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사/수학사(하)2023. 6. 28. 20:00
반응형

수학사 46-과도기(2)

 

 

10. 월리스
 스호텐은 1660년에 죽었고, 그 해에 영국에는 왕립협회가 설립되었고(칙령은 1662년에 정식으로 내려졌다), 세계 수학의 중심에 새로운 변화가 생기기도 했다
 영국 국교회와 목사 오트레드는 수학을 무료로 가르쳤고, 그 제자 월리스도 성직자의 길을 걸었으나 대부분을 수학자로서 시간을 보냈다. 그(월리스)는 케임브리지에서 교육받고 1649년에 옥스퍼드 기하학의 새벌 교수직에 임명되었다. 크롬웰 정권 때는 암호해독을 했고, 찰스 2세의 복위 후에 국왕의 사제가 되었고, 왕립협회의 창립위원으로서 성립에도 이바지했다. 1655년에는 중요한 책 두 권 (해석기하학, 무한소 해석에 관한 책)을 출판했다.


11. 월리스의 원뿔곡선
 월리스의 원뿔곡선이 영국 해석기하학에 한 일은 비트의 곡선의 원리가 유럽대륙의 해석기하학에서 한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월리스는 비트의 연구가 자신의 '원뿔곡선'을 모방했다고 불만을 가졌으나 실제로 비트의 논문은 1655년 이전에 쓰였다. 월리스는 기하학 개념을 수치 개념으로 완전히 대체했고, 월리스의 연구는 수학사에서 종종 보듯이 논리적 엄밀함은 무시하는 것이 진보에 효과적인 경우가 있다는 좋은 본보기이다. 월리스의 원뿔곡선은 원뿔의 절단면이 곡선을 만든다는 형식적인 언급으로 시작했으나 평면좌표를 사용하여 원뿔곡선의 잘 알려진 모든 성질로부터 세 개의 표준형 \(\displaystyle e^{2}=ld-\frac{ld^{2}}{t}\), \(p^{2}=ld\), \(\displaystyle h^{2}=ld+\frac{ld^{2}}{t}\)을 이끌어냈다. 여기서 \(e,\,p,\,h\)는 각 원점에 위치하는 꼭짓점에서 측정한 가로좌표 \(d\)에 대응하는 타원, 포물선, 쌍곡선의 좌표이다. 또 \(l\)과 \(t\)는 각각 동경과 지름/축이다.
 이후 그는 이 방정식을 원뿔곡선의 독립적인 정의로 사용했는데 이것으로 원뿔곡선은 원뿔을 이용한 정의에서 벗어났다. 이 점에서 월리스의 정의는 현대적 정의에 더 가깝고, 오늘날 원뿔곡선을 평면좌표계에서 그 좌표값이 두 변수 이차방정식을 만족하는 점의 자취로 정의한다.


