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사/수학사(하)2023. 6. 28. 08:00
반응형

수학사 45-과도기(1)

 

 

-수학은 과학의 흔들리지 않는 기초이며 인간사회에 이익을 가져다주는 마르지 않는 샘물이다. 아이작배론-

 

 1. 라일
1661년 데자르그, 1662년 파스칼, 1665년 페르마가 죽음으로써 프랑스 수학의 위대한 시대는 막을 내렸고, 로베르발은 그 뒤 약 10년 동안 살았으나 활동을 하지 않아 그의 영향력은 제한되었다.
 필립 드 라일은 데자르그의 제자로 그와 같은 건축가였다. 그는 순수기하학에 흥미가 있었고, 1673년 원뿔곡선을 처음으로 연구했을 때 종합적인 방법을 썼으며 미래의 해석적인 풍조와 관계를 끊지않고 있었다.
 라일은 후원자 콜베르를 위해 연구했고, '원뿔곡선에 관한 새 원리'를써서 바쳤다. 이 책에서는 데카르트의 방법이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고, 데카르트의 방법은 계량적이면서 이차원적인 것으로 타원, 쌍곡선의 경우 두 초점에서 거리의 합과 차에 의한 정의에서, 또 포물선의 경우에는 초점과 준선으로써 거리의 상등관계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러나 자신은 데자르그의 용어의 일부로 해석기하학에 이용하여 가로 좌표축을 줄기, 그 축 위의 점을 마디(knots), 세로 좌표축을 가지(branch)라고 했다.(원점만 후세에 전해졌다)
 라일은 페르마나 데카르트와 마찬가지로 원점을 잡았으나 자신의 저서 '새 원리'에 따르면 미지랑이 3개인 방정식에 의해 해석적으로 주어진 곡면을 처음으로 제시하고, 여기에 기준면, 곧 좌표면 \(OBA\)를 더했다.

 그리고 라일은 그의 좌표계에 관해 축 OB에서 수직거리 \(PB\)(\(B(x,\,0,\,0),\,P(x,\,y,\,v)\)라 하면 \(\sqrt{y^{2}+v^{2}}\))가 거리 \(OB\)보다 거리 \(a\)만큼 긴 점 \(P\)의 자취는 \(a^{2}+2ax+x^{2}=y^{2}+v^{2}\)(\(v\)는 오늘날 \(z\)로 쓰인다)인 사실을 발견했고, 그 자취는 원뿔이다.
 라일은 종합기하학과 해석기하학 양쪽에서 근대적인 최초의 전문가가 되었으나 그 분야의 논문에서 라일의 이름을 찾을 수 없고, 이름이 붙어도 그가 처음으로 발견한 정리가 아닌 다른 정리에 이름이 붙었다. 게다가 기하학은 쇠퇴의 길을 계속 걸었고, 이후 한세기 동안은 부활하지 못했다.


2. 모어
 진가를 인정받지 못한 당시의 기하학자는 라일만이 아니었다. 1672년 덴마크 수학자 모어는 '덴마크의 유클리드'에서 컴파스와 자를 이용해 점과 점을 연결하는 어떤 작도도 컴파스만으로 가능함을 보였다.
 파푸스, 데카르트와 그 밖의 사람들이 최소한의 도구를 사용한다는 극도의 절약원칙을 강조했음에도 대부분의 고전적 작도 문제에서 이 원칙을 위반했다는 점을 모어가 지적했다. 그러나 당시 수학자들은 이 발전에 관심이 없었고, 125년 뒤에 이 원리를 다시 발견한 마스케로니의 공으로 돌아가 그의 이름이 붙게 되었다. 모어의 책은 한때 완전히 사라졌으나 1928년 코펜하겐의 한 서점에서 수학자가 발견했다.

 

3. 멘골리
 모어의 '덴마크의 유클리드'가 출판된 1672년에 원적 문제와 관련된 책 '원적 문제'는 목사 피에트로 멘골리에 의해 이탈리아에서 출판되었다. 멘골리는 목사지만 카발리에리(블로냐에 있을 때 그의 제자였다), 토리첼리, 그레고리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불가분량과 쌍곡선 아래의 넓이에 관한 연구를 했고, 이런 종류의 문제에 무한급수를 이용해 다루는 것을 배웠고,  이 때는 무한급수의 유용성이 분명해지던 시기였다.
 보기를 들어 멘골리는 교대조화급수 \(\displaystyle\frac{1}{1}-\frac{1}{2}+\frac{1}{3}-\frac{1}{4}+\cdots+\frac{(-1)^{n}}{n}+\cdots\)의 합이 \(\ln2\)라는 것과, 1689년에 베르누이가 발견한 교대급수가 아닌 조화급수가 발산함을, 호이겐스(하위헌스)의 업적이라는 삼각수의 역수가 수렴함을 보였다. 더 나아가 멘골리는 제곱수 및 다른 거듭제곱수의 역수의 합을 구하는 것도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한 세기 뒤의 오일러가 해냈다). '원적문제'에는 윌리스가 구한 \(\pi\)에 대한 무한곱도 기술하고 있었다.
 무한합과 무한곱에 관한 멘골리의 선진적 업적은 수학에서 이후 발전에 중요한 걸음이었다.


