출처를 찾으려고 했으나 찾지 못했다).

 

사회학자 에리히 프롬은 고립된 개인은 열등감과 무력감, 자기 자신을 하찮게 여기는 감정을 빈번하게 느끼고, 결핍된 자아를 회복하기 위해 타인이나 사물에 자신을 동일시한다. 여기서 '메시아'가 탄생한다. 프롬은 이것을 '자유로부터 도피'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메시아는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고, 메시아를 고대하는 민중심리를 이용한 사람들로 역사책이 복잡할 뿐이다. 

 

신자유주의 바람은 개인을 더욱 고립시켰다. 밥벌이를 위한 경쟁은 서로 갈라놨고 고독하게 만들었다. 고독감과 피로감이 쌓이자 대중은 메시아가 나타나 현실을 바꿔주기를 간절히 원했다. 안철수가 높은 지지율로 정치판에 등장한 것도 그런 대중심리가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중이 메시아에게 열광할수록 개개인은 더욱 무력한 존재로 추락한다. 기적과 같이 당선된 노무현이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고 물러난 것처럼 한 사람에게 모든 역할을 위임하고 흩어진다면 결국 제자리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고 했던 고승 임제의 가르침처럼 메시아가 등장하면 그를 부정해야 한다. 그것이 메시아의 미망에서 깨어나는 길일 테니까.

 

안철수 후보가 사퇴하자 그의 지지자 중 상당수가 부동층으로 돌아섰다고 한다. 안철수가 사라졌다고 정말 끝난 것인가? 그런 도식이라면 설령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더라도 큰 변화는 없을 것이다. 변화는 우리가 주인의식을 가질 때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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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kywalker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