11. 월리스의 '무한 산술'
 월리스의 '원뿔곡선'은 비트의 저작으로 대체 가능하나 1655년에 출발된 '무관산술'은 대체 가능하지 않았다. 윌리스는 여기서 아폴로니우스의 '원뿔곡선'을 산술화했듯이 카발리에리의 '불가분량의 기하학'을 산술화했다.
 카발리에리는 평행사변형을 대각선으로 나누어 생기는 두 개의 삼각형 가운데 하나와 평행사변형의 기하학적
불가분량을 각각 비교하여 결과 식 \(\displaystyle\int_{0}^{a}{x^{m}dx}=\frac{a^{m+1}}{m+1}\)을 얻었다.
 월리스는 그런 도형에서 무한히 많은 불가분량과 주치를 연결해 기하학적 배경을 버렸다. 보기를 들면 삼각형의 불가분량의 제공과 평행사변형의 불가분량의 제곱을 비교할 때, 삼각형에 \(n\)개의 불가분량이 있다면 첫번째 것의 길이를 0, 두 번째 것을 1, 세번째 것은 2로, 마지막 것을 \(n-1\)로 한다.
 따라서 삼각형과 평행사변형에서 불가분량의 제곱의 비는 불가분량이 \(n+1\)개라면 다음과 같다.$$\frac{0^{2}+1^{2}+2^{2}+\cdots+(n-1)^{2}+n^{2}}{n^{2}+n^{2}+n^{2}+\cdots+n^{2}+n^{2}}=\frac{1}{3}+\frac{1}{6n}$$ \(n\)이 한없이 커지면 그 비는 \(\displaystyle\frac{1}{3}\)이고 이것은 \(\displaystyle\int_{0}^{1}{x^{2}dx}=\frac{1}{3}\)에 해당한다. 윌리스는 이 방법을 더 놓은 차수로 확장했고, 불완전귀납법(특수 사실로부터 일반적 원리를 추리해내는 것)을 이용해 모든 정수 \(m\)에 대해 식 \(\displaystyle\int_{0}^{1}{x^{m}dx}=\frac{1}{m+1}\)이 성립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당연하지만 페르마는 월리스의 이런 귀납에 의한 일반화를 비판했다. 게다가 월리스는 더욱 문제가 있는 보간법을 유도하고 사용해 그의 공식은 \(m\)이 분수인 경우와 음수(\(m=-1\)은 제외)인 경우에도 성립한다고 생각했고, 대담하게도 \(m\)이 무리수인 경우에도 성립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오늘날 '고차 초월함수'라는 것에 관한 최초의 미적분적 언급이다. 프랑스 수학자들이 지적한대로 월리스의 발견에는 대단했지만 엄밀함은 형편없었다.
 월리스는 맹목적 애국주의자로 1685년에 '대수론, 그 역사의 응용'을 출판했을 때 데카르트의 연구를 비방하고 그의 연구 내용 대부분이 해리엇의 '해석술 연습'의 모방이라고 주장했다. 파스칼의 경연문제에 제출한 해답이 상을 받지 못한 사실도 그의 반프랑스 감정을 악화시켰다. 월리스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악의가 있다고 의심하고 '대수론'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대수가 그리스인 사이에서 옛날부터 사용되었던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들은) 대수를 중대한 비밀로 여기고 고의적으로 감췄다. 대수의 보기는 유클리드나 적어도 유클리드를 이은 테온에게서 보인다. 테온은 대수 발명의 공을 플라톤에게 돌리고 있다.


12. 렌
 1668년 런던 대화재가 없었더라면 렌은 건축가가 아닌 수학자로서 알려졌을 것이다. 렌과 월리스가 속한 수학 연구회는(1657~1658간 소속) 호의 길이를 구하는 \(ds^{2}=dx^{2}+dy^{2}\)과 같은 관계를 여러 종류의 곡선에 응용해 훌륭한 성공을 거두었다. 렌이 20살 때 곡선의 구장에 성공했고 한 해 뒤에 사이클로이드의 구장에도 성공 했다. 이 두 발견은 윌리스가 1659년에 사이클로이드와 시노이드에 관한 무한소 문제를 다룬 두 논문에 넣었다. 
 그는 일엽쌍곡면을 결정하는 두 가지 방법을 발견했고, 물리학에 있어서 물체의 충돌법칙, 광학과 관련된 주제, 유체의 저항, 그밖의 수리물리학과 천체역학 논문을 썼다. 그는 죽어서 다음이 비문을 새겼다.


"기념비를 찾으려 한다면 네 주위를 둘러보라(Si monumentorm requiri's circumspice)"


