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사/수학사(하)2023. 6. 27.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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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사 44-페르마와 데카르트의 시대(3)

 

 

18. 로베르발
 페르마는 아직 겸손한 사람이어서 자신의 연구를 어느것 하나 출판하지 않고 메르센에게 편지를 보내는 데에 만족해서 그의 업적의 대부분에 대해 마땅히 받아야할 명예의 우선권을 잃었다.
 이것은 페르마의 친구인 로베르발도 마찬가지였다. 로베르발은 카발리에리의 방법과 비슷한 불가분량의 방법을 전개해서 시험에 합격했고, 메르센으로부터 사이클로이드의 연구를 권유받아 이 곡선의 아치 한 개의 밑부분의 넓이, 임의의 점에서 이 곡선에 접선을 긋는 방법, 아치의 아래부분이 밑부분의 선을 중심으로 회전할 때 생기는 부피, 또 대칭축이나 꼭지점에서 그은 접선 주위를 회전해서 생기는 부피도 구했다. 그러나 이 방법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않아 모든 업적에 대한 영예를 얻지 못하고 우선권에 관한 수많은 싸움에 휘말렸다(가장 치열했던 것이 사이클로이드에 관한 논쟁이다).  

 

19. 토리첼리
 로베르발이 사이클로이드를 연구할 무렵 토리첼리도 사이클로이드에 흥미가 있었다. 1643년에 토리첼리는 이 곡선의 구적법을 메르센에게 써 보냈고, 또 1644년에는 '포물선의 측정에 대하여'라는 책을 출판하면서 이에 사이클로이드의 구적법과 접선의 작도법을 부록으로 덧붙였다. 1646년에 로베르발은 토리첼리가 자기와 (극대/극소에 관해) 페르마를 표절했다는 비난 편지를 썼는데 토리첼리가 로베르발이 그 이전에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는 사실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재는 최초로 사이클로이드를 발견한 사람은 로베르발, 최초로 발표한 사람은 토리첼리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로베르발은 사이클로이드의 넓이를 구할 때 불가분량을 이용했으나 토리첼리는 두 종류의 구적법 (1. 카발리에리의 불가분량 방법, 2. 착출법)을 이용했다. 사이클로이드의 접선에 대해서 두 사람 모두 나선의 접선을 긋는 아르키메데스의 방법을 상기시키는 운동의 합성을 사용했다.

 로베르발은 사이클로이드의 점 \(P\)는 크기가 같은 두 운동, 곧 평행운동과 회전운동에 의해 결정된다고 생각했다. 생성원이 밑선 \(AB\)를 따라 회전할 때 \(P\)는 수평방향으로 움직이면서 동시에 원의 중심 \(O\)의 주위를 회전한다(위그림), 따라서 평행운동에 대해 \(P\)를 지나는 수평선 \(PS\)가, 회전성분에 대해서 생성원의 접선 \(PR\)이 그려진다. 그리고 평행운동과 회전운동의 크기가 같기 때문에 각 \(SRP\)의 2등분선 \(PT\)는 구하는 사이클로이드의 접선이 된다.
 운동의 합성에 관한 생각은 이미 아르키메데스, 갈릴레이, 데카르트와 다른 사람들이 그 방법을 이용했고, 토리첼리는 이들 중 누군가에게 방법을 배웠을 수 있어서 로베르발을 표절했다고 할 수 없다. 더욱이 토리첼리와 로베르발은 모두 위에 언급한 운동학적 방법을 다른 곡선에도 응용했다. 토리첼리는 고차의 포물선의 접선을 구하는 페르마의 방법을 이용했으나 그 지식은 당시 이탈리아에 이미 알려진 것이었다.