4.스호텐
 1670년대 진가를 인정받지 못한 세 사람의 수학자를 살펴보았는데 그들이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 이유는 그들이 살던 나라가 수학의 중심지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일찍이 지도적 지위에 있던 프랑스,이탈리아에서 수학은 쇠퇴의 길을 걸었고 덴마크는 주류에서 벗어나 있었다. 여기서는 데카르트, 페르마와 뉴턴, 라이프니츠의 두 시대 사이 시기에 영국,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지역의 수락이 번성했다.
 데카르트는 네덜란드에서 20년간 지냈고, 해석기하학이 유럽의 다른 어떤 곳보다도 빨리 자리를 잡았다. 1646년 라이덴 대학에서 스호텐과 그의 제자들에 의해 데카르트 기하학이 급속하게 발전했다.
 데카르트의 기하학은 학자 사이의 공통어인 라틴어로 출판되지 않았고, 그 설명 또한 불분명했다. 이 두 결점을 보완한 것이 스호텐이 1649년에 보조자료를 덧붙여 출판한 라틴어 번역이었다. 스호텐의 '데카르트에 의한 기하학'은 그 후 크게 증보되어 1659~1661년에 두 권으로 나왔고, 또 1683년과 1695년에 증보판이 출판되었다. 이 상황을 살펴보면 해석기하학은 데카르트가 도입했으나 스호텐에 의해 자리잡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5. 비트
 해석기하학에 대한 더욱 중요한 공헌은 1658년에 스호텐의 동료이자 네덜란드의 국무장관 비트에 의해 이루어졌다. 비트는 법률을 공부했으나 스호텐의 집에서 사는동안 수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젊은 시기에 틈을 내어 '곡선의 원리'라는 책을 썼고, 1권에는 원뿔곡선에 관한 여러 종류의 운동학적 정의와 넓이의 측정법 정의가 쓰여 있다. 그 정의에는 초점-준선 비에 의한 정의가 있고, 여기서 '준선'이라는 불어가 유래되었다고 본다. 그가 제시한 타원에 관한 또하나의 작도법은 이심각을 매개변수로 하면서 두개의 동심원을 사용하는 잘 알려진 방법이다. 1권의 방법은 종합적이나 그 권은 좌표가 체계적으로 사용되고 있고, 해석기하학에 대한 최초의 교과서라고 전해져 왔다. 그 이유는 데카르트의 '기하학'은 실제 교과서가 아니었고, 페르마의 해설서도 1679년까지 출판되지 않았으며 비트의 '곡선의원리'는 스호텐의 '데카르트의 기하학'의 1659-1661년판에 정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비트의 연구목적은 \(x,\,y\)에 대한 모든 이차방정식을 평행이동, 회전으로 표준형으로 변환하는것 이었다. 그는 이차방정식의 판별식이 음수, 0, 양수 냐에 따라 각각 타원, 포물선, 쌍곡선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1671년에 정치가의 목표와 수학자의 관점을 연결, 결합해 '종신 연금론'이라는 논문을 연구해 연금문제를 고찰했고, 1972년에 프랑스의 네덜란드 침공 때 오렌지공의 군대에 의해 공직에서 쫓겨나고, 화난 군중들에게 살해되었다.

 

6. 후데
 1656-1657년에 스호텐은 '수학 연습'을 출판했고, 이 책에는 그는 대수를 기하학에 응용하는데 새로운 성과를 보였다. 또 이것은 유능한 제자들이 발견한 것도 있는데 그 가운데 귀족으로 30년동안 암스테르담 시장을 지냈던 후데도 있었다. 그는  호이겐스(하위헌스)와 비트에게 문화관리의 문제와 확률 및 평균수명의 문제에 관해 편지를 썼고, 1656년 쌍곡선의 주석법에 관한 논문을 썼고, 멘골리처럼 무한급수를 사용했으나 이 원고는 없어졌다. 스호텐의 '연습'에는 후데의 사차곡면 좌표의 연구에 관한 절이 하나 있고, 덜 명확하나 라일보다 앞선 입체 해석기하학의 선구적인 연구였다. 게다가 후데는 방정식의 문자 계수를 양, 음에 관계없이 모든 실수를 나타내는 것으로 쓴 최초의 수학자로 보인다. 방정식의 이론에서 비에트의 기호법을 일반화하는 마지막 단계는 후데의 저작 '방정식의 변형에 대하여'에 나오고, 이 역시 스호텐의 1659-1661년판 '데카르트의 기하학'의 일부를 이룬다. 후데의 시대에 가장 인기가 있었던 연구 영역은 해석기하학과 수학적 해석학이었고, 시장이 되기 전에 양쪽 모두에 이바지했다. 1657-1658년 후데는 미적분의 계산법에 관한 명확한 지침을 주는 두 개의 법칙을 발견했다.

