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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자 이철희 사건

 

 

장영자 이철희 사건은 1982년 5월 4일에 사채시장의 큰손 장영자와 그 남편 이철희가 저지른 대규모 어음 사기사건이다. 

 

장영자는 목포 출생으로 9살 부터 서울에서 살았고, 숙명여대 교육학과를 졸업했다. 대학생 때인 22살 때 첫 결혼을 하나 그로부터 11년 이후에 이혼하게 된다. 다음으로 이혼한 이후인 33살 때 두 번째 결혼을 하나 9개월만에 이혼한다. 이때 태어난 자녀들은 전남편들이 키웠다.

두 번의 이혼으로 위자료를 받게 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부동산과 주식에 투자해 많은 돈을 벌었다. 

36살 때 (박정희 정권 시절)중앙정보부 차장 출신인 21살 연상의 이철희를 알게 되었고, 이철희와 결혼을 하게 된다. 이때 인맥과 배경을 과시할 목적으로 호화결혼식을 올려 사회에 물의를 일으켰다. 

이철희와의 결혼 이후 1981년 2월에 대화산업이라는 회사를 세웠고, 이 회사를 기반으로 사기극을 벌이게 된다. 

 

1980년 7월에 국군보안사령부 보안처장이었던 정도영 준장은 '장영자가 군 부대 불교행사에 거액을 뿌린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부대 전체에 장영자를 조심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1981년 청와대 산하 민정수석비서관실에 장영자 부부에 대한 첩보가 입수되었고, 당시 민정수석비서관이었던 이학봉은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장 유학성에게 통보했다. 유학성은 장영자에 대한 정보를 가볍게 여겼으나 곧 문제의 심각성을 알게 되었다. 

 

사기극의 첫 번째 대상은 공영토건이었고, 공영토건에서는 장영자에게 50억을 빌리려고 했으나 장영자는 연 11%의 금리, 2년 거치 3년상환의 조건으로 100억을 빌려주는 대신 빌린 돈의 두 배의 어음과 공영토건 내부 주식정보를 요구했다. 공영토건은 이러한 장영자의 요구조건을 받아들였다.

(참고: 그 당시 은행금리는 11%, 사채시장금리는 40%였다.)

(어음: 발행하는 사람이 미래의 일정한 금액을 일정한 시기와 장소에서 무조건 지급할 것을 약속하거나(약속어음), 또는 제3자에게 그 지급을 위탁하는(환어음) 유가증권이다)

그 이후로 장영자는 주로 자금난에 시달리던 건설회사(또는 다른 업종의 회사)를 찾아가서 가족들의 배경을 들먹이며(남편 이철희와 형부 이규광(전두환의 처삼촌)) 현금을 빌려주는 대가로 배에 달하는 어음을 받았다. 총 7,111억의 가치에 달하는 어음을 받았고, 받아낸 어음을 할인해서 6,404억원을 받아 그 돈을 이용하여 다른 회사에 빌려주는 행위를 반복했다. 

이렇게 확보한 돈과 어음을 주식에 투자해서 어음을 결제하려고 했으나 주가의 하락으로 인해 그러지 못했다.

 

*돈을 빌리고 갚지 못하면 사기죄로 고소당한다.

 

이에 자신들이 직접 어음을 발행할 목적으로 코오롱건설을 인수하려고 했고, 당시 이동찬 코오롱그룹 회장은 호텔과 같이 인수하고, 은행의 지불보증을 풀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장영자는 지불보증을 풀지 못해서 인수하지 못했다, 급기야는 1982년 4월에 공영토건에서 장영자에게 사기를 당했다는 진정서를 제출한다. 처음에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2과에서 맡았으나 중수부와 서울지검에서 수사를 하게 된다.

그 결과 장영자는 외환관리법 위반으로 대검찰청(이종남 부장검사)에 의해 구속되었고, 남편인 이철희 역시 구속되었다. 또한 어음 결제와 관련해서 은행장 2명과 공영토건, 일신제강 등의 기업인 32명이 구속되었고, 공영토건과 일신제강은 부도처리 되었다.

 

*신군부(전두환 군부)가 3, 4공화국의 대표적 부정축재자로 지목한 10명의 부정축재액 총액이 853억이었는데, 앞에서 언급했듯이 장영자 부부가 받아낸 어음의 총 가치는 7,111억원이다. 그 당시 서민용으로 건설된 개포동 주공아파트 18평의 분양가는 600~700만원(2020년 기준으로 약 7조원), 당시 10년 경력의 교사월급이 25만원이었다. 