20. 새로운 곡선
 로베로발과 토리첼리의 연구에는 그 밖에도 뛰어난 수 많은 성과가 있었다. 로베르받은 그의 불가분량의 방법을 이용하여 식 \(\displaystyle\int_{a}^{b}{\sin xdx}=\cos a-\cos b\)가 성립함을 보였다. 로베르발과 토리첼리는 각각 독립적으로 그러나 아주 비슷한 방법으로 카발리에리의 포물선과 나선의 비교를 넓이 뿐만 아니라 호의 길이에도 적용해 더욱 발전시켰다.
 1690년에 그들은 나선 \(r=a\theta\)의 처음 1회전의 길이가 포물선 \(x^{2}=2ay\)의 \(x=0\)에서 \(x=2\pi a\)까지의 길이와 같다는 것을 밝혔다. 1630년부터 1650년에 걸친 시대는 수학적 관심에서 놀랄 만한 일치를 보였는데 여기에는 메르센의 공이 컸다. 무한소와 관련된 문제는 당시에 인기가 있었는데 특히 토리첼리는 그 문제에 열중했다. 보기를 들면 '포물선의 측정에 대하여'에서 토리첼리는 포물선의 구적을 21가지의 다른 방법으로 증명했고, 크게 불가분량의 방법과 착출법(소거법)으로 나뉜다. 그러나 카믈리에리의 기하학의 강한 영향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다만 새로운 발견들 덕분에 불가분량을 유연하게 구사하는데 그의 스승을 훨씬 능가했다. 1641년에 토리첼리는 쌍곡선 \(xy=a^{2}\)과 가로축 사이의 부분 가운데
세로축 \(x=b\)의 오른쪽에 있는 넓이가 무한한 부분을 \(x\)축 둘레로 회전시킬때 생기는 입제의 부피가 유한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displaystyle\left(\int_{b}^{\infty}{\frac{a^{4}}{x^{2}}dx}=\frac{a^{4}}{b}\right)\). 그러나 이 부분은 로베르발이나 14세기의 오렘이 앞서 발견할을 수 있다. 토리첼리는 1647년에 젊은 나이로 죽기 직전 다루었던 문제 중 \(x=\log y\)에 해당하는 곡선의 형태를 그려놓은 것이 있었다.
 토리첼리는 1641~42년에 갈릴레오와 만나 물리학에 흥미를 가졌고, 수학자보다 기압계의 발명자로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가 오래 살았다면 아마 미적분학의 발명자가 될 수 있었으나 요절했다.

 

21, 데자르그
 데카르트와 페르마의 시대에는 해석기하학과 무한소해석의 분야에서 큰 진보가 이루어졌다. 이 두 분야의 빛나는 성공이 당시 사람들에게 수학의 다른 분야를 상대적으로 잊게 하는 결과를 초래한 듯하다.
 수론은 페르마 외에 열중한 인물이 없었고, 순수기하학은 그 당시 전체적으로 무시되었다. 아폴로니우스의 '원뿔곡선'도 한 때는 페르마가 좋아하는 연구였으나 해석적 방법이 그의 견해를 바꾸었다. 그 사이에 원불곡선이 건축가이고 군대 기술자인 매우 비실용적인 상상력을 가진 데자르그의 주의를 끌기 시작했다. 그는 고심 끝에 거의 새로운 종류의 수학을 혼자 고안해냈고, 그 성과를 정리한 책 '원본과 평면이 만남으로써 생기는 결과를 다루는 시도에 관한 초고'는 제목이 길어 혐오감을 유발했다.

 데자르그의 연구의 바탕이 된 생각은 단순 그자체였고, 이것은 르네상스 회화의 투시화법과 케플러의 연속성의 원리에서 나왔다.
 원을 버스들이 보면 타원처럼 보이고, 전등갓의 그림자가 천장이나 벽에 비칠 때 원 또는 쌍곡선이 되는데, 어떤 종류의 성질은 그린 변화가 어떠하든지 그대로 유지되기도 하는데 데자르그는 이 성질들을 연구했다. 원뿔곡선은 몇 번 사영되어도 그대로 원뿔곡선이다. 원뿔곡선은 하나의 긴밀한 집합족을 형성했다. 데자르그는 케플러처럼 포물선은 '무한원'에 초점을 갖고, 평행선은 '무한 원점'에서 만난다는 것을 가정해야 했다. 그런 생각은 투시화법의 이론에 의해 가장 그럴듯하게 설명된다. 데자르그는 유한 또는 무한원점을 지나는 평민들은 연구했다.


22. 사영기하학
 데자르그의 용어는 전통적인 것이 아니었으나 원뿔곡선에 대해 다른 내용은 훌륭한 것이었다. 그는 원뿔곡선을 coup de rouleav(반죽을 미는 밀대의 사영)이라고 불렀고, 그의 새로운 용어 중 지금까지 전해지는 유일한 말은 대합(involution), 고정된 한 점에서 거리의 공이 일정한 값이 되는 같은 직선 위의 점들의 쌍이다. 그는 조화분할된 점을 네 점 대합이라고 하고, 그 배열은 사영했을 때 변함이 없음을 보였다.