1. \(r\)이 다항방정식 \(a_{0}x^{n}+a_{1}x^{n-1}+a_{2}x^{n-2}+\cdots+a_{n-1}x+a_{n}=0\)의 중근이고, \(b_{0},\,b_{1},\,...,\,b_{n-1},\,b_{n}\)이 등차수열을 이루면 \(r\)은 방정식 \(a_{0}b_{0}x^{n}+a_{1}b_{1}x^{n-1}+\cdots+a_{n-1}b_{n-1}x+a_{n}b_{n}=0\)의 근이다.
2. \(x=a\)일 때 다항식 \(a_{0}x^{n}+a_{1}x^{n-1}+a_{2}x^{n-2}+\cdots+a_{n-1}x+a_{n}\)이 극대 또는 극소가 되면 \(a\)는 방정식 \(na_{0}x^{n}+(n-1)a_{1}x^{n-1}+\cdots+2a_{n-2}x^{2}+a_{n-1}x=0\)의 근이다.
1은 \(r\)이 \(f(x)=0\)의 중근이면, \(r\)은 동시에 \(f'(x)=0\)의 근이 된다는 정리를 돌려 표현한 형태이다.
2는 페르마 정리에 약간의 수정을 가한 것으로 오늘날 표현으로는 \(f(x)\)가 다항식 \(f(x)\)의 극댓값 또는 극솟값이면 \(f'(a)=0\)이라는 증거이다

 

7. 슬루즈

 후데의 법칙은 스호텐의 '데카르트의 기하학' 1권에 인용되어 1859년에 출판되었기 때문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또한 이 보다 몇해 전에는 낮은 지대나라 출신의 슬루즈가 접선에 대한 비슷한 법칙을 썼다. 그는 리옹과 로마에서 공부했고 토리첼리의 영향 또는 독립적으로 1652년 \(f\)가 다항식일때 \(f(x,\,y)=0\)(음함수) 형태의 방정식으로 표현되는 곡선에 대한 접선을 찾는 방법을 1673년에 처음으로 왕립협회보에 실었다. 구하는 접선의 접선영은 \(f(x,\,y)=0\)에서 \(y\)를 포함하는 모든항을 뽑아내어 각 항 \(x\)의 지수를 자신의 항에 곱한 다음, \(x\)로 나눈 것을 분모에 놓아 얻은 몫이다 (예) \(x^{3}+y^{3}-3xy=0\)의 경우, \(3y^{3}-3xy\)를 분자에, \((3x^{3}-3xy)/x=3x^{2}-3y\)를 분모에 놓은 \(\displaystyle\frac{3y^{3}-3xy}{3x^{2}-3y}\)가 된다). 이것은 오늘날 표기로 몫 \(\displaystyle\frac{dy}{dx}\)를 구하는 것과 같고, 1659년 무렵 후데에게도 알려졌다. 이런 예는 뉴턴의 연구 이전에 미적분학에서 여러 발견이 차례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말한다. 슬루즈는 낮은 지대 나라의 전통을 이어받아서 데카르트의 \(x,\,y\)보다 비에트와 페르마의 \(A,\,E\) 기호를 더 좋아했다고 해도 데카르트 기하학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사람이었다. 1659년 슬루즈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방법에 대하여'라는 책을 출판했고, 이 책에서 방정식의 근을 기하학적으로 작도하는 법을 다루었다. 그는 임의의 원뿔곡선이 주어졌을 때 어떤 삼차/사차방정식의 근도 원본곡선과 원의 교점을 통해 작도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또 슬루즈의 이론이 1657~1658년에 걸쳐 호이겐스(라위원소), 파스칼과 주고받은 편지에서 그가 소개한 곡선족에 붙어있다.
 파스칼이 이름을 붙인 슬루즈의 진주곡선은 \(y^{m}=kx^{m}(a-x)^{b}\)꼴의 방정식으로 주어진 곡선이다. 그런데 슬루즈는 \(y=x^{2}(a-x)\)도 진주형이 된다고 잘못 생각했는데 이는 당시 음의 좌표가 이해되지 않아 그 곡선이 축(가로축)에 대해 대칭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호텐의 가장 뛰어난 제자 호이겐스는 극대, 극소, 변곡점을 발견했고 양과 음의 양쪽 좌표에 대해 그 곡선을 바르게 그릴 수 있었다. 변곡점은 이미 페르마와 로베르발도 발견했다.

