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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사] 4.(한국교육사) 조선시대의 교육



고려 말기에 이성계를 비롯한 신진사대부들에 의해 조선이 건국되었다. 신진사대부들의 사상은 성리학이었고, 고려 말기 불교의 타락과 신진사대부들의 불교 사상을 기반으로 한 구귀족에 대한 견제로 인해 조선시대의 통치이념은 성리학이 되었다. 조선의 지배층들은 불교와 도교, 전통신앙 등을 억압했고 그 결과 불교와 전통신앙은 깊은 산으로 숨게 되었다.   


조선시대의 교육기관으로 성균관, 사학(四學), 향교, 서원, 서당이 있다. 


성균관


성균관의 성(成)은 인재를 이룬다, 균(均)은 풍속을 바꾸게 한다, 관(館)은 국가의 공식적 기관을 뜻한다. 현재의 사립대학인 '성균관대'(전통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은 없다)의 기원이기도 하다. 기본적인 목적은 성인 또는 현인을 제사하고, 성리학을 연구, 보급하여 성리학 이념에 입각한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다.

성균관의 입학자격은 초시 합격생인 생원, 진사를 원칙으로 하는데 이들로 정원을 채울 수 없을 경우는 사학(四學, 승보생이라고 하고 아직 관직에 오르지 못하고 과거에도 합격하지 못한 사람이 대상) 학생들로 충당했으며 공신 또는 고관의 자제들로 충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일차 시험인 초시에서 700명을 선발하고, 이들 중에서 이차 시험인 복시에서 생원과 진사 각각 100명씩 모두 200명을 선발했으며 사학 출신의 경우는 '소학' 구두시험으로 100명을 선발했다.

성균관에서는 주로 4서5경과 역사서를 교육했고, 4서의 경우 주자가 주(註)를 달은 책만 사용했다. 독서는 다음과 같이 주희(주자)가 확립한 사서 독해의 순서를 따랐다: 

먼저 대학을 통해 학문을 공부하는 목적을 정하고 뜻을 세운 후, 논어로 학문의 근본을 세우고 맹자를 읽어 학문의 발전과 의리를 분별하는 법을 익히고 중용을 통해 우주의 원리를 터득한다.

수업은 매일 강의를 하고 어려운 점을 논해서 의문을 해결해 확실히 학습한 것을 본 뒤에 새로 배울 내용을 가르쳤다. 이것은 반복 복습하여 학생의 재질대로 충분히 이해시키는 개인표준의 문답식이다. 

시험으로 제술시험과 강경시험이 있는데 제술시험은 논술, 작문시험과 비슷하고, 강경시험은 경서 내용에 대한 구술시험이다. 제술시험에서 특이하거나 천박한 문체를 사용한 자는 퇴학처분을 내렸고, 정자체인 해서(楷書)로 답안작성을 하지 않은 자는 벌을 내렸다. 강경시험은 다음의 5등급으로 평가했다.

 대통(大通)

 끊어 읽는 것이 분명하고, 막힘없이 해석하며, 한 가지 경서의 의미를 다른 경서와 관련해서 깊이 이해한 경우

 통(通)

 한 가지 경서만 깊이 이해한 경우 

 약통(略通)

 한 가지 경서에서 한 장(章)의 의미를 정확하게 해석한 경우 

 조통(粗通) 

 한 장(章)의 요지를 이해하나, 설명에 부족함이 있는 경우 

 조통이하(粗通以下) 

 경서 중 한장도 전혀 설명하지 못하는 경우(벌을 내림)

성균관에서는 엄격하게 관생들을 훈육했다. 예로 시험에 합격하지 못하거나 학업태도가 불량, 행실이 불량, 사치스러운 관생은 체벌(종아리를 때림)을 하거나 퇴학시켰다. 

조선시대의 과거응시절차는 다음과 같다.


생원진사시(소과) 합격[생원시: 초시, 복시의 2단계, 진사시: 초시, 복시의 2단계]→성균관 재학→문과(대과) 응시[초시, 복시, 전시의 3단계]


위의 절차대로라면 과거에 급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균관에 입학해야 했다. 성균관에 입학한 학생들은 원점법(圓點法)의 적용을 받았는데 원점법은 성균관에서 일정 기간 동안 수학한 학생들에게 문과 응시자격을 부여하는 법으로 성균관 식당에서 아침, 저녁 식사 때 참석하면 동그란 원점 하나를 찍어주는 것이었고 만약 아침과 저녁 중 한 번만 출석하는 경우는 반점을 찍어주었다. 이 원점법은 초기에 300개로 정해졌으나 이후로는 변동이 있었고, 3년마다 실시되던 과거시험인 식년시(式年試)에만 적용되었으며, 부정기 시험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학생들이 성균관에 입학한 이유는 과거응시 자격을 얻기 위해서였음을 위 사실들을 통해 알 수 있다.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특정 학교 출신인 것 보다 과거시험에 합격하는 것이다.