 이 사실은 다른 관점에서 파푸스도 알고 있었다. 완전사변형은 조화적 특성이 있기 때문에 데자르그가 원뿔곡선을 다루는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왜냐하면 그런 사각형(위 그림의 \(ABCD\))이 원뿔곡선에 내접하고 있을 때, 대각점(위 그림의 \(E,\,F,\,G\)) 가운데 두 개를 지나는 선은 그 원뿔곡선에 대해 다른 하나의 대각점의 극선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는 어떤 점의 원뿔곡선에 대한 극선과 원뿔곡선의 교점은 처음 점에서 원뿔곡선에 그은 접선의 접점이 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또한 무한원에 있는 점의 극선으로 보는 생각을 도입했다. 이런 방법에 의해 데자르그가 원뿔곡선을 다루는 데에는 통일성이 있었으나 그것은 과거와 철저히 단절되었기 때문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데자르그의 사영기하학은 훌륭한 이점이 있었다. 왜냐하면 하나의 정리에 관한 수많은 특수한 예가 하나의 총괄적인 명제로 합쳐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수학자는 이 기하학적 방법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위험하고 불완전한 것이라고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데자르그는 주로 장인과 실용수학자들을 위해 글을 썼으나 이들은 이 연구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사영적 방법은 대수와 해석 분야만이 성공을 거두었던 그 시대에는 맞지 않았다.(거의 두 세기 동안 사영기하학의 장점은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데자르그의 이름은 다음의 유명한 데자르그의 정리로 유명해졌다.


 두 개의 삼각형이 대응하는 꼭짓점의 쌍을 연결하는 직선이 한 점에서 만나도록 놓인 경우, 대응하는 변의 연장선끼리 만나는 세 점은 한 직선위에 있다. 또 그 역도 성립한다. 

 

23. 블레즈 파스칼
 데자르그는 사영기하학을 제창했으나 일상동안 영예를 얻지 못했는데 주된 이유는 유망한 제자 파스칼이 수학을 버리고 신학을 공부했기 때문이다
 파스칼이 14살 때 아버지와 함께 파리의 '메르센 아카데미'의 비공식적 모임에 참가했고 거기서 데자르그의 생각을 알게 되었다. 그로부터 2년 혹은 1640년 16세 어린 나이에 '원뿔곡선시론'을 출판했다. 이 논문은 한 페이지 뿐이었으나 역사상 가장 내용이 풍부한 것이었다.
 다음은 '신비의 육각형(형파스칼의 정리로 알려진)' 이라고 표현된 명제이다. 파스칼은 데자르그식 용어를 이용하여 원뿔곡선에 내접하는 육각형의 꼭짓점을 차례로 \(A,\,B,\,C,\,D,\,E,\,F\)라 했을때 \(P\)가 \(AB\)와 \(DE\)의 교정이고 \(Q\)가 \(BC\)와 \(EF\)의 교정이라면 \(PQ\)와 \(CD\)와 \(FA\)는 '같은 종류의선'이다(바꿔말하면 그런 선은 한 점으로부터 나오는 직선족 또는 하나의 무한원점에서 나오는 평행선족의 구성요소이다)

 청년 파스칼은 이 정리로부터 원뿔곡선 위의 한 점에서 긋는 접선의 작도를 포함하는 많은 결론을 유도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 공헌을 스승 데자로그에게 돌렸다.
 원뿔곡선시론은 파스칼의 수학 연구경력에 좋은 출발이었고, 18세에 계산기 50대를 팔았다. 그 뒤 1648년에는 유체역학의 역설을 해명한 유체의 압력에 관한 실험을 했고, 1654년에는 '원뿔곡선에 관한 완전한 연구'를 했는데 인쇄되지 않아 오늘날 전해지지 않는다. 파스칼은 기호대수에 익숙해지려하지 않았거나 적절한 기초체계가 수학의 발견에 대하여 하는 역할을 인정하지 않아 이정에 관해서는 시대에 훨씬 뒤떨어졌었다.


24. 확률
 1654년 파스칼의 원뿔곡선을 연구할 때 친구인 드 메레가 다음의 문제를 냈다


주사위를 8번 던져 1의 눈이 나오면 이기는 놀이가 있다. 그러나 세번 실패한 뒤 그 놀이는 중단되었고, 이때 놀이자가 받아야할 포상은?