 

8. 신개선과 축폐선(수학사 참고)
 1685년 호이겐스는 루이 14세의 연금을 받기 위해 파리로 이사했고, 1673년 파리에서 호이겐스의 가장 위대한 저술 '진자시계' 가 나왔다. 1장은 1656년 저자가 발명한 추시계에 관한 것이고, 2장은 진공상태에서 자유낙하하거나 평탄한 경사면 위를 미끄러지거나 또는 매끈한 곡선을 따라 미끄러지는 물체에 대한 고찰에 할애되었다. 3장은 신개선과 축폐선을 다루는데 평면곡선의 축폐선(evolute)은 그 곡선에 대한 법선의 포락선, 신개선(involute)은 주어진 곡선을 축폐선으로 갖는 임의의 곡선이다. 호이겐스는 그의 일반적인 이론의 응용으로서 포물선과 사이클로이드의 축폐선을 구했다. 전자의 경우 3차 포물선을, 후자의 경우 같은 크기의 다른사이클로이드를 얻었다.
 4장은 진동의 중심과 매다는 점은 바꿀 수 있다는 것의 증명과 함께 복합추를 다루었고, 마지막 장은 시계이론에 관한 것이다. 여기에 사이클로이드의 후에 관한 설명이 있다.
 해석기하학은 원래 이론적 고찰의 산물이었으나 호이겐스의 곡률 개념은 실용적 관심에 의해 개발이 촉진되었다. 사이클로이드 진자는 이전에 로베르발이 발견했지만 출판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이클로이드의 확실한 구장법(곡선의 길이를 구하는 법)은 호이겐스의 업적이 되었다.

(왼쪽: 호이겐스의 진자시계)

 위 오른쪽 그림에서 아직 \(QS\)가 진자의 실이 곡선 \(QP\)(한 아치의 반)에 감기면서 생긴다는 사실에서 직선 \(PS\)의 길이가 아치 \(QP\)의 길이와 같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직선 \(PS\)는 사이클로이드의 한 아치인 \(QSR\)의 생성을 (턱을 이루는 아치의 생성원과 같음)의 지름의 두 배 이므로 사이클로이드 의한 아치의 길이는 지금의 4배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신개선과 축폐선의 성질은 다른 많은 곡선의 길이를 구할 수 있었고, 대수곡선의 길이를 구할 수 없다는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의 믿음에 의문이 제기되었다. 여기에 1658년 호이겐스의 동료이고 스호텐의 제자인 호이라트가 반삼차 포물선 \(ay^{2}=x^{3}\)의 길이는 유클리드적 방법으로 구할 수 있음을 발견하면서 이 논의에 종지부를 찍었다. 1659년에 스호텐은 이 발견은 '데카르트 기하학'의 중요사항으로 발표했는데, 조금 앞서 영국인 닐과, 프랑스의 페르마도 발표했다.
 페르마가 수학에서 발견한 모든 것을 스스로 출판한 것은 닐의 포물선으로 알려진 반삼차 포물선의 구장법 뿐이었다. 페르마의 구장법은 곡선의 작은 호와 그 호의 끝점에서 접선으로 만들어지는 외접도형의 비교에서 유도된 것이다. 호이라트의 방법은 그 호의 변화율에 바탕을 두고 있고, 오늘날 기호로 \(\displaystyle\frac{ds}{dx}=\sqrt{1+(y')^{2}}\)로 나타낸다.
 '무한산술'에서 윌리스가 주목한 닐의 주장법은 그 작은 호가 가로축, 세로축의 증분을 두 번으로 하는 직각삼각형의 빗변 이하는 사실, 곧 오늘날 표현으로 \(ds=\sqrt{(dx)^{2}+(dy)^{2}}\)라는 점에 바탕을 두었다.
 닐의 구장법은 1659년에 월리스가 두 논문: '앞은 사이클로이드, 다음은 시소이드'에서 발표했다.
이 논문에 이어 몇 달 뒤 파스칼이 사이클로이드에 관한 저작을 발표했다. 이처럼 미적분학의 발명에 바로 앞서 수학자들 사이에는 사이클로이드 열풍이 불었다.
 호이렌스의 진자시계는 10년 남짓 뒤에 나오는 프린키피아의 입문서 역할을 했다. '진자시계'에는 원운동에서 구심력의 법칙, 진자운동에 관한 호이겐스의 법칙, 운동에너지 보존법칙, 그 밖의 역학과 관련된 중요한 결과가 담겨있다.

반응형
Posted by skywalker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