성균관에는 상당한 특전이 있었다. 왕이 수시로 성균관에 행차해 관생들을 대상으로 관생들을 대상으로 관시, 알성시를 치러서 이 시험에 합격한 관생들은 식년시 또는 증광시(국가 또는 왕실에 경사가 있을 때 실시되던 비정기시험)의 문과 급제자와 동등한 자격을 얻었다.

성균관 관생들은 스스로 대표를 선출하여 회의를 하였고, 왕이 정치를 잘못하거나 논란이 될 만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상소를 올렸으며, 권당(捲堂: 식당에 가지 않음, 단식투쟁), 공관(空館:성균관을 나오는 것, 동맹휴업) 등의 방법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키려 했다. 국가에서 성균관 관생들은 국가의 원기라 해서 이들의 이러한 행동들에 대해 문제삼지 않았다.


사학(四學)


사학은 사부학당(四部學堂)에서 명칭이 유래했고 고려말의 5부학당 제도를 계승한 것인데 형편상 북학을 제외한(여기에 대한 기록은 자세하지 않다) 동학, 서학, 남학, 중학의 4개 학당만을 운영했다.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다가 다시 세워졌고, 국가에서 토지와 노비를 주어 장려했으나 폐단이 많았고 효과적이지 못했으며 학생들도 해이했다고 한다. 정원이 한번도 찬 적이 없었고 결국 고종 때 폐지되었다.

학교의 위계상으로는 성균관의 하급 단계에 해당하는 학교로 사학의 교관이 사학의 교관을 겸직했고, 성균관 정원에 결원 발생 시 사학 학생이 입학할 수 있었다. 한 학당에 교관 2명과 훈도 2명으로 구성되었다.

교육방법과 교수법은 성균관과 비슷했고(경서, 역사의 강독 및 제술(製述)) 규모는 작았다. 10세 이상의 양반자제들이 입학해서 15세 때 하문이 우수하면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었다.


향교


향교의 의미에는 다음과 같이 두 가지가 있다. 

1. 지방학교에 대한 범칭(향학, 鄕學), 2. 지방의 특정한 학교를 지칭 

조선시대의 경우는 후자(2)를 의미했고, 수령, 지방유지의 협력으로 세워졌다. 고려 말에는 향교가 군(郡) 단위까지만 세워졌으나 조선시대에는 군보다 한 단계 아래인 현(縣) 단위까지 세워졌다. 향교의 크기에 따라 학생 정원, 교관의 지위, 학전(學田)의 차이는 다음과 같다.

 학생 정원

 목(牧) 이상의 향교: 90명, 도호부 향교: 70명, 군 향교: 50명 

 교관 

 도호부 이상의 향교: 종 6품 교수 1명, 군 이하의 향교: 종 9품 훈도 1명 

 학전 

 주 및 부: 7결, 군 및 현: 5결 

향교의 교육은 유교경전의 강독, 시 또는 문장을 짓는 능력(성리학)의 학습이었고, 간혹 농업, 잠업과 같은 실업교육도 이루어졌다. 조선 초기 지방에서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서는 향교에 적을 두어야 하고 향교에서 수학한 후, 생원진사시(소과)에 응시하는 것이 관례였다.

조선 중기부터 향교는 쇠퇴하기 시작했는데 그 이유로 과거와의 연계성이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세종 때 사학 출신들에게도 과거응시 자격을 부여했고, 향교 교관의 무능력으로 인해 외면당했다. 그 결과 양반 자제들은 향교로 가지 않았고, 양인(良人)들이 그 자리를 채웠으나 향교 학생들이 군역을 면제받았기 때문에 군역을 피하기 위한 도피처가 되었다.


서원


서원은 16세기 이후 제사와 교육을 목적으로 세워진 사학(私學)으로 중국의 제도를 모방한 것이다. 최초의 서원은 중종 때 풍기군수 주세붕이 고려시대 유학자인 안향을 모시고 교화를 위해 세운 백운동서원이다. 이황의 건의로 명종이 사액(賜額)서원으로 지정했고, "소수서원"이라는 명칭과 서적, 노비, 토지를 받았다. 그 이후로 서원에 국왕이 사액하는 관행이 생겼고 이황은 유교 성현의 가르침을 올바로 이해하고 실천한다는 목적으로 여러개의 서원을 세웠다. 서원은 초기 설립목적이 과거준비보다 유교 성현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실천하기 위해서 설립되었으나 과거교육을 무시할 수 없었다.

초기 서원들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성리학 연구 및 수양, 과거준비를 목적으로 설립되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설립되었는데 그 이유는 1. 자기 당파의 위상을 높이고 결속을 다지기 위해서, 2. 향촌사회에서 양반들이 자신들의 결속력을 강화시켜서 지역주민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해서였으며 또한 군역과 부역을 피하기 위한 도피처로도 악용되었다. 이로 인해 당파싸움이 격화되었고 향촌주민들과 관리들이 착취당했으며 국론분열과 국가재정을 초래했다.