 

검찰에서는 사건을 조사한 후 '장영자 부부가 15개월동안 49억원을 지출했다'는 결과를 발표한다. 이어 장영자 부부는 모두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는데 남편인 이철희는 먼저 가석방되었고, 장영자는 복역 10년만인 1992년 3월에 가석방되었다. 

이 사건으로 국무총리 유창순, 경제기획원장관 겸 경제부총리 신병현, 외무부장관 노신영, 문화공보부장관 이광표, 법무부장관 이종원, 검찰총장 정치근, 국가안전기획부장 유학성, 내무부장관 서정화, 총무처장관 김용휴, 재무부장관 나웅배, 체신부장관 최광수, 보건사회부장관 천명기, 민주정의당 사무총장 권정달, 교통부장관 윤자중, 농수산부장관 고건(훗날의 국무총리), 상공부장관 서석준, 동력자원부장관 이선기, 정무수석비서관 허화평(연말에 경질됨), 사정수석비서관 허삼수 (연말에 경질됨)등 당시 5공의 실세들은 물러났다. 유학성의 후임 국가안전기획부장에는 노신영이 임명되었다.

5공화국 정부는 이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두 차례의 개각과 1982년 5월 민주정의당 당직 개편을 단행하지만 이것만으로는 국민들의 분노를 가라앉힐 수 없었다. 당시에 5공화국 정권 구호를 빗대 '정의사회구현 좋아하네'라고 빈정대는 말이 유행했다. 

김재익 경제수석비서관은 이 사건을 계기로 음성자금의 양성화와 조세 부담의 불균형 해결을 위한 금융실명제를 건의하지만 없던 일이 되었다(금융실명제는 김영삼 때 시행되었다).

  

가석방 된 이후의 장영자는 시중 은행의 주요 간부들을 찾아다니다가 1994년에 140억대의 어음사기 사건을 저질러 징역형을 선고받았고, 이때 동화은행, 서울신탁은행이 연루되어 그 은행들의 은행장들이 사임했고, 이들 은행들도 징계를 받았다. 

1998년에 가석방이 되었으나 또 다시 구권 화폐 사기를 일으켜 2000년에 구속되었고(남편 이철희도 기소되었으나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 선고됨), 2015년 1월에 석방되었다. 이 기간 동안 남편 이철희는 옥바라지를 했으나 2014년 2월 23일에 사망했다.

(구권화폐: 과거 정권시절 비자금으로 조성된 수십조원 규모의 1만원권 지폐, 1994년 이전에 발행되었고 주로 사기사건에 이용되었다) 

이미 사망한 남편 이철희의 상속재산이 묶여있다고 해서 6억원 대의 사기행각을 벌이다가 2018년 12월 21일에 구속되었다.

 

*장영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첫 번째 부인 차용애의 고종사촌동생이었으나 차용애가 죽고, 이희호와 재혼했기 때문에 김대중과 인척관계가 소멸되었고, 따라서 김대중과 장영자는 법적으로 남남이다.

 

다음은 MBC드라마 '제5공화국'에서 장영자가 등장하는 부분영상이다.

27부: 큰손 장영자(I)

28부: 큰손 장영자(II)

29부: 큰손 장영자(III)

 

참고: 

ko.wikipedia.org/wiki/%EC%9E%A5%EC%98%81%EC%9E%90

ko.wikipedia.org/wiki/%EC%9D%B4%EC%B2%A0%ED%9D%AC_(1923%EB%85%84)

ko.wikipedia.org/wiki/%EC%9D%B4%EC%B2%A0%ED%9D%AC_%EC%9E%A5%EC%98%81%EC%9E%90_%EC%96%B4%EC%9D%8C_%EC%82%AC%EA%B8%B0_%EC%82%AC%EA%B1%B4#cite_note-9

namu.wiki/w/%EC%9D%B4%EC%B2%A0%ED%9D%AC(%EB%B2%94%EC%A3%84%EC%9E%90)

namu.wiki/w/%EC%9E%A5%EC%98%81%EC%9E%90

namu.wiki/w/%EC%9E%A5%EC%98%81%EC%9E%90%C2%B7%EC%9D%B4%EC%B2%A0%ED%9D%AC%20%EA%B8%88%EC%9C%B5%EC%82%AC%EA%B8%B0%20%EC%82%AC%EA%B1%B4?from=%EC%9E%A5%EC%98%81%EC%9E%90%20%EC%82%AC%EA%B1%B4

www.youtube.com/watch?v=5cUPq3mvnU0

m.mt.co.kr/renew/view.html?no=2005022716320860368#_enliple

www.sisa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119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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