13. 월리스의 공식
월리스는 무한소 해석에서 몇 가지 매우 중요한 공헌을 했다. 그 중 하나는 \(\displaystyle\int_{0}^{1}{\sqrt{x-x^{2}}dx}\)를 계산하면서 감마함수(계승, Factalal)에 대해 오일러보다 앞서 연구했다. 이 적분은 반원 \(y=\sqrt{x-x^{2}}\)아래의 넓이이고, 그 넓이는 \(\displaystyle\frac{\pi}{8}\)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월리스는 이 적분을 무한소 방법으로 직접 계산하지 못했으나 그의 귀납법과 보간법은 흥미 있는 결과를 가져왔다.
 \(n\)에 자연수 몇 개를 대입하여 \(\displaystyle\int_{0}^{1}{(x-x^{2})^{n}dx}\)를 구하고, 그 적분 값이 \(\displaystyle\frac{(n!)^{2}}{(2n+1)!}\)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이 공식이 \(n\)이 분수인 경우에도 성립한다고 가정했다. 따라서 다음의 결론이 나온다.$$\int_{0}^{1}{\sqrt{x-x^{2}}dx}=\left\{\left(\frac{1}{2}\right)!\right\}^{2}\cdot\frac{1}{2!}$$ 그러므로 \(\displaystyle\frac{\pi}{8}=\frac{1}{2}\left(\frac{1}{2}!\right)^{2}\), 곧 \(\displaystyle\left(\frac{1}{2}\right)!=\frac{\sqrt{\pi}}{2}\)가 된다. 이것은 오일러의 베타함수 \(\displaystyle B(m,\,n)=\int_{0}^{1}{x^{n-1}(1-x)^{m-1}dx}\)에서 \(m\)과 \(n\)이 모두 \(\displaystyle\frac{3}{2}\)인 특수한 경우이다.
 홉스는 월리스의 기하학의 산술화로 비판했고, 윌리스의 '무한산술'을 '기호로 만든 부스럼 딱지'라고 비난했으나 정작 자신은 원적 문제와 그 밖의 고대 기타학 문제를 풀었다고 주장했다.
 월리스는 홉스를 무시하고 다른 발견을 계속했다. 그의 잘 알려진 성과로 다음의 무한곱이 있다.$$\frac{2}{\pi}=\frac{1\cdot3\cdot3\cdot5\cdot5\cdot7\cdots}{2\cdot2\cdot4\cdot4\cdot6\cdot6\cdots}$$ 위 식은 다음에 나타난 오늘날 정리와 공식에서 쉽게 유도된다.$$\lim_{n\,\rightarrow\,\infty}{\frac{\int_{0}^{\frac{\pi}{2}}{\sin^{n}xdx}}{\int_{0}^{\frac{\pi}{2}}{\sin^{n+1}xdx}}}=1,\,\int_{0}^{\frac{\pi}{2}}{\sin^{m}xdx}=\frac{(m-1)!!}{m!!}\,(m:\,\text{odd}),\,\int_{0}^{\frac{\pi}{2}}{\sin^{m}xdx}=\frac{(m-1)!!}{m!!}\cdot\frac{\pi}{2}\,(m:\,\text{even})$$(\(m!!\)은 \(m\)에서 숫자를 하나씩 건너뛰면서 곱하여 1또는 2로 끝나는 곱, \(m!!=m(m-2)(m-4)\cdots\)을 나타낸다.)

 따라서 \(\displaystyle\int_{0}^{\frac{\pi}{2}}{\sin^{m}xdx}\)에 대한 위의 식을 윌리스 공식이라고 한다. \(\displaystyle\frac{2}{\pi}\)를 구하기 위해 사용한 방법은 귀납법과 보간법의 원리에 바탕을 둔 것으로 이방법을 \(\displaystyle\int_{0}^{1}{\sqrt{1-x^{2}}dx}\)에도 적용했으나 이항정리를 몰라 식의 값을 구할 수 없었다.

 

14.그레고리
 정수 지수를 갖는 이항정리는 1527년 이후 유럽에 알려졌으나 월리스는 보간법을 그 정리에 적용하지 못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인 그레고리는 이항정리의 응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여러 나라에서 수학을 공부했고 그의 후원자에 의해 콜린스에게 소개되어 영국의 수학계에서 한 세기전 메르센과 같은 일을 했고, 그 다음 1663년에 이탈리아로 갔고, 그의 후원자에 의해 토리첼리의 후계자 앙젤리(토리첼리 친구 리치의 제자)를 소개받았다. 그레고리는 1664~1668년 동안 앙젤리와 함께 연구 행동을 한 뒤 런던으로 귀국했고, 따라서 그레고리가 함수의 무한급수 전개와 일반적인 무한과정의 위력을 바르게 인식하게 된 것은 이탈리아에서 였다고 할 수 있다. 그 결과로 1667년에 파두아에서 '원과 쌍곡선의 바른 구적'을 출판했고, 이 책에는 무한소 해석의 중요한 성과가 있다.
 그레고리는 아르키메데스의 계산법(원뿔곡선에 대해 넓이가 \(a_{0}\)인 내접삼각형, \(A_{0}\)인 외접사각형을 그리고 \(a_{n}\): 앞 두 항의 기하평균, \(A_{n}\): 앞 두 항의 조화평균이라 하여 수열 \(a_{0},\,A_{0},\,a_{1},\,A_{1},\,a_{2},\,A_{2},...\)을 만들었다)을 이용해 타원과 쌍곡선의 구적으로 확대했다. 이 과정을 무한히 반복하면 모두 원뿔곡선의 넓이에 수렴한다. 이 무한과정은 원적문제에 적용하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당시 호이겐스는 \(\pi\)를 다른 대수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고 주장해 논란이 있었다. 이 문제가 해결되기까지 다시 두 세기가 필요했다.