 파스칼은 이 문제에 관해 페르마에게 편지를 썼고, 두 사람의 편지 교환이 현대 확률론의 실질적인 출발점이 되었다. 파스칼도 페로마도 그 결과를 자세하게 쓰지 않았으나 1657년에 호이겐스(하위헌스)가 이들의 편지에 고무되어 소논은 '주사위 놀이에서 추론에 대하여'를 출판했다. 그사이에 파스칼은 확률의 연구를 산술삼각형 (파스칼의 삼각형으로 불림)에 연결해 카르다노의 성과를 뛰어넘을 정도로 발전시켰다. 파스칼의 삼각형이라고 불리는 산술삼각형은 소위 '이항계수'라고 불리는 수들로 구성된 삼각형이다.

이항계수 삼각형(오른쪽은 일본에서 만든 이항계수 삼각형)

(파스칼은 개념을 명확히 하는데 재능이 뛰어나 페르마와 그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귀납적 추론의 발전에 기여했다.)
 파스칼은 이 문제를 열심히 좇지는 않았으나 당시 활발하게 논의됐던 수론 문제, 곧 1에서 \(n\)까지 연속된 정수의 \(m\)제곱의 합을 식으로 나타내는 문제를 생각했다.
 여기서 그(파스칼)는 산술삼각형, 귀납적 추론, 무한소해석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위 문제를 다음과 같이 나타냈다.$$_{m+1}\text{C}_{1}\sum_{i=1}^{n}{i^{m}}+_{m+1}\text{C}_{2}\sum_{i=1}^{n}{i^{m-1}}+\cdots+_{m+1}\text{C}_{m}\sum_{i=1}^{n}{i}=(n+1)^{m+1}-(n+1)$$이 공식에서 파스칼은 다음의 적분공식을 유도했다.$$\int_{0}^{a}{x^{n}dx}=\frac{a^{n+1}}{n+1}$$25. 사이클로이드
 1654년 11월 23일 밤에 파스칼은 종교적 무아의 경지를 경험하고는, 과학과 수학을 버리고 신학에 전념할 결심을 했다. 그 결과 '시골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작품이 나왔다.
 그런데 1658-1659년 사이 통증이 생겨 이를 잊기위해 수학 연구로 돌아왔고, 사이클로이드와 관련된 넓이, 부피와 무게 중심을 구한 뒤, 파스칼은 당시 수학자들에게 그와 비슷한 6개 문제를 제시하고 정답자 중 1,2번째에게 상을 줄 것을 공고하고 심사위원으로 로베르발을 지명했다. "그런데 해답이라고 할 만한 것은 단 두개 뿐(라로베로, 월리스)이었고, 여기에도 몇 개의 계산착오가 있었다. 따라서 파스칼은 상을 주지 않았으나 자기자신의 해당을 다른 결과와 함께 출판했다(데톤비유의 편지). 그런데 이 문제와 '데톤비유의 편지'에 의해 사이클로이드를 관심의 대상이 되었으나 해답에 가까운 답을 쓴 라로베르와 윌리스는 상을 받지 못한 사실에 불만을 풀었고 이탈리아 수학자들은 파스칼이 '사이클로이드의 역사'가 발견의 우선권을 로베르발에게만 주고 토리첼리에게는 어떤 명예도 주지 않은 사실에 분개했다.

 새롭게 얻은 성과 가운데는 일반화된 사이클로이드 \(x=ak\phi-a\sin\phi\), \(y=a-a\cos\phi\)의 아치 하나의 길이와 타원 \(ㅌ=2a(1+k)\cos\phi\), \(y=2a(1-k)\sin\phi\)의 둘레의 반이 같다는 사실이 들어있었다. 이 정리는 본질적으로 아르키메데스의 방법으로 증명되었다. 1658~1659년까지 파스칼의 증명은 대부분 아르키메데스의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1658년 '사분원의 사인에 관한 논문'에 나오는 사인함수의 적분을 보면 파스칼은 미적분학의 발견에 놀랄 만큼 가까이 다가가 있었다. 그러나 파스칼은 39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파스칼은 적어도 수학의 진보에서 중요한 연결고리 역할을 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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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kywalker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