영조 때 서원의 문제점들을 해결하려고 했으나 부분적인 성과만 얻었고, 결국 흥선대원군 때 당시 697개의 서원 중 47개만 남고 나머지는 전부 폐쇄되었다.(참고: 중국 송나라부터 명나라에 걸쳐 세워진 서원의 수는 300~400개이다.)


서당


서당은 조선시대의 기초교육을 실시하는 사설 초등교육기관으로 고구려 경당의 후신이다. 조선시대에 학생들은 향교를 기피했고, 서원은 특권 및 배타적 교육기관이였다. 이처럼 교육기관들은 여러가지 문제를 안고 있어서 새로운 성격의 교육기관이 필요했다. 이를 충족시킨 것이 서당인데 조선 초기에도 존재했지만 17세기 이후로 교육인구의 급증으로 인해 본격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서당의 설립은 다음과 같이 3가지 수준에서 이루어졌다.

1. 개인이 서당을 설립해서 학생들을 모집.

2. 가문 또는 문중에서 자제들의 교육을 위해 교사를 초빙하여 서당을 설립.

3. 하나 또는 여러 마을이 공동으로 자제들의 교육을 위해 교사를 초빙해서 서당을 설립.

앞에서 서당은 초등교육기관이라고 언급했지만 기존 교육기관들의 문제로 인해 그 대안의 성격을 가졌기 때문에 단순히 초등교육이 아닌 완성교육의 성격을 갖고 있다. 중등교육기관인 향교 또는 사학(四學)에 입학하기 위한 예비단계지만 중등교육에 준하는 교육으로 생원, 진사 시험을 볼 수 있었다.

서당의 구성은 훈장, 접장(接長, 큰 규모의 서당에서 하급과정의 학생들을 가르치는 직책으로 나이가 많고 실력이 뛰어난 학생이 맡음), 학도(학생)로 구성되었다. 작은 규모의 서당에서는 훈장이 가르쳤지만 큰 규모의 서당에서는 훈장이 모두 가르치기에 한계가 있어서 나이가 많고 실력이 뛰어난 학생을 접장으로 임명해서 하급과정 학생들을 가르치게 했다. 서당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은 훈장에 따라 다양했다.

서당교육의 의의는 교육의 대중화(극민 사상의 통일)와 평등교육 발전에 공헌한 것이다.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조선시대의 교육은 과거급제가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시험에 매달리는 이유는 양반 가문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학생들이 관학을 기피하는데는 교관의 자질부족과 열악한 숙식조건이 원인이었다. 조선시대에 과거문제의 예상문제들을 모은 초집(抄集)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4서3경을 다 외우는 것이 어려웠고 과거문제가 문제은행식으로 출제되었기 때문에 과거준비를 하는 학생들에게 인기를 얻었고 관학을 기피하게 만들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실학자들이 나섰으나 실패했다. 이것으로 보아 조선시대 교육과 현대 한국교육은 거의 닮았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의 가정교육


전통교육은 태교에서 시작되었다. 회임의 순간부터 태중 아기의 성장과 발달을 위해 영양, 정서, 행동, 언어, 건강 등을 각별히 관리했고, 출산 후 수유기의 수유방식과 태도도 매우 엄격하고 그 내용도 풍부했다. 이유와 배변훈련이 완성된 3살이 되면 남자는 아버지, 할아버지의 지도로, 여자는 어머니, 할머니의 지도로 사회화가 이루어진다. 부모들은 주로 놀이 및 수수께끼 등으로 유아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기본습관의 형성 및 가족호칭, 언어, 인지의 발달을 촉진시켰으며 명절 제사 등을 중심으로 한 가족행사에서 인사법, 촌수, 호칭 등의 교육을 했다.

3~4살 일 때는 말을 알아들을 단계여서 남자의 경우 이때부터 과거공부를 했다.

7살이 되면 남자는 사랑채에서 아버지 또는 할아버지와 함께 생활하면서 선대조상의 이름자, 조부모의 함자 부르는 법, 기초 문자교육, 아동자신의 신상정보 등을 배웠고, 여자는 5살까지의 교육이 남자와 동일하나 7살부터는 성인여성에게 요구되는 가족 및 사회적 역할에 대한 지식, 태도, 기능 등을 어머니 등의 성인여성에게 배웠다.   

남녀 공통으로 족보를 보여주면서 가문에 관한 이야기를 해서 가문을 자랑하여 자존감을 갖게 했다.


조선시대의 기술교육


국가에서 필요한 기술교육은 별도의 기관에서 교육이 이루어졌다. 기술교육은 중인 이하의 계층들이 대상으로 소속된 각 관아에서 도제식 교육을 시키고 식년시, 증광시 등 다른 과거와 같이 시험을 보고 자격을 주거나 독학한 자를 시험해서 자격을 주고 등용했다. 기술직은 세습되었고 초기에는 천인 출신이었으나 점차 양인으로 교체되었다. 


참고자료:

교육학적 사유를 여는 교육의 철학과 역사, 정영근 외 3인, 문음사

교육철학 및 교육사, 조경원 외 4인, 교육과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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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kywalker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