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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사] 3.(한국교육사) 고려시대의 교육



고려시대에는 국교가 불교였으나 수신(修身)을 위한 사상이었기 때문에 백성들을 다스리는데에는 유교 이념을 사용했다. 고려는 여러 호족세력들을 기반으로 성립되었기 때문에 초기에 호족들의 권력이 막강했으나 교육제도를 통해 호족들을 회유했다.


고려시대의 교육기관으로 국자감, 사학(12도, 사숙), 학당, 향교(지방학교), 서당이 있다.


국자감 


국자감은 고려의 최고 교육기관으로 유교사상의 확대와 유능한 인제선발을 위한 과거제도를 활성화 하기 위해 세워졌다. 또한 왕권 강화를 위한 목적도 있다. 국자감은 유학부와 기술학부가 있고, 유학부에는 국자학, 태학, 사문학이, 기술학부에는 율학, 서학, 산학, 의학, 천문학, 지리학이 있다. 국자감 입학에는 다음과 같이 신분에 따른 자격 제한이 있다.

국자학: 문무관 3품 이상의 자손 등

태학: 문무관 5품 이상의 자손 등

사문학: 문무관 7품 이상의 아들 등

율학, 서학, 산학 및 기타 기술학부: 문무관 8품 이상의 아들과 서인 등

국자감의 교육과정을 살펴보면 국자학, 태학, 사문학은 논어와 효경을 선수과목으로 하고, 경서들을 3개 영역으로 나눈 다음 각 영역에서 1개 경전을 이수하게 했다. 

1. 상서, 공양전, 곡량전

2. 주역, 모시, 주례, 의례

3. 예기, 좌전 

율학은 법령, 서학은 팔서, 산학은 산술, 의학, 천문학, 지리학은 국자감이 아닌 전의감, 관상감, 사역감에서 가르쳤다. 

국자감은 문무관 7품 이상의 자제들만 입학이 가능했고 예종 때 7재(齋, 반(班))를 설치했는데 6개의 재는 유학, 나머지 1개의 재는 무예를 가르쳤다.

 재의 명칭

전공 

여택재 

주역 

대빙재 

상서 

경덕재 

모시 

구인재 

주례 

복응재 

대례 

양정재 

춘추 

강예재 

무예 

위의 정규 교육과정 외에도 시무책(오늘날의 정치, 경제학)을 익혔고 하루 한 장 분량의 습자도 쓰게 했다.

실제로 이 7재에서 가장 선호되었던 재는 무학재였고, 나머지는 인기가 없었다. 

국자감의 교관은 박사와 조교로 그 직급은 국자박사가 정7품, 태학박사가 종7품, 사문박사가 정8품, 율학박사가 정8품, 서학 및 산학박사가 종9품이었고, 조교의 직급은 분명하지 않다.

국자감은 대체로 당나라의 국자감과 비슷하지만 당나라 국자감은 신분 제약이 없고, 반면에 고려의 국자감은 위의 내용처럼 신분제한이 있다.


향교(지방학교)


고려 건국 초기에 지방학교가 존재했으나 언제 설치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고 중국과 인접한 지역에서만 존재했다. 성종 때 전국 12목(牧)에 대해 박사들을 파견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은 유경습업제도(留京習業制度: 지방 호족 자제들을 상경시켜 수학(修學)하게 하는 제도로 일종의 볼모제도)로 미약한 왕권과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으나 실제로는 지방에 학교가 없어서 호족 자제들을 위해 국가에서 교육상의 편의를 제공해 준 것이다. 또한 인조 때 "각 주에 학교를 세워 교도를 넓혔다"는 기록이 있다. 

원 간섭기에 교육에 관심이 있는 수령들에 의해 향교가 복구되기 시작했고 고려 후기에 향교 출신들이 두드러지게 중앙으로 진출했다.