 

15. 그레고리 급수
 1668년에 그레고리는 두 권의 책을 출판했고, 그 중 하나는 '보편기하학'으로 파두아에서, 다른 하나는 '기하학 연습'으로 런던에서 출판했다. 그의 연구는 본질적으로 기하학적 겉모습을 띄고 있으나 그 겉모습을 따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만약 그의 연구가 해석적으로 표현되었다면 미적분학의 발견에서 뉴턴을 앞섰을 것인데 그는 미적분학의 기본적 사항 전부를 1668년말까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구적법과 구장법에 정통하고, 그것들의 접선문제의 역 이라는 사실과 식 \(\displaystyle\int{\sec xdx}=\ln(\sec x+\tan x)\)도 알고있었다. 또한 분수 거듭제곱에 대한 이항정리를 발견했고, 테일러 급수를 테일러가 발표하기 40년 전에 테일러 급수를 발표했고, 삼각함수의 매클로린 전개 중 \(\text{arctan} x\)만 '그레고리급수'라는 별명이 붙었다.

 이탈리아에서 배운 \(t=0\)에서 \(t=x\)까지의 구간에서 곡선 \(\displaystyle y=\frac{1}{1+t^{2}}\)의 아래 넓이가 \(\text{arctan} x\)라는 사실과 \(\displaystyle\frac{1}{1+x^{2}}=1-x^{2}+x^{4}-x^{6}+x^{8}-x^{10}+\cdots\)가 성립함을 배웠고, 이 것들로 다음의 그레고리 급수를 유도할 수 있다.$$\int_{0}^{x}{\frac{1}{1+t^{2}}dt}=\text{arctan}x=x-\frac{x^{3}}{3}+\frac{x^{5}}{5}-\frac{x^{7}}{7}+\cdots$$16 메르카토르와 브룬커
 그레고리 급수와 비슷한 급수를 거의 같은 시기인 1668년에 왕립협회 회원(본명 카우프만) 페로카도로가 '로그손'의 내용으로 발표했다. 로그술의 첫 부분에는 네이피어와 브리그스에게 유래하는 방법으로 로그를 계산하는 것에 대해 쓰여 있다. 그 중 하나가 메르카토르 급수라고 알려진 것이다. 그레고리는 \(t=0\)에서 \(t=x\)까지 \(y=\frac{1}{1+t}\)아래의 넓이는 \(\ln(1+x)\)라는 사실이 알려져 있고, 앞의 그레고리 급수처럼 급수로 나타낼 수 있다.$$\ln(1+x)=\int_{0}^{x}{\frac{1}{1+t}dt}=x-\frac{x^{2}}{2}+\frac{x^{3}}{3}-\frac{x^{4}}{4}+\cdots$$ 메르카토르는 위 급수를 '자연로그'라고 이름을 붙였고, 메르카토로의 이름이 붙어있다. 이 급수는 후데와 뉴턴도 알고 있었으나 발표하지 않았다.
 1650년대와 1660년대를 통해 넓은 범위에 걸친 여러가지 무관산법이 발표되었다.
 왕립협회 초대 회장 브룬커는 연분수에 관한 연구를 하였다. 연분수는 이전에 이탈리아에서 쓰이기 시작했다.
 \(\sqrt{2}\)를 구하려면 \(x+1=\sqrt{2}\)로 둔다. 그러면 \((x+1)^{2}=2\)가 되고 \(x^{2}+2x=1\), 곧 \(\displaystyle x=\frac{1}{2+x}\)이 된다.
 그래서 우변에 \(x\)가 나타날 때마다 그것을 \(\displaystyle\frac{1}{2+x}\)로 계속 바꾸어 놓으면 다음 식을 얻는다.$$x=\frac{1}{2+\frac{1}{2+\frac{1}{2+\cdots}}}=\sqrt{2}-1$$ 브룬커는 \(\displaystyle\frac{2}{\pi}\)에 대한 월리스곱을 조작해 다음과 같이 연분수로 나타냈다.$$\frac{4}{\pi}=1+\frac{1}{2+\frac{9}{2+\frac{25}{2+\frac{49}{2+\cdots}}}}$$ 또 브룬커와 그레고리는 로그의 무한급수 표현을 몇 개 발견했으나 이것보다 간단한 메르카토르 급수의 그늘에 가렸다. 그레고리는 다시 곡선 \(y=\ln x\)를 연구했는데 등각나선 \(r=e^{\theta}\)에서 동경 \(r\)을 가로축, 호 \(\theta\)를 세로축으로 잡는 기하학적 변환을 통해 이 곡선을 끌어냈다. 이것은 이탈리아에서 잘 알려진 포물선과 아르키메데스 나선을 견주면서 힌트를 얻었을 수 있다. 그레고리는 성과를 출판하지 않아 그의 성과는 다른 사람들이 다시 발견해야 했다.

 

17. 배로의 접선법
 뉴턴은 그레고리를 알지 못했지만 옥스퍼드에 있던 월리스와 케임브리지에 있던 배로의 영향을 받았다. 배로는 월리스처럼 성직에 있으면서 수학을 가르쳤다. 
 수학적으로 보수적이었던 배로든 대수의 형식주의를 좋아하지 않아 월리스의 연구와 대조적이었고, 대수가 수학의 일부이기보다 논리학의 일부라고 생각했는데 그 견해는 해석학적 발견에 방해가 되었다.
 배로는 자신의 '광학강의(1669년)'와 '기하학강의(1670년)'을 출판했고, 이때 뉴턴이 편집을 도왔다. 또한 동시에 유클리드와 아폴로니우스의 책도 편집했다. 그런데 1668년이라는 해는 중요하다. 이 해에 그레고리의 '보편기하학', 메르카토르의 '로그술', 슬루즈의 '방법에 대하여'의 개정판의 출간과 동시에 배로가 기하학 강의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에 접선문제와 구적법이 크게 유행하고 있었고, 배로의 기하학 강의는 토리첼리의 운동학적 관점을 취하고 있고 따라서 기하학적 양을 점의 끊임없는 흐름에 의해 생기는 양으로 보는 쪽을 좋아했다. 그는 시간이 선과 비슷하다고 말했으며 동시에 양쪽 다 불가분량으로 이루어진 것 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대수적 해석이 강조된 곳이 한 군데 있었는데 기하학 강의 10장의 끝에 배로는 다음의 글을 남겼다.


 많은 유명한 방법과 진부한 방법 뒤에 이것이 유익한지 어떤지 모르지만 우리가 자주 접선을 구할 때 쓰는 잘 알려진 방법을 부족의 형태로 덧붙여둔다. 그러나 내가 그렇게 하는 것은 친구의 충고에 따른 것이다(친구: 뉴턴). 더욱이 기꺼이 그렇게 하기로 한 것은 그 방법이 내가 말한 방법보다도 더 유익하고 더욱 일반적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배로는 미분에서 이용되는 방법과 실질적으로 같은 접선을 구하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페르마의 방법과 거의 같으나 \(E\) 대신 오늘날 쓰이는 \(\Delta x,\,\Delta y\)를 사용했다. 배로는 그 방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다항식 \(f(x,\,y)=0\)(현대식 표기)으로 주어진 곡선 위의 점을 \(M\), 이 점에서 그는 정신은 \(MT\)라하자(\(T\): 접선과 \(x\)축의 교점), 다음으로 그 곡선 위에 한없이 작은 호 \(MN\)을 잡는다. 다음에 \(M\)과 \(N\)에서 세로선을 긋고 또 \(M\)을 지나서 \(x\)축에 평행한 직선 \(MR\)을 긋는다. 그리고 이미 알고 있던 \(M\)의 세로좌표를 \(m\), 구하는 접선영 \(PT\)를 \(t\)라 하고 삼각형 \(MRN\)의 높이와 밑변을 각각 \(a\)와 \(e\)라고 한다. 이 사실에서 배로는 \(a:e=m:t\)를 지적했다.
 오늘날에는 두 점이 한없이 가까운 때 \(a\)와 \(e\)의 비는 곡선의 기울기가 된다고 한다. 이 비를 찾기 위해 배로는 페르마와 거의 같은 방법을 썼다. \(f(x,\,y)=0\)의 \(x\)와 \(y\)를 각각 \(x+e\), \(y+a\)로 바꾸어 놓고 그 결과로 생긴 방정식에서 \(a\)또는 \(e\)를 갖지 않는 모든 항과(그것들은 모두 0과 같다) \(a\)와 \(e\)의 1차보다 높은 차수의 모든 항을 무시하고, 마지막으로 \(a\)를 \(m\)으로, 또 \(e\)를 \(t\)로 바꿔놓는다. 따라서 그 접선영은 \(x\)와 \(m\)으로 나타나고 이미 \(x\)와 \(m\)을 알고 있다면 접선영 \(t\)의 값이 결정된다.
 배로는 페르마의 연구를 직접 접하지 않았으나 카발리에리, 호이겐스, 그레고리(성빈센트), 그레고리(제임스, 스코틀랜드), 월리스로부터 제로와의 방법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반응형
Posted by skywalker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