향교에 입학하기 위한 조건은 "율, 서, 산학 및 주, 현 학생은 모두 8품 이상인 자와 서인, 7품 이상인 자의 자제"였고, 교육내용은 일정하지 않으나 과거시험 과목이던 명경과 제술에 대비하기 위한 유교경전의 학습, 시(詩), 부(賦)등을 짓는 문학수련으로 추정된다. 과거 시험의 글짓기는 독학으로 하기가 어려워 지방에 파견된 급제 출신 품관의 지도 또는 급제자나 학식으로 이름난 이가 지방에 내려올 때 청하여 배웠을 것이다. 고려 초기에는 중앙에서 교수를 파견했으나 후기에는 그러지 못하여 수령 등이 중심이 되었고 이는 향교 교육의 침체와 질적 저하를 초래했다.

향교 초기에는 학당만 존재했었고, 중기에는 공자묘와 학당이 공존했으며, 후기에는 공자묘와 학당이 분리되었다.


학당


고려 말기에 등장한 중앙의 학교로 무인정권과 몽고의 침입으로 학교교육이 후퇴한 것을 극복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원종 때 설립된 동, 서 학당을 그 기원으로 보고 공양왕 때 정몽주의 건의로 5부 학당으로 확대 개편되었다. 

동, 서 학당은 별감을 교육책임자로, 교학, 교도라고 불리는 교관이 있어 교육을 운영하고, 5부 학당으로 개편된 후에는 유학교수관이 파견되어 교육을 전파했다. 당시에 국자감이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국자감이 상급교육을 담당하고 학당은 하급교육을 담당했다고 볼 수 있다.

이 학당교육은 조선시대로 이어져 세종 시대에 4부학당의 체제로 정비되어서 조선의 교육전통으로 계승되었다.


사학


12도(徒)


'도(徒)'의 의미는 교습을 위해 사적으로 맺어진 교사와 학생들의 무리를 의미한다. 당시 각 '도'의 교육장소는 유동적이었고, 1개의 '도'에서 시작해 다른 사람들이 도를 만들어 12개의 도가 되었다. 그 중 12도의 시초(처음 1개의 도)이자 가장 인기가 있었던 것은 최충의 문헌공도였다. 최충이 벼슬에서 물러난 뒤 후진양성을 위해 사학을 세워 9경(주역, 시경, 서경, 예기, 춘추, 주례, 효경, 논어, 맹자), 3사(사기, 한서, 후한서), 제술 등을 가르쳤다. 이로 인해 학생들이 몰리게 되어 9개의 교실(9재(齋))을 설립해 학생들을 가르쳤다.

12도는 과거에 급제했으나 아직 관직에 오르지 않은 학생들이 강의를 하게 했다. 또한 최충의 문헌공도에서는 각촉부시(刻燭賦詩)를 실시해서 과거시험에 대한 대비를 했다. 12도의 교육목적은 과거에 급제하는 것이였고 문헌공도의 과거 합격률이 가장 높아서 가장 인기가 있었다. 

12도는 초기에 사학이었고 국자감이 미미하고 향교가 없었을 때에 세워져서 관학 진흥을 꾀하는 정책들을 나오게 하고 하나의 학벌을 형성해 교육계에 영향을 주었고 고려 말기에는 국가가 운영에 관여했으며, 공양왕 때 폐지되었다. 

주의할 점은 오늘날과 달리 전통시대(여기서는 고려시대)에는 학력이 중시되지 않았고 과거시험과 관련해 학교가 커다란 이점이 있는것도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현재처럼 국가가 학교교육을 지원할 수 있을 정도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예종 때 관학의 부활책으로 모든 과거 응시자격을 국자감에서 수학한 자로 제한해서 사학12도의 학생들은 스승을 배반하여 국자감으로 옮겼고 이 때문에 인종 때 이러한 학생들의 응시자격을 박탈했다. 고려 말에는 반대의 현상이 일어나서 사학 12도가 흥했다.


사숙(私塾)


사숙은 개인에 의해 세워진 작은 규모의 교육공간으로 조선시대의 서당과 유사하다.


고려의 학교들의 흥망성쇠는 어느 곳이 출세(과거급제)에 유리한가에 따라 결정되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이 현상은 교육 본래의 의미를 추구하지 않아 인격과 교양함양과 같은 교육의 본질적 측면을 무시되었음을 뜻한다. 이 현상은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더욱 심화된다.


참고자료:

교육학적 사유를 여는 교육의 철학과 역사, 정영근 외 3인, 문음사

교육철학 및 교육사, 조경원 외 4인, 교육과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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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